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된 공동체 - 민족주의의 기원과 보급에 대한 고찰
베네딕트 앤더슨 지음, 서지원 옮김 / 길(도서출판)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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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학적인 정신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민족을 정의할 것을 제안한다. 민족은 상상된 정치적 공동체로서, 본성적 제학적이며 주권을 지닌 것으로 상상된다. 민족은 상상되었다(imagined).(p25)... 민족은 제한적(limited)인 것으로 상상된다... 민족은 주권을 가진(sovereign) 것으로 상상된다.(p27)... 마지막으로, 민족은 공동체로 상상된다. _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된 공동체>, p28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 1936~2015)는 <상상된 공동체 Imagined Communities: 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Spread of Nationalism>에서 '상상되고 제한적인 공동체'로서 '민족'에 대해 말한다. 본문에서 저자는 민족이 상상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고대 공동체들을 연결한 끈 - 문어 文語 - 이 새로운 연결망 - 구어 口語- 으로 대체되고, 여기에 자본주의 capitalism과 인쇄 기술 technology와 결합되었을 때 비로소 '민족'이라는 관념을 거부감없이 받아들이게 만들었음을 서술한다.


 모든 위대한 고전적 공동체들은 신성한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 지상을 초월하는 권력의 질서에 연결되었기에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스스로를 인식했다. 따라서 문어로서의 라틴어와 팔리어, 아랍어, 한문의 영역은 이론적으로는 무한하다... 성스러운 언어로 엮인 그런 고전적 공동체들의 성격에는 근대민족이라는 상상된 공동체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중대한 차이점의 하나는 그들의 언어에 독특한 신성함이 있다는 오래된 공동체의 확신과 그리하여 생겨난 회원권에 대한 관념이다. _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된 공동체>, p36


 신성한 공동체와 언어, 혈통이 쇠퇴하면서 그 밑에서는 세계를 파악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으며, 다른 무엇보다도 이것으로 인해 민족에 대한 '사고'가 가능해졌다. _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된 공동체>, p48


 저자는 라틴어가 유럽 각국의 언어로 대체되고, 절대주의 세계관이 상대주의 세계관으로 바뀌는 일련의 상황이 자본주의와 기술의 발달을 통해 '베드로의 후계자' 아래 하나의 양떼였던 유럽인들을 여럿으로 나누는 동시에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국가'로 묶어내는 시점을 민족주의의 기원으로 본다. 또한, 이렇게 탄생한 민족주의가 제국주의 침략을 통해 언어와 함께 식민지로 이식되고, 신교육을 통해 뿌리내리는 과정을 민족주의의 확산으로 바라본다.  저자가 글 서두에서 밝힌 '민족국가'라는 이데올로기로 주권을 가진, 제한되고, 상상된 '민족'의 개념은 이렇게 태어났다. 마치 세포 분열하듯, 통일된 오랜 제국(帝國)의 질서와 결별하고 수많은 민족국가로 분열된 뒤, 세포 증식하듯 제국주의 침략을 통해 '민족'의 질서를 새롭게 이식하는 '민족주의'. 구성원들은 결코 동의한 적이 없지만, 산과 강이 자연스럽게 경계를 만들어내듯 언어를 통해 만들어진 관념의 공동체. 이것이 저자가 바라본 민족주의의 모습이다.


<상상된 공동체>는 현대의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민족'이라는 개념에 대해 의문을 던지게 한다. 일면식도 없지만,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느껴야 하는 동질감과 애국심, 같은 민족과 다른 민족을 가르는 구분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적대감 등등. 이렇게 고양된 감정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일까.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만들어진 Matrix로 인해 현대의 우리의 사고와 행동이 제약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상상된 공동체>를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핵심적으로 나는 아주 오래된 세 가지 근본적인 문화적 관념이 사람들의 정신에 자명한 이치로서 행사하던 지배력을 잃었을 때에야, 그리고 지배력을 잃은 곳에서만 민족을 상상한다는 가능성 자체가 역사적으로 떠올랐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는 특정한 경전의 언어가 존재론적 진리의 떼어놓을 수 없는 일부분이기 때문에 그 언어가 진리에 대한 특권적인 접근을 제공한다는 생각이다.(p66)... 두 번째는 사회란 당연히 높이 있는 중심, 즉 다른 인간들과 구분되는 인격이자 어떤 우주론적인(신성한) 섭리로써 통치하는 왕들을 둘러싸고, 그리고 그들의 아래에서 조직되어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세 번째는 우주론과 역사를 떼어놓고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세계와 인간의 기원을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는 시간성에 대한 관념이었다. 이 관념들이 결합됨으로써 인간의 삶은 필연성에 확고하게 뿌리내렸으며, 일상적인 존재의 숙명에 일정한 의미가 주어졌고, 숙명으로부터의 구원이 다양한 방식으로 제공되었다. _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된 공동체>, p67


