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와 철학 - 근대 과학의 혁명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지음, 조호근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코펜하겐 해석을 이해할 때의 진정한 어려움은 다음의 유명한 질문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원자 수준의 사건에서 '실제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가?"... 이 경우 관찰로 얻어낸 결과는 확률함수, 즉 우리가 아는 사실에 대한 가능성 또는 경향성에 대한 수학적 표현일 뿐이다.(p57) <물리와 철학> 中


 만약,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1901 ~ 1976)의 <물리와 철학 Physics and Philosophy>을 관통하는 핵심어를 묻는다면, '관찰(觀察, observation)'이라 생각된다. 양자론(量子論 Quantum theory)의 세계에서 관찰이라는 행위는 사건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며, 행위 결과는 확률함수의 주관적 요소 때문에 불연속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다. 이는 저자의 '불확정성 원리(不確定性原理, uncertainty principle)' 내용 중 일부이기도 하다.


 관찰 자체는 확률함수를 불연속적으로 변화시킨다. 모든 가능한 사건 중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관찰을 통해 계(界)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불연속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에, 이를 수학적으로 표현한 결과 또한 불연속적으로 변화하여 소위 말하는 '양자 도약 quantum jump'이 발생한다... '가능성'이 '실재'로 번환되는 사건은 관찰이라는 행위가 벌어지는 도중에 발생한다.(p62) <물리와 철학> 中


 확률함수에는 객관적인 요소와 주관적인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 그 일부는 가능성이나 더 나은 쪽을 향하는 경향성과 관련된 기술이며, 이런 기술은 완벽하게 객관적이라 관찰자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다른 일부는 계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과 관련된 기술이며, 이는 관찰자가 바뀌면 달라지는 요소이므로 당연히 주관적이다.(p60)... 상호 작용을 감안하면, 한때 '단순 사건'이었던 확률함수에는 경향성에 의한 객관적인 요소와 불충분한 지식에 의한 주관적인 요소가 혼재하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관찰 결과를 확실하게 예측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이다.(p61) <물리와 철학> 中


 현대 물리학자인 하이젠베르크의 입장에서 철학은 어떤 의미일까. 저자에 따르면, 그리스 철학의 많은 부분이 현대 물리학 명제를 설명하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정확한 실상(實狀)이 아니다. 현대 물리학은 관찰과 실험에 의해 이론이 지지되지만, 고대 철학은 일반 경험에 기반한 이론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주관적이며, 물리학에 비해 현실의 한계가 명확하다. 특히, 철학과 물리학의 차이점은 '언어(言語 language)' 문제에서 보다 극명하게 드러난다. 


 고대 철학의 주장 중 일부는 현대 물리학의 명제에 꽤나 근접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실험을 수행하지 않아도, 자연계에 대한 일반적인 경험을 쌓고, 이 경험에서 일반 법칙을 도출하고 질서를 부여하려는 부단한 노력을 반복하면, 인간의 사상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를 확실히 보여준다.(p90) <물리와 철학> 中


 현대 물리학과 그리스 철학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하며, 이는 현대 과학이 가지는 실험과 실증적 탐구 방식에서 유래한다. 갈릴레오와 뉴턴의 시대 이래로 현대 과학은 자연에 대한 세밀한 탐구와 실험에 의해 입증된, 아니면 적어도 입증될 수 있는 공리에 기반을 되어왔다... 현대 과학은 그 시작점부터 그리스 철학보다 훨씬 보편적이고 훨씬 단단한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이다.(p69) <물리와 철학> 中


 저자에 따르면 일상 생활에서 사용되는 언어(또는 철학 언어)로 물리학의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일상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내용에 대해서는 결국 '수학의 언어'가 활용될 수 밖에 없게 된다는 저자의 말은, 현대 물리학의 단단한 기반은 수학 위에 기초한다는 이야기로 바꿀수 있다.


