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웅이 말하였다. "옛날부터 성현들은 문무(文武)를 겸비하지 않고서 그의 공업(功業)을 이룰 수 있었던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저 이웅은 비록 재빠르지는 못하지만 자못 앞에 간 사람들의 뜻을 관찰하였으니, 다만 장구(章句)만을 지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미 문장도 익히고 또한 무예의 재주도 있는데, 형님은 어찌 병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소위가 일찍이 황제에게 말하였다. "신의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가 매번 신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오직 《효경(孝經)》 한 권만 읽으면 몸을 세우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충분하니 어찌 많은 것을 쓰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황제가 깊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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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해 타이완사 - 선사 시대부터 차이잉원 시대까지
궈팅위 외 지음, 신효정 옮김, 천쓰위 감수 / 글항아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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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타이완과 가까웠던 동아시아 해역의 상황을 살펴보면 수많은 세력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명나라가 해상 활동을 억압하는 해금 정책을 유지하는 동안 한족의 해상 세력은 거침없이 동아시아를 누볐습니다. 바닷길이 열리고 무역이 발달하면서 유럽의 상인 세력인 스페인과 네덜란드 등이 동쪽으로 진출했으며 일본 역시 상업적 이익을 위한 교역 활동에 적극 나섰습니다. 1만 년 전 바다 위로 떠올라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외로운 섬 타이완은 17세기에 동아시아 해상에서 펼쳐진 이 각축전을 통해 드디어 국제무대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_ 궈팅위 외, <도해 타이완사> , p52/434

<도해 타이완사>는 제목 그대로 남중국해의 섬 대만(臺灣)의 역사를 다룬 책으로 선사시대부터 최근의 대만 역사 흐름을 알려주는 책이다. 우리에게 가깝고도 먼 나라 대만. 한때는 가장 가까운 나라였으나, 이제는 서먹한 관계가 되어버린 나라. 1990년대 초까지 '신흥경제공업국(Newly Industrializing Countries, NICs)' 중 하나였으나, 중국의 부상으로 외교적으로 고립된 나라. 최근 혐한과 TSMC를 중심으로 한 반도체 강국. 대강 이 정도가 일반에게 알려진 대만이 아닐까.

<도해 타이완사>는 대만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대만 역사의 큰 줄기를 잡아주는 책이다. 그리고, 우리와 다른 (지정학적) 여건을 가진 대만이 (현대사의) 공통된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왔는가를 알려준다는 점이 이 책이 갖는 의의라 여겨진다. 우리들은 흔히들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는 생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역사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포르모사(Formosa)'라는 대만을 부르는 다른 별칭이 말해주듯, 대만은 네덜란드, 스페인, 일본, 중국의 세력이 교차하면서 오랜 기간 이들 세력의 지배하에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중국의 대만'이 아닌 '동남아의 대만'의 역사가 오랜 기간 흘러왔고, 17세기 정성공(鄭成功, 1624 ~ 1662) 세력을 진압하며 중국 역사에 편입되면서 비로소 '중국의 대만'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후 200여년 후에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곧 이어 국민당 정부 치하에 있었던 역사의 흐름을 떠올려 본다면, 대만인들 눈에는 중국인들 역시 타인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움직임이 결코 일시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1684년 5월 강희제는 타이완에 1개의 부와 3개의 현을 세우는 것을 허가함으로써 중국 영토에 공식 편입했습니다.(p112)... 지리상 거리가 먼데다 해류와 풍향에 크게 좌우되는 해협을 건너야 하는 이유로 타이완은 청나라의 '변방'에 속했습니다. 그런 타이완에 다시 대반란이 발생한다면 반청 反淸의 기지가 될 가능성이 큰 반면 빠르게 진압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청나라 조정은 타이완이 해적과 반란 세력들의 소굴이 되지 못하도록 예방책을 마련하는 등 지역을 안정시키는데 역점을 두었습니다. _ 궈팅위 외, <도해 타이완사> , p113/434

오랜 기간 남의 지배를 받은 대만인들은 일본의 지배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대만인들에게 '나라를 빼앗겼다'는 느낌보다는 '지배층이 바뀌었다'는 느낌이 더 강했을 일제의 지배. 우리와 같은 식민지 경험을 갖는 대만인들의 역사 인식이 궁금해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도해 타이완사>는 경제성장과 관련하여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외적 기반으로는 기차, 도로 등 근대화된 교통 운수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타이완 전 지역을 단일 시장권으로 만들어 효율적인 물자 소통을 이루었습니다. 나아가 선박과 비행기 노선을 통해 타이완과 일본을 동일 경제권으로 묶어내자 생산량과 무역량이 대폭 증가했고, 이에 따라 경제 성장률도 상승했습니다. 경제학자들의 통계에 따르면 1903~1940년대까지 타이완의 1인당 GDP는 1.97퍼센트의 성장률을 기록했는데, 이는 당시 세계의 평균치를 훨씬 웃도는 수치라고 합니다.(p268)... 일본이라는 식민 통치자가 거대 자본을 투자하여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기반(교통, 금융, 법률, 토지 소유권 정리 등)을 구축했기 때문에 타이완의 경제가 발전하고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_ 궈팅위 외, <도해 타이완사> , p268/434

이처럼 <도해 타이완사>는 분명하게 일제 식민지 시대 이전과 비교해 경제 외적인 성장이 있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이를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평가와 연결짓지 않는다.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비롯한 사회 여러 면에 존재했던 장벽은 일본이 구축한 기반시설이 일본을 위해 작동하게끔 만들었기에, 식민지 시대를 결국 수탈의 시대로 규정하는 것이 이 책의 사관(史觀)이다. 그리고, 대만의 사학계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반론은 우리에게도 여러 시사점을 주리라 여겨진다.

