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조해두고 싶은 또 다른 논점은 전 세계 금융자산의 상당 부분이 이미 여러 곳의 조세피난처(tax haven)에 은닉되어 있으며, 이런 사실이 전 세계 자산의 지리적 분포를 분석하는 우리의 능력을 제한한다는 점이다. 오직 공식적인 통계자료만을 근거로 파악하건데, 부유한 국가들의 순자산 포지션 수준은 세계의 나머지 나라들과 비교해 마이너스인 것으로 보인다.(p555)... 가브리엘 주크먼이 계산한 추정치에 따르면 은닉 자산의 총액은 전 세계 GDP의 약 10퍼센트에 달한다.... 현재의 모든 증거 자료에 따르면 조세피난처에 은닉된 대부분의 금융자산(최소한 4분의 3)은 부유한 국가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_ 토마 피게티, <21세기 자본>, p558


  토마 피게티(Thomas Piketty, 1971 ~ )는 <21세기 자본 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에서 전세계적인 부의 불균형을 완화시키기 위한 방편 중 하나로 '글로벌 자본세 Global tax on wealth'를 제안한다. 이는 매우 높은 수준의 국제적 금융 투명성을 기반으로 누진적인 세계적인 자본세를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제안이 나온 배경에는 조세 피난처로 빠져나간 은닉 자금이 있다. 피게티는 2014년 <21세기 자본>에서는 전세계 GDP의 10%에 달하는 조세회피처의 은닉 자금 등과 같은 불평등을 낳는 자산 불평등의 문제를 지적하고, 2019년 <자본과 이데올로기 Capital et ideologie>에서는 이러한 자산 불평등의 역사적 기원을 찾아간다. 

 

 이론상 일국의 국제수지는 금융 흐름을, 특히 자본소득(배당금, 이자, 각종 이윤)의 유출과 유입을 측정할 수 있게 한다. 원칙적으로 유입과 유출의 총량은 매년 세계적 차원에서 균형을 이뤄야 할 것이다. 이러한 통계 작업의 복잡함은 물론 소소한 편차들을 초래할 수 있지만, 이는 쌍방향으로 진행되어 시간이 흐르면서 균형을 이루게 된다. 그런데 1980 ~ 1990년부터는 자본소득의 유출이 유입을 초과하는 체계적 경향이 존재한다. 이러한 비정상을 통해 추산할 수 있게 되는 다른 나라들에 신고하지 않고 조세피난처에 보유한 금융자산이 2010년대 초에는 세계 금융자산 전체의 거의 10%에 달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모든 것이 그때부터 계속 증가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_ 토마 피게티, <자본과 이데올로기> , p566/1134


 조세 회피처에 숨겨진 자산은 전세계 평균 GDO의 10%로 추산되지만, 지역별로 이 비율은 큰 차이를 보인다. 미국 금융자산의 약 4%, 유럽의 10%, 러시아의 약 50%가 케이맨 군도(Cayman Islands) 등조세피난처에 은닉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조세 피난처 문제가 선진국 뿐 아니라 아프리카의 개발도상국에게는 특히 심각한 문제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우리 역시 예외는 아니다.


 최근 뉴스타파에서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의 주관으로 탐사보도 <판도라 페이퍼스 : 조세도피처로 간 한국인들 2021>를 내놓았다. 삼성그룹 회장 이재용, SM 엔터테이먼트 이수만, 전두환 씨 동생 전경환, 전 태광실업 회장 박연차 등이 페이퍼 컴퍼니를 세우고 자금을 운영한 정황이 발견되었다는 것이 주요 내용으로 전체 규모를 알기 어렵지만, 우리나라의 적지 않은 돈 역시 해외로 빼돌려지고 있음을 보도를 통해 실감하게 된다. 거칠게 계산했을 때, 2020년 우리나라 GDP가 1조6천240억 달러임을 생각해본다면, 평균 은닉률 10%로 계산했을 때 1,624억 달러의 돈이 국가 계정에서 빠져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추정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보도를 언론에서 찾기 힘들다. 대신 이에 비하면 푼돈(?)에 불과한 '대장동 투기 의혹'만 과대포장되어 모든 언론에 보도되는 현실 속에서 '불평등이 이데올로기적'이라는 피게티의 말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불평등은 경제적인 것도 기술공학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것이다. 이것이 분명 이 책에 제시된 역사 연구의 뚜렷한 결론이다. 달리 말해 시장과 경쟁, 이윤과 임금, 자본과 부채, 숙련노동자와 비숙련노동자, 내국인과 외국인, 조세피난처와 경쟁력, 이런 것은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못한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이 배치하고자 선택한 법, 조세, 제정, 교육, 정치 관련 체계와 사람들이 스스로 속하고자 하는 범주들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회역사적 구성물이다. _ 토마 피게티, <자본과 이데올로기> , p18/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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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위의 무제(武帝)가 한수(韓遂)·마초(馬超)와 더불어 동관(潼關, 섬서성 동관현)을 점거하고 막았는데, 한수·마초의 재능은 위 무제의 적수가 아니었지만 그러나 승부는 오랫동안 결정되지 않았으니, 험한 요새를 누르고 있었던 까닭입니다."