 양자론의 수학 기호와 일반 언어의 개념은 명확한 상호 관계를 형성하며, 실험 또한 이 상호 관계를 통해 충분히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이번에도 문제가 남는 것은 사실쪽이 아니라 언어 쪽인데, 일반 언어로 기술할 수 있는 '사실'의 개념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p223)... 모호하고 체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하다가 난점이발생하면, 물리학자는 그냥 수학 공식으로 퇴각해서 공식과 실험적 사실 사이의 명확한 상관관계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p224) <물리와 철학> 中


 온갖 난해한 정의와 판별을 피하려면 언어를 사실, 즉 실험 결과를 기술하는 일에만 한정하면 된다. 그러나 원자의 입자 자체에 대해 언급하고 싶으면 오직 수학의 언어를 사용하여 자연언어를 보완하거나, 또는 변용된 논리나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은 논리를 사용하는 언어와 조합해야 한다.(p232) <물리와 철학> 中


 생각해보면, 철학 내에서도 우리는 이미 언어의 모호성을 경험한다. 스피노자의 '나투라 나투란스(Natura naturans 能産的 自然)과 노자 <도덕경 道德經> 안의 '자연(自然)'이 결코 같은 의미가 아님에도 같이 '자연'으로 번역되기에 우리는 이를 이해할 때 다소 혼란을 겪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언어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가 다른 분야 학문을 설명할 때 생기는 모호함은 더 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정리하면  <물리와 철학>에서 저자 하이젠베르크는 '관찰'이라는 행위를 통해 상대성 이론의 세계와 양자론의 세계를 설명하고, '실험'과 '경험'을 통해 '수학 언어'와 '일상 언어'의 세계인 물리학과 철학의 세계의 차이를 밝힌다. 이 과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에 독자들에게 현대 물리학과 철학의 차이, 양자론과 상대성 이론의 차이가 간결하고도 알기 쉽게 설명된다. 또한, 리뷰에서 언급하지 못한 다양한 철학자들의 우주론(宇宙論 Cosmology)가 <물리와 철학>소개되기에 독자들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다만, 간략하지만 많은 철학사상과 물리학 이론이 핵심적으로 소개되기에 용어가 낯선 독자들은 어려움을 느낄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때문에, 이 책을 너무 깊이 있게 읽기보다 용어 정도 익숙해진다음, 다른 과학 교양서를 읽는다면 의미있는 독서가 되리라 생각하며 이번 리뷰를 마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galmA 2019-04-27 2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데이비드 호크니전 보시면 좋아하실 듯.
물리학 책을 많이 봤던 호크니도 객관적 관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회화에 접근했거든요. 호크니 회화를 내가 왜 좋아했는지 이번 전시 보고 확실히 알게 됐어요^^. 다시점과 역원근법을 이용한 그의 접근이 바로 제가 원하던 것이었거든요^^

겨울호랑이 2019-04-28 00:00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좋은 전시회 추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간을 내서 전시회에 다녀와야겠네요^^:) 더불어 AgalmA님의 작품관도 알 수 있는 기회도 되겠군요!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 개정판
프리초프 카프라 지음, 김용정 외 옮김 / 범양사 / 200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동양적 신비주의는 실재의 본질 속으로 꿰뚫고 들어가는 직접적인 직관에 기초하고 있고, 물리학은 과학적 실험을 통한 자연 현상의 관찰에 기반을 두고 있다. 관찰은 해석되고 이 해석은 자주 언어에 의해 소통된다. 언어는 추상적이기 때문에 과학적 실험이나 직관을 언어로 해석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애매하고 불완전하기 마련이다.(p6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른 방식으로 보기
존 버거 지음, 최민 옮김 / 열화당 / 201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단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만 본다. 이렇게 보는 것은 일종의 선택 행위다... 우리는 결코 한 가지 물건만 보지 않는다. 언제나 물건들과 우리들 사이의 관계를 살펴본다... 타인의 시선이 우리의 시선과 결합함으로써 우리 자신 역시 가시적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납득할 수 있게 된다.(p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현상의 순전히 주관적인 성격을 이해하며, 또 세상에서 이름이 동일한 자와 구별되는 추가적인 인간을 만들어 내는 창조 유형과, 이 추가적인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 대부분이 바로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임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마도 극소수인 듯하다.(p8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中