시간에 걸친 동시성(simulataneity-along-time)이라는 중세적 개념을 대체하게 된 것은, 다시금 벤야민으로부터 빌려 오자면, ‘비어 있는 동질적 시간‘(homogeneous, empty time)이라는 관념으로, 여기에서 동시성이란 말하자면 시간에 가로놓인 것, 시간과 교차하는 것, 예시와 실현이 아니라 시간적 동시 발생으로 특징지어지는 것, 그리고 시계와 달력으로 측정되는 것이다. - P51

돌이킬 수 없는 언어적 다양성이라는 일반적 조건의 의미에서 숙명이라는 관념을 마음에 새겨두는 것이 핵심적이기는 하지만, 이 숙명을 특정한 언어들의 원초적 숙명 및 이들이 특정한 영토 단위와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공통된 요소와 같이 놓고 보는 것은 오해이다. 핵심적인 것은 숙명과 테크놀로지, 자본주의의 상호작용이다 - P79

‘헝가리인‘이 민족적 국가를 가질 자격이 있다고 한다면, 여기서의 ‘헝가리인‘이란 헝가리인들 모두를 의미했다. 그것은 주권의 궁긍적인 소재가 헝가리어 화자와 독자들의 집합체에 있어야 하는 국가를, 그리고 자연히 농노제의 폐지와 인민 교육의 증진, 투표권의 확대 등등을 의미했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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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윤보가 대답하였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습니다. 지금 백성들이 강보(襁褓)의 아이를 엎고 물 흐르듯 오는 것은 하늘같은 것이 여기에 있는 연고입니다. 유사(有司)가 일찍이 아끼고 애석해 하는 것이 없이 이처럼 낭자(狼藉)하게 버리니 가만히 어느 날 쌀이 다 떨어지면 백성이 흩어질까 두려운데, 밝으신 공께서는 누구와 더불어 대업을 완성할 것입니까?"

제장들이 모두 싸우기를 청하였지만 이세민이 말하였다.
"우리 군사들은 바로 전에 패하여서 사기가 막히고 상해 있으며, 도적들은 승리한 것을 믿고 교만하니, 나를 가볍게 보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므로 의당 보루를 닫고 그들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저들이 교만하고 우리가 분발하면 한 번 싸움으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진악(陳嶽)이 논평하였습니다.
천명을 받은 군주는 이름을 드러내고 호령을 내리면서 자손에게 본받도록 하여야 한다. 한 가지가 이치에 맞지 않으면 여계(?階)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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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박정희 2- 왜곡된 신화, 영웅인가 기회주의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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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11-28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화 시리즈. 이런 게 있는 줄 몰랐습니다. 재밌겠습니다. 학생들도 좋아하겠어요.
조카들 선물에 좋을지 검색해 보겠습니다. 좋은 정보에 감사드립니다. ^^

겨울호랑이 2021-11-28 20:25   좋아요 0 | URL
인물 평전을 만화로 쉽게 그려 재밌게 읽었습니다. 페크님 좋은 선물 되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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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보는 항일 무장 투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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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호실 환자는 임이네였다. 천년을 살 것 같았던 그 무성한 생명력은 어디로 간 것일까. 참혹한 몰골이다. 복막염 수수을 한 지 열흘이 지난 것이다.(p557)... "선상님요, 나 나이가 이자 겨우 쉰다섯입니다. 나는 못 죽십니다. 참말로 못 죽십니다. 무신 남 못할 짓 했다고 멩대로 못 살겄십니까. 디건이(두견이)목에 피 내묵고 살덧기 살았는데 한이 첩첩산이오, 선상님, 살리주시이소!" 울음을 터뜨린다.(p559)... "영악한 아낙이야. 자기 죽음을 예감하는 것 같다." "환자치고 저런 환잔 처음 봤습니다. 어떤 때는 반미치광이같이 날뜁니다. 사는 것이 저리 추악한 것이라면 살아서 뭘 합니까." "젊은 사람들은 다 그렇게들 말하지.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천당이든 지옥이든 내세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나." _ 박경리, <토지 10> , p560/682


