이처럼 우리가 사랑에서 특히 주관적인 쾌락을 추구하기 때문에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취향이 사랑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나이에 이르게 되면 가장 육체적인 사랑은 그 바탕에 욕망이 없어도 생겨날 수 있다.

오데트 드 크레시의 이미지가 그의 모든 몽상을 흡수해서는, 그 몽상이 그녀의 추억과 더 이상 분리되지만 않는다면 그때 그녀의 육체적인 결함이나 그녀 육체가 다른 여인보다 스완의 취향에 더 어울리는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육체는 그가 사랑하는 여인의 육체이므로 이제부터는 오로지 그 육체만이 그에게 기쁨과 고뇌를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스완이 어떤 혼란스러운 인상을 받았던 것은 아마도 음악을 알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인상은 오로지 유일하게 음악적이고 영역이 좁은, 다른 어떤 인상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완전히 독창적인 것이었다.

대중이란 서서히 동화된 진부한 예술 작품으로부터 길어 올린 것만이 매력과 우아함과 자연의 형태를 보여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독창적인 예술가란 바로 이런 진부함을 벗어 버리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언어에서라면 그런 논리적 관계의 왜곡이 금방 광기를 드러내겠지만, 순수한 음악 작품이란 어떤 논리적인 관계도 그 속에 두지 않기 때문에, 소나타에서 인지되는 광기란 실제로 관찰되는 암캐의 광기나 말의 광기만큼 스완에게는 뭔가 신비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제까지 미학적인 방식으로 아름답다고 여겨 오던 것을 한 살아 있는 여인에게 적용해 육체적인 장점으로 변형했고, 그리하여 자신이 소유할 수 있는 존재와 결합된 것을 보고는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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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에 따르면 밀랍이 자신이 모든 속성을 갖게 되는 까닭은 그것이 밀랍이라는 본질을 지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현미경 또는 초현미경 수준에서 물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어떤 방식으로 배열되어 다른 방식이 아닌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작용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이런 과정이 기본적으로 기계론적이라고 생각한다. - P108

데카르트는 세계의 모든 자연 현상은 바로 현상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들은 모두 실재하는 사물이며 사건이지만 이들이 세계의 기본 실재는 아니며오직 기본 실재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다양한 방식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을만들어내는, 배후에 놓인 기본 실재는 무엇인가? 그 대답은 오직 물체의 연속이라는것이다.  - P115

도덕과 종교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는 듯하며,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의 우리는 완벽하게 선한 사람이 무신론자인 경우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데카르트에게 이런 구별은 모두 인위적인 것이며 따라서 부적절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게 과학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인식하는 것은 신의 계속되는 창조 활동을 인식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한 일이다.  - P222

데카르트가 행하려던 바, 곧 인간의 사고가 객관적 진리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려는 어떤 시도도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이런 작업을 위해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도구는 오직 인간의 사고 자체뿐이기 때문이다(p244)... 그리고 바로 이것이 데카르트가 회의주의를 반박하면서 신에게 호소한 이유이기도 하다.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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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성찰』 입문
리처드 프랭크스 지음, 김성호 옮김 / 서광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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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의 전체 구조는 우리가 세계를 우리의 내부로부터 인식한다는 믿음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코기토를 통해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점을 인식한다는 것에 더해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곧 나는 나의 특수한 특성이나 내력이 아니라 사고하는 존재, 한 개인 그리고 자아임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이런 이해에 기초해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념과 물질적 사물에 대한 관념을 형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_ 리처드 프랭크스, <데카르트의 성찰 입문>, p188

리처드 프랭크스 (Richard Francks)의 <데카르트의 성찰 입문 Descartes’ Meditations>은 6개의 성찰로 이루어진 데카르트( Rene Descartes, 1596~1650)의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에 대한 입문서이며 해설서다. 저자는 이를 통해 데카르트의 주장을 설명하면서 때로는 비판하기도, 때로는 옹호하면서 데카르트 철학의 현대적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를 통해 기계론적 인간관, 이원론, 환원주의 등 현대 과학 사상의 뿌리를 발견하게 된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 올바른 일인 까닭은 단지 우리를 진리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를 통해 동시에 신의 창조를 더욱 잘 인식하게 함으로써 신을 제대로 숭배하게 만들고, 신이 순전히 지적으로 창조한 세계를 나 자신의 소박한 방식으로 이해하도록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감각이 일으키는 혼란을 넘어서서 나의 자유의지를 사용함으로써 나의 도덕적 의무를 다한다. _ 리처드 프랭크스, <데카르트의 성찰 입문>, p235

<성찰>에는 유명한 코기토(cogito ero sum) 명제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지만, 해당 내용은 제2성찰에 포함되며, 데카르트 논의의 확장에 한 축이 되는데, <데카르트의 성찰 입문>가 보여주는 전체 구조 속에서 독자들은 데카르트의 회의주의가 거부할 수 없는 제1명제를 찾기 위해 자신의 내부로 들어가 존재를 확인하고 이로부터 다시 외부로 나가는 흐름을 파악하게 된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하야 할 점은 <성찰>에서의 신(神)의 존재다.