  프루스트(Valentin Louis Georges Eugene Marcel Proust, 1871 ~ 1922)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A L'ombre des Jeunes Filles en Fleurs>에서는 화자와 스완과 스완 부인 오데트의 딸인 질베르트의 사랑이야기가 이어진다. 대부분의 첫사랑 이야기가 그렇듯 작품에서의 사랑 역시 이별로 끝나게 된다. 화자의 구애(求愛)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질베르트. 그 과정에서 식어가는 사랑을 작품 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롤랑 바르트(Roland Gerard Barthes, 1915 ~ 1980)의 <사랑의 단상 :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 >속의 짧은 글을 따라 첫사랑에 담긴 사랑의 요소를 살펴보려 한다.


1. 마술 Magie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문화권에 속해 있던 점치는 일이나 조그만 비밀 의식, 기도 행위는 그의 삶의 일부를 이룬다.(p238) <사랑의 단상> 中


 우리의 여러 대조적인 삶과 상황에서 사랑과 관계되는 사건에 대한 최선의 태도는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건들은 피할 수 없는 뜻밖의 사건이라는 점에서 합리적인 법칙이 아니라 오히려 마법의 법칙에 지배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p13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中


2. 욕망 : 당신의 욕망이 어디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그것을 조금 금지하기만 하면 된다(금지 없이는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사실이라면)....내가 금지로서는 현존하지만(금지 없이는 좋은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또 그 욕망이 형성되면 내가 그를 방해할지도 모르므로 멀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p200) <사랑의 단상> 中


 아마도 이런 완벽한 일치감 속에,  현실이 우리가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것에 덧붙고 겹쳐질 때, 마치 동등한 두 형상이 포개져 하나를 이루듯이, 그 현실은 우리가 꿈꾸던 것을 완전히 가리고 그 꿈과 혼동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우리 욕망의 모든 지점에 우리 손이 가 닿는 바로 그 순간, 우리가 느끼는 기쁨에 모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오히려 우리는 손댈 수 없는 것의 매력을 간직하고자 한다. 그리고 우리 상념은 과거 상태를 새로운 상태와 대조하기 위해 재구성조차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상념이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을 잃어버렸으니까.(p198)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中


3.  기다림 Attente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동안 대수롭지 않은 늦어짐으로 인해 야기되는 고뇌의 소용돌이(p64) <사랑의 단상> 中


 사랑하는 여인을 절대 다시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이 진심이 아니라면, 그녀를 다시 보고 싶다는 말 또한 진심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견딜 수 있다면,  그건 아마도 사랑하는 이의 부재가 짧을 거라고 기대하면서 어느 날엔가는 다시 만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p339)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中


 4. 고뇌 Angoisse 이런저런 우발적인 일로 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위험, 상처, 버려짐, 돌변 등에 대한 두려움으로 격해지는 것. 고뇌라는 이름으로 그가 표현하는 감정.(p53) <사랑의 단상> 中


 내게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은 이미 지나갔을 것이다. 그녀를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은 이미 지나갔을 것이다. 그녀를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며, 그러므로 그녀와 나를 다시 만나 그토록 줄어든 고통을 위로해 준들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며, 이 순간에는 아직 존재하지만 그때는 이미 없어졌을 그 고통, 따라서 그 고통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일련의 타협이나 화해, 재회의 동기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그녀에게 알리고 싶었다.(p28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中


5. 파국 Catastrophe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의 상황을 결코 빠져 나올 수 없는 결정적인 막다른 골목이나 함정으로 느껴 자신이 완전한 파멸 상태에 이르렀다고 여기는 격렬한 위기(p79) <사랑의 단상> 中