일본의 식민 통치를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이러한 일본의 행정을 치적으로 평가하면서 그들의 식민 통치가 타이완의 근대화를 이끌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일본의 이러한 노력은 타이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식민 통치가 잘 추진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식민지의 자원을 이용해 자국의 이익을 챙기기 위한 계획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타이완의 이익을 희생시켰으며 협조를 강요했습니다. 타이완에 제공된 근대화란 일본의 식민 통치에 호응해 얻어낸 결과일 뿐 인권과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반쪽짜리 근대화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_ 궈팅위 외, <도해 타이완사> , p204/434

'일제의 식민지'였다는 사실 이외에도 대만의 역사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정부 관료에 의한 담배상 폭행 사건이 도화선이 되서 학살로 이어진 2.28사건에서 우리는 1947년 3.1절 기마경찰에 의한 어린이 상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4.3사건으로 이어진 우리 현대사의 아픈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며, 미국의 경제적 원조와 미국-일본-대만의 삼각 구도 속에서 이어온 대만의 경제 성장 모습 속에서, 비중은 작아졌지만 우리 역시 미-일의 이해관계에 놓여있음도 상기할 수 있다. 이같은 점에서 대만의 역사는 결코 멀리 떨어진 다른 나라 역사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2.28사건은 시민의 원망이 쌓이고 쌓여서 터진 사건이었습니다. 즉 정치적 불평등, 문화 차별, 경제적 착취, 심지어 공공위생의 퇴보 등 다양한 불만이 누적된 결과입니다. 사건의 도화선이 된 담배 밀매도 그러한 불만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전매 제도는 원래 일본의 타이완인에 대한 착취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 제도를 없애지 않고 유지한 국민정부 역시 식민 정부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국민 정부는 문제가 되는 제도를 개선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국민과 정부, 본성과 외성간에 보이지 않는 상처를 낳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타이완 국적의 엘리트들을 학살하여 일반 대중으로 하여금 정치에 대해 냉소와 불신을 품게 했습니다. _ 궈팅위 외, <도해 타이완사> , p361/434

미국이 타이완을 원조한 배경에는 타이완을 반공 反共 동맹으로 만들기 위한 정치적 계산이 있었습니다. 사실 미국은 타이완이 문화, 교육, 일상생활에서 미국식 삶의 가치를 받아들여 모든 영역에서 미국을 추종하고 미국이 제공하는 자원에 의존하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_ 궈팅위 외, <도해 타이완사> , p384/434

요컨대 타이완 경제 발전의 핵심 요인은 미국, 일본, 타이완의 트라이앵글 무역 순환 네트워크를 통해 외자를 유치하고 세계 시장을 개방한 것입니다. 사실 타이완 내의 수많은 중소 수출기업은 정부로부터 충분한 지원과 보호를 얻기 힘들었기 때문에 공기업이나 대기업보다 유연한 경쟁력과 조직 능력을 향상시킴으로써 수출 위주의 대외 무역에서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_ 궈팅위 외, <도해 타이완사> , p390/434

1992년 8월 24일. 이날을 기해 우리나라와 중화민국(대만)은 외교관계를 끊으면서 해방 이후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양국의 관계는 멀어졌다. 그리고, 이때의 앙금은 지금까지 남아있지만, 현대사의 많은 부분을 공유한 대만의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알려줄 수 있음을 본문을 통해 깨닫게 된다. <도해 타이완사>는 개략적인 대만 역사 안내서이기에 이 부분에 대한 한계점을 갖지만, 보다 깊이 있는 대만 역사서가 일반에게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마지막으로 글을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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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견이 밤중에 태사(太史) 중대부 유계재(庾季才)를 불러서 물었다. "나는 용렬하지만 텅 빈 마음으로 이 고명을 받았소. 하늘의 때와 사람이 할 일에 대하여 경은 어떠하다고 생각하오?"
유계재가 말하였다. "하늘의 도는 자세하고도 미묘하여 뜻을 살피기가 어렵습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사람이 할 일을 가지고서 그것을 점친다면 부명(符命)의 징조는 이미 정해졌습니다.