<성찰>은 상당히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 저술이다. 한편으로 모든 것을 회의하는 사고하는 자가 진지하고 개방적인 태도로 탐구를 진행해나가는 방식도 그렇고, 다른 한편으로 더욱 깊은 수준에서 사실은 교회 권위자들이 믿는 바 대부분을 무너뜨리려 하면서도 저술 자체는 그들이 수용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애쓰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에 비추어 보면 <성찰>에서 신이 담당하는 역할 또한 일종의 가장이 아닌가? _ 리처드 프랭크스, <데카르트의 성찰 입문>, p216

데카르트가 의심할 수 없는 자신의 존재로부터 외부로 논의로 확장할 수 있다면 그 근거는 무엇일까? 제1성찰의 가정처럼 데카르트 자신이 꿈 속의 악령의 힘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확신할 수 없다면 그의 성찰은 높은 벽에 가로막히게 되는데,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가도록 이끄는 존재가 바로 우리의 유한성을 깨닫게 해주는 전지전능한 신이다.

이 무한한 실체(신)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이 실체는 일시적 기분이나 선호, 욕구 등을 전혀 지니지 않으며 그저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궁극적으로 설명할 수 있기 위해서 신은 모든 것을 행할 수 있어야 하며, 바로 그런 의미에서 전능하다.... 신이 모든 것의 설명 근거라면,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면 신은 어떤 의미에서 궁극적인 진리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을 자신 안에 알려질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존재로 생각할 수 있으며, 바로 이런 의미에서 신은 전지하다. _ 리처드 프랭크스, <데카르트의 성찰 입문>, p222

결국, <성찰>에서 데카르트의 성찰은 지성과 의지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유한한 인간의 인식이 오류를 범하지 않고 절대진리인 신에게 이르기 위해서는 이성을 사용한 과학적 방법만이 유일한 길임을 6일간의 성찰을 통해 드러낸다.

오류는 지성과 의지의 결합에서 생겨난다. 나의 지성은 나에게 관념들을 제공하며, 나의 의지는 그들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결정한다. 따라서 지성은 내가 범하는 오류의 원인이 아니다. 지성은 단지 내가 고려해야 할 관념들을 제공할 뿐이다. 하지만 의지는 이와 정반대이다. 나는 무엇인든 원할 수는 있지만 자유롭기 때문에 잘못 원할 수도 있다. 오류는 내가 오류에 빠지기 쉽지만 제한되지 않는 나의 의지를 사용한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_ 리처드 프랭크스, <데카르트의 성찰 입문>, p232

우리는 <데카르트 성찰 입문>을 통해 데카르트 자신은 <성찰>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E 384~322)의 영향을 받은 스콜라 철학자들을 비판했지만, 정작 그 비판방식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의 신앙과 이성의 길을 사용했음을 확인하게 된다. 아직 중세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데카르트 철학의 전체 구조를 담아두고 그의 저작 <성찰>을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순수한 관찰에서 얻은 지식이 아무리 '정밀하다' 할지라도 이들은 참되고 불변하는 지식에 결코 이를 수 없었다. 이들의 탐구에서 빠진 요소, 곧 과학적 지식의 진정한 기초는 경험에 포함된 것이 아니라 관찰을 과학으로 바꾸는 요소인데 이 요소가 바로 이성이다. _ 리처드 프랭크스, <데카르트의 성찰 입문>,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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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란 우리 믿음이 존재하는 세계로는 들어오지 못하며, 사실은 믿음을 낳게 한 적이 없지만 파괴하지도 않는다. 사실은 믿음을 끊임없이 거부할 수는 있어도, 믿음을 약화하지는 못한다.