 친구인 질베르트가 내게 그토록 많은 고통을 안겨 준 그날부터 새해가 오면 보내기로 결심했던 그 편지에서 나는 우리의 오랜 우정은 끝나는 해와 더불어 사라졌으며, 이제 원한과 실망도 다 잊었고, 1월 1일부터 우리가 쌓으려는 것은 새로운 우정, 그 무엇으로도 깨지지 않을 견고하고도 경이로운 우정으로서, 질베르트가 이런 우정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기 위해 노력해 주기를 바라며, 우리 우정을 손상하는 어떤 작은 위험이라도 생길 경우에는 나 자신이 그렇게 할 것을 맹세하지만, 그녀 쪽에서도 그 즉시 제때 내게 알려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p11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中


 6. 페이딩 Fading 사랑하는 이의 수수께끼 같은 무관심이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것도, 또는 세상 사람이나 그의 적수, 다른 누구를 위해 말해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이가 온갖 접촉에서 물러난 것처럼 보이는 고통스런 시련.(p162) <사랑의 단상> 中


 현재 내가 하는 것뿐 아니라 그에 따른 미래의 결과까지 명철히 성찰해 본 끝에 내가 계속해서 열중했던 것은 내 마음속에서 질베르트를 사랑하던 자아를 오래도록 잔인하게 죽이는 일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내가 더 이상 질베르트를 사랑하지 않게 될 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도 그 점을 후회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때는 그녀가 나를 만나려고 시도해도 그녀가 오늘 하는 시도와 마찬가지로 헛된 일이 될 거 라는 걸 난 잘 알고 있었다.(p32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中


 7. 부재 Absence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무대화하는 언어의 에피소드는, 그 부재의 이유나 기간은 어떠하든 부재를 모두 버려짐의 시련으로 변형시키려는 경향이 있다.(p30) <사랑의 단상> 中


 우리는 이런 불안정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이미 사랑은 우리 마음을 떠나고 없다. 사실 사랑에는 지속적인 고통이 따르는 법이라 기쁨이 이 고통을 완화하고 잠재적인 것으로 만들며 유예하기도 하지만, 매 순간 언제라도 우리가 바랐던 것을 얻지 못하면 이 기쁨은 이미 오래전에 그렇게 되어야만 했던 끔찍한 고통으로 바뀐다.(p27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中


8. 이 망각으로부터 나는 아주 빨리 깨어난다. 서둘러서 어떤 기억을, 혼란을 재구성해 본다. 하나의 단어가 육체로부터 나와 부재의 감동을 말해 준다. 즉 갈망하다(soupirer)란 단어가, 그런데 그것은 '육체의 현존을 갈망하는' 것을 뜻한다... 사랑의 부재에서의 나는 서글프게도 누렇게 메마르고 오그라든, 떨어진 이미지이다.(p33)<사랑의 단상> 中


 우리의 기억이란 상대적으로 우리가 듣는 동안 마주치는 인상들의 복잡성에 비하면 아주 미미해서, 잠을 자며 수많은 걸 생각하고는 즉시 잊어버리는 인간의 기억만큼이나, 또는 이제 막 들은 것을 조금 후에는 기억하지 못하는, 반쯤은 어린애로 돌아간 사람의 기억만큼이나 짧기 때문이다.(p184)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中


9. 소유의 의지 Vouloir-Saisir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관계의 어려움이, 사랑하는 이를 이런저런 방법으로 전유(專有)하려는 자신의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고, 이후부터는 그에 대한 모든 '소유의 의지'를 포기하기로 결심한다.(p331) <사랑의 단상> 中


 인간은 불행해지면 도덕적인 존재가 된다.(p353)... 우리 마음이 지속적으로 다른 존재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한, 끊임없이 파괴될 위험에 처한 것은 단지 우리 행복만이 아니며, 그 행복이 사라지고 우리가 괴로워하고 그 괴로움을 잠재웠을 때, 그때 행복과 마찬가지로 우리 평온함 역시 기만적이며 덧없기 때문이다. 나는 마침내 이런 평온함을 되찾았다.(p354)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中


 10. 기호 Signes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려거나, 혹은 그 사람이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지를 확인해 보고 싶을 때면, 어떤 확실한 기호 체계도 수중에 갖지 못한다.(p305) <사랑의 단상> 中