"제왕은 번갈아 가며 일어나서 성하고 쇠하는 것이 변하지 아니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사방이 와해하여서 장군이 소매를 떨치며 일어나 향하는 곳의 앞에는 걸릴 것이 없으니, 이는 바로 하늘의 뜻이지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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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반도의 분단은 남북 국가간이나 국민, 이데올로기 사이의 대립이 아니라, 남북분단에 의해서 기득권을 얻은 세력과 분단으로 손해를 입고 있는 주민 간의 대립으로 보자고 주장하고 있다. 분단체제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국가나 주권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권으로서 본다는 점에서 아라사끼 씨의 생각과 통한다. 남북통일은 급격하게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P33

87년 체제가 혼란에 빠진 중요한 이유로는, 하나는 경제 면에서 박정희 시대 이래 재벌 위주의 경제체제가 거의 통제불능 상태로 들어간 것이고, 또 하나는 한국 수구세력의 법적, 제도적 토대를 이루는 정전체에요. 정전체제라는 것은 국제적으로 공인된 국경이 없는 상황이죠. 그렇기 때문에 항상 안보불안이 실제로 존재하고, 그러다보니 이걸 악용해서 부당한 기득권을 지키고 키우려는 세력이 번창할 객관적인 토대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일은 단순히 남북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정치개혁이나 경제개혁, 시민사회의 건전한 발전에도 관건적인 요소입니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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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사마광이 말씀드립니다. "잠승지는 군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세월을 쌓으며 공격하여 전투하였던 고달픔을 잊고 하루아침에 새로 온 장군에게 항복한 병사들을 주었으니 자신의 모자람을 알고 다른 사람의 장점을 숨기지 않았고, 공을 세웠으나 거두어들이지 않고 나라의 일을 이루었고, 충성을 하면서도 사사로움이 없었으니, 군자라고 이를 만합니다!"(p42/84) - P42

노사령(路思令)이 상소문을 올렸다. "군대가 나가 공을 세우는 것은 장수에게 있는 것이니 그에 알맞은 사람을 얻으면 육합도 손바닥에 침 한 번 바르면 맑게 할 수 있지만, 그에 알맞은 사람을 얻지 못하면 곧 3하(河)의 지방도 바야흐로 전쟁터가 됩니다.(p32/84) - P32

"무릇 덕(德)은 의로운 사내들을 감동시킬 수 있고 은혜는 병사들에게 죽음을 권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만일 그윽한 자를 내쫓고 밝은 자를 승진시키고, 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 상을 주고 나쁜 일을 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며, 사졸을 가려 뽑아서 훈련을 하게하고 무기를 고치고 수선하면서 먼저 말을 잘하는 선비를 파견하여 재앙과 복록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데, 만일 저들이 고치지 못하면 순리에 맞는 것으로 거역한 사람들을 토벌하게 되니, 이와 같이 하면 소부(蕭斧)를 갈아서 조균(朝菌)을 자르고 커다란 용광로(鎔鑛爐)로 머리카락을 태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p32/84)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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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3년에 조선의 세종대왕은 한국어를 표기하는 문자 체계인 한글을 창제했다고 선포하고,  새로운 문자로 책을 펴내는 정책에 착수했다. 이런 조치는 세종대왕이 조선을 안정화하고 번영을 부추기기 위해 추진한 수많은 전략 중 하나로, 실제 조선 또는 이씨 왕조가 그 후 450년간 존속하는 계기가 되었다.
- P130

오로지 자모 28자(훗날 24자로 줄어듦)로구성된 한글은 한문보다 훨씬 배우기 쉬웠으나, 한글의 도입은 전통주의자인 귀족들의 격렬한 반발에 부딪혔다. 그들은 한글을 도입하면 다른 신분의 사람들에게도 과거시험에 응시할 기회를 제공하여 자신들의권력이 약해질 것을 우려했다. 그 결과 한글은 널리 사용되 못하고 낮은 신분에서나 쓰는 ‘언문‘으로 비하당하다가 19세기에 재발견되어 그 후로 한국민족주의의 매개체로 발전했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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