우리가 느낀 것을 있는 그대로 옮긴다고 주장하는 대부분의 번역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 불분명한 형태로 그 느낌을 빠져나가게 함으로써 우리를 해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 여인이 나타났으면 하는 욕망이 자연의 매력에 뭔가 더 열광적인 것을 덧붙여 주었다면, 반대로 자연의 매력은 여인의 매력이라는 지나치게 한정된 매력을 더 풍부하게 해 주었다. 나무의 아름다움은 곧 여인의 아름다움이었고, 그녀의 입맞춤이 지평선의 영혼과 루생빌 마을의 영혼, 내가 그해 읽은 책들의 영혼을 내게 넘겨줄 것만 같았다. 내 상상력은 관능적인 것과 접촉하면서 힘을 얻었고, 관능적인 것은 내 상상력의 모든 영역으로 확산되어 내 욕망은 이제 끝이 없었다.

내게는 그런 욕망이 순전히 내 성격이 만들어 낸 주관적이고 무기력하고 환상적인 창조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이제 욕망은 자연이나 현실과 무관했고, 그리하여 현실도 모든 매력이나 의미를 상실한 채 내 삶에서 하나의 관례적인 틀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마치 여행자가 기차 좌석에 앉아 시간을 보내려고 책을 읽을 때 그가 탄 기차가 소설의 허구 세계에 대해 그러하듯이.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은 내게 여러 다른 인상들을 동시에 느끼게 했으므로, 아마도 그 인상들은 결코 따로 떼어 놓을 수 없을 정도로 하나가 되어 훗날 내게 많은 환멸을 맛보게 했고, 또 많은 과오를 범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이 모든 추억들이 서로 겹치며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었지만, 그렇다고 그 추억들 사이에서 ? 가장 오래된 것과 ‘향기’로 인해 생긴 최근 추억, 그리고 내가 알게 된 다른 사람에 대한 추억 사이에서 ? 진정한 균열이나 단층은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어떤 암석이나 어떤 대리석에서처럼 기원과 나이와 ‘형성’의 차이를 나타내는 돌의 결이나 색채의 다양함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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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 꽃의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는 자태에도 불구하고, 간헐적으로 풍기는 향기는 그 강렬한 생명력의 속삭임인 듯했고, 제단은 살아 있는 곤충의 더듬이들이 방문하는 어느 시골 울타리인 듯 진동했다. 거의 붉은 빛이 도는 몇몇 꽃 수술들을 보면서, 그것이 지금은 꽃으로 변신했으나, 곤충이 지닌 봄의 독기와 자극적인 기운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욕망이나 고통에 방해받지 않고 전념할 권리를 아주 어렵게 획득한 의지는, 비록 아주 잔혹한 사건이라고 해도 그런 급박한 사건들의 손아귀에 고삐를 맡기고 싶어 한다

콩브레 주변에서 산책을 하려면 ‘길’이 두 개 있었는데, 이 두 ‘길’은 아주 반대 방향에 있어서 우리가 집을 나갈 때면 결코 같은 문으로 나가지 않았다. 하나는 메제글리즈라비뇌즈였는데, 그 길로 가려면 스완 씨네 소유지를 지나가야 했기 때문에 스완네 집 쪽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다른 길은 게르망트 쪽이었다. 메제글리즈라비뇌즈에 대해서는 그런 ‘길’이 있다는 것과, 일요일이면 이상한 사람들이 콩브레에 와서 산책한다는 것밖에는 알지 못했다. 그 이상한 사람들이란 이번에는 아주머니조차도 알지 못하는, 그래서 우리 모두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이런 이유만으로도 그들은 ‘메제글리즈에서 왔을 것 같은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나는 르그랑댕 씨와 함께 그의 집 테라스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밝은 달이 비추었다. "고요함에는 좋은 점이 있다네, 그렇지 않은가?"라고 그는 말했다. "나처럼 상처 받은 마음에는, 그대가 나중에 읽을 소설가가 말했듯이, 그늘과 고요만이 적합하다네

꽃이 내게 불러일으킨 감정은 내게서 떨어져 나가 꽃에 가서 들러붙으려 했지만 헛수고였고, 그리하여 그 감정은 여전히 모호하고 막연한 채로 남아 있었다.

우리 과거도 마찬가지다. 지나가 버린 과거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헛된 일이며, 모든 지성의 노력도 불필요하다. 과거는 우리 지성의 영역 밖에, 그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우리가 전혀 생각도 해 보지 못한 어떤 물질적 대상 안에 (또는 그 대상이 우리에게 주는 감각 안에) 숨어 있다. 이러한 대상을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에 달렸다.

정신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 오로지 정신만이 실현할 수 있고, 그리하여 자신의 빛 속으로 들어오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과 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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