 사랑하지 않을 때라야 우리는 그 사람의 움직임을 고정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움직인다. 따라서 우리에겐 언제나 실패한 사진만이 있다. 나는 질베르트가 내 눈앞에 자신의 모습들을 펼쳐 보였던 그 성스러운 순간들을 제외하고는 그녀 모습이 정말로 어땠는지 생각나지 않았다.(p117)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의 이야기에 대칭되는 <사랑의 단상> 용어들을 묶어 보았으나 사실 정확하게 맞물리지는 않는다. 그것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의 사랑이야기가 진행형이 아닌 완료형이기 때문이며, 이미 이별로 끝난 질베르트와의 사랑 이야기안에 화자의 여러 감정이 녹아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화자는 이처럼 힘들게 사랑을 지키려 했으나 결국은 잊기로 결심하고, 첫사랑 질베르트를 잊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한다. 양쪽 저울에 욕망을 달아 객관적으로 판단하려고 애쓰는 모습과 다른 사랑으로 첫사랑을 덮으려 하는 모습안에서 우리는 지난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성격이나 기질은 변하지 않지만, 우리는 나이에 따라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대처하지 않는다. 그때 우리 삶은 나뉘며, 또 저울에 배분되듯 양쪽 접시에 고스란히 놓인다. 한쪽 접시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욕망, 사랑하지만 아직은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 그러나 자신이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고 자만심을 품으면 우리를 지겨워할지도 모르므로 약간은 혼자 내버려 두는 편이 보다 현명한 처신이라고 생각되어 지나치게 겸손하게 보이지 않으려는 욕망이 놓여있다.(p279)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中


 우리는 질베르트와 전혀 관계없는 이런 상념들을 부양하고 키워야 한다. 그러는 동안 우리 감정이 약해지고 그저 하나의 추억이 되고 나면, 새로운 요소가 우리 마음에 들어와 그 감정과 싸워서 점점 더 영혼의 자리를 빼앗고 드디어는 영혼의 모든 자리를 차지한다. 난 이것이 사랑을 죽이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달았다.(p356)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에서. 첫사랑의 아픔에 힘들어하는 화자의 모습은 우리에게 지나간 첫사랑의 설레임과 아픔을 동시에 전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은 화자가 온전히 자신의 이야기만 하고 있기에 더 생생하게 전달된다. 오래 전 그날 너무도 설레었고 많이 아팠던 첫사랑의 추억을 떠올리며 책을 덮었다.


PS.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면서 작품 속에서 감각(感覺)의 기능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냄새와 맛이 불러오는 기쁨과 희망의 감정은 '잃어버린 시간' 이 아닌 화자의 '현재라는 시간'에서 피어나는 시간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내가 프랑수아즈를 기다리던 입구의 눅눅하고 오래된 벽에서 서늘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그 냄새는 질베르트를 통해 전해 들은 스완의 말들이 이제 막 내 마음속에 생기게 한 걱정들을 이내 가볍게 해 주면서 내 마음을 기쁨으로 채웠는데, 붙잡거나 소유할 수 없어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그런 기쁨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내가 기댈 수 있는 단단한 기쁨, 감미롭고도 평온한 기쁨, 지속적이며 설명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진리로 가득한 기쁨으로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p12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中


 존재의 죽음과 사물의 파괴 후에도, 연약하지만 보다 생생하고, 비물질적이지만 보다 집요하고 보다 충실한 냄새와 맛은, 오랫동안 영혼처럼 살아남아 다른 모든 것의 폐허 위에서 회상하고 기다리고 희망하며, 거의 만질 수 없는 미세한 물방울 위에서 추억의 거대한 건축물을 꿋꿋이 떠받치고 있다. 그것이 레오니 아주머니가 주던 보리수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의 맛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아주머니의 방이 있던, 길 쪽으로 난 오래된 회색 집이 무대장치처럼 다가와서는 우리 부모님을 위해 뒤편에 지은 정원 쪽 작은 별채로 이어졌다.(p90)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질베르트와의 사랑 그리고 이별. 바그너의 「로엔그린」이 흐르고, 고통은 잃어버린 시간 너머에 남겨졌으며, 사랑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주위를 맴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