옛날에 원소(袁紹)·유표(劉表)·왕릉(王?)·제갈탄(諸葛誕)은 모두 한 시대의 영웅호걸이어서 중요한 지역을 점거하고 강한 군사를 거느렸지만, 그러나 공업(功業)을 성취하지 못하자 재앙이 뒤쫓아 이르지 않았던 것은 정말로 위(魏)와 진(晉, 사마씨)이 천자를 끼고 경도(京都)를 보존하고 크게 순리에 의지하는 것을 가지고서 명분으로 삼은 것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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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서의 목적이 참된 학문과 옳은 실천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논리학자들이 보여준것같이 가르침에는 개념과 판단이라는 두 종류가 있다. 사람들이 판단에 도달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방법에는 논증적, 변증술적, 수사학적 방법, 이 세 가지가 있다. 그리고 개념을 형성하는 방법에는 대상자체를 상상하거나 또는 그것의 상징을 상상하는 두 가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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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 논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9
아베로에스 지음, 이재경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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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은 동의에 이르는 방법이 서로 다른 수준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한 부류의 사람들은 논증을 통해 동의에 이르게 된다. 논증적인 사람이 논증을 통해 동의에 이르게 되는 정도만큼 확고하게, 어떤 이는 수사학적 논변을 통해 동의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우리 신의 종교는 이 세 가지 방법을 통해 사람들을 부른다. _ 아베로에스, <결정적 논고>, p27/226

성스럽고 고귀한 신, 예언적 사명, 그리고 내세의 행복과 불행에 대한 긍정이 그 예증이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 원리는 세 가지 부류의 징표에 의해 획득할 수 있는데, 그것을 통해 모든 이들이 예외 없이 인식하도록 명해진 동의에 이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수사학적, 변증술적, 논증적 징표다. _ 아베로에스, <결정적 논고>, p49/226

아베로에스(이븐 루시드 Ibn Rushd, 1126 ~ 1198)의 <결정적 논고 Fasl al-maqa'l>는 알 가잘리( Al Ghazali, 1058 ~ 1111)의 철학에 대한 공격에 대한 반론이다. 인간 이성(理性)으로 신의 뜻을 알 수 없기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 322)로 대표되는 (그리스)철학으로 결코 진리에 이를 수 없다는 가잘리의 논리에 대해 아리스텔레스의 사상적 후계자인 아베로에스는 역반론을 펼친다. 아베로에스는 신의 부름을 세 징표로 해석하는데,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변증론> , <범주, 명제론 - 오르가논 - >에 각각 대응하는 점이 흥미롭다.

사람들은 성서와 연관되어 세 부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결코 해석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다. 이들은 수사학적 부류다. 그들은 압도적인 대중이다. 왜냐하면 건전한 지성을 가진 누구도 이런 종류의 동의에서 면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부류는 변증술적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단지 본성에만 의해서든 아니면 본성과 습관에 의해서든 둘 중 어느 한쪽에 의해서 변증술적인 해석을 하는 이들이다. 또 하나의 부류는 어떤 해석에 정통한 이들이다. 이들은 본성적으로 그리고 훈련, 즉 철학에서의 훈련을 통해 논증적 해석을 하는 부류다. 이 해석은 대중은 물론 변증술적 부류에게도 표현되어서는 안 된다. _ 아베로에스, <결정적 논고>, p64/226

서로 다른 수준에 있는 이들에게 다른 방식의 진리(신)에 이르는 길이 제시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에 따라 수사학, 변증학, 논증학은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이들에게만 개방되어야 하나, 이들이 지향하는 바는 하나이어야 하고, 핵심(核心)은 바로 논증적 해석을 할 수 있는 '철학'이 유일함을 아베로에스는 밝힌다.

신앙과 이성의 조화. 아베로에스의 <결정적 논고>는 '철학'이 결코 이슬람의 가르침에 벗어난 이교도의 학문이 아니라, 율법의 명령으로 신의 뜻을 찾는 정도에 있다는 점을 밝히면서 신앙과 이성을 화해시킨다. 아베로에스는 오직 철학을 통해 <꾸란>의 우의적 해석이 가능하며, 이를 통해 경전과 생활을 일치시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 아베로에스의 조화는 '철학을 중심으로 한 신학의 조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 ~ 1274)는 철학을 '신학의 시녀'로 위치시켰다는 점에서 양대 종교의 '신앙과 이성'을 바라보는 관점을 비교하게 된다...

아베로에스, 아퀴나스, 시제 모두 진리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의견은 일치한다. 철학과 신학은 상이한 방식을 사용할지라도 동일한 실재와 연결되어 있다. 철학과 신학이 그러한 실재를 기술하기 위해 동일한 언어를 사용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만일 동일한 언어를 사용한다면, 상이한 사상 체계는 불필요하다. 오직 하나의 진리만 있을지라도 그 진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접근될 수 있으며, 철학과 신학은 상이한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p171)... 아베로에스의 합리주의는 인간 이성만이 모든 존재에 대한 적절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는 확신 위에 정초해 있다. 반면 아퀴나스는 인간 이성의 능력을 넘어서는 진리가 있다고 전제한다.. _ 아베로에스, <결정적 논고>, p148/226 해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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