 토지 독서챌린지 20주차. 이번 주 미션은 '3부 2권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 소개'를 포함한 감상평이다. <토지> 3부 2권에서는 결핵성 복막염으로 죽어가는 임이네의 모습이 그려진다. 돈을 밝히다가 자식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임이네. 병들어 죽은 월선과 늙어 시들어가는 남편 용이와는 달리 천년 만년 살 것같은 그 역시 생로병사(生老病死)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임을 느끼게 된다. 아마도, 이 장면이 가장 인상깊은 것은 현실에서 있었던 다른 죽음때문일 것이다. 못된 임이네지만,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전두환의 죽음. 한동안 백담사에 머물며 독경소리를 들으며, 내세에 대한 생각도 해봤을 법한데 반성없이 떠난 그의 죽음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죽음은 절대적인 승리자요, 거대한 암벽에 모래알을 던지는 환자는 눈물나게 측은한 것이기 때문이다._ 박경리, <토지 10> , p565/682


 그토록 억척스러웠던 임이네는 박의사에게 매달리며 살려 달라고 애걸한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종착역이지만, 많은 이들에게 미루고 싶은 순간이기도 하다.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에 대해 답을 주는 종교(宗敎)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의 초기 역사부터 함께 해 온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투는 신들과 다양한 종교들의 형식들은 사실 서로 상극이지만, 종교들 모두가 충족할 통일된 구원책이 있다. 1. 어떤 불안감. 2. 그것의 해소책. 첫째, 불안감은 가장 단순한 말로 줄여보면, 우리가 자연적 상태에 있을 때 우리 주위에 잘못된 것이 있다는 느낌이다. 둘째, 해소책은 고차적 힘과 적절히 연계시킴으로써 우리가 그 잘못된 것으로부터 구원받는다는 느낌이다....자신의 잘못을 괴로워하고 그것을 비판하는 개인은 의식적으로 그것을 극복하고, 고차적인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적어도 보다 고차적인 것과 가급적 교통할 것이다. _ 윌리엄 제임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 p596


 <토지 10>에서는 종교의 역할에 대한 내용이 다루어진다. 종교의 역할은 개인의 구원에 머물러야 하는가, 사회 참여까지 확장되어야 하는가. 기독교 선교사 미스 헤이워드와 여옥과의 대화는 이에 대한 논쟁이다. 종교의 사회 참여에 대해 미스 헤이워드는 부정적인 입장을 펼친다. 정확하게는 외국 선교사의 제한된 입장을 대변한다.


 약소국이나 식민지에서 우리 선교사업 매우 곤란합네다. 고충 많습네다. 우리도 독립전쟁 겪었고 남북전쟁 상처 아직 남아 있습네다. 나라 잃은 백성들 슬픔 우리 충분히 이해합네다. 그러나 우리 미국에서도 선교는 개인의 영혼을 그리스도로 이끄는 일이며 그리스도의 진실 알게 되고 복종하면 사회개혁 저절로 되는 거라 해왔습네다. 그렇다면 사회개혁 무관심했다 할 수 없습네다... 그러나 이곳은 내 나라 아닙네다. 우리는 손님입네다. 이해하고 동정할 뿐입네다. _ 박경리, <토지 10> , p656/682


 미스 헤이워드의 말대로 그들은 이방인이었고 자신들의 나라가 아니었기에, 지배권력이었던 일본총독부와 대립할 필요는 없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선교사업'이었지 고통에 신음하는 형제자매들의 모습이 아니었음을 선교사의 말을 통해 깨닫게 된다. 이에 반해, 여옥에게 식민지 상황은 자신의 상황이었기에, 현실 참여적인 기독교 정신을 말하며 미스 헤이워드의 말을 반박한다.


 산간벽촌에 있어서 기독교란 아주 생소하고 서양사람 종교라는 의식이 강합니다. 그리고 미신적으로 믿어지는 불교며 무당들, 점쟁이를 통한 귀신신앙도 뿌리깊은 것입니다. 유교에서 오는 조상숭배도 그렇고요. 그러나 아무리 몽매무지한 사람에게도 내 나라를 잃었다, 내 나라를 찾아야 한다는 말은 대단한 호소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설령 그들이 아무것도 행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일지라도 심정적으로 불이 붙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조선에 있어서 독립사상과 기독교 정신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순수한 전도정신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_ 박경리, <토지 10> , p657/682


 이들의 대화에서 여옥과 미스 헤이워드의 말은 각자 자신의 처지에서 나오는 말이기에 옳고 그름을 말하기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자신의 문제를 남이 풀어줄 수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는 1919년 3.1운동에서 기대했던 '민족자결주의'가 결코 우리에게 독립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냉정한 현실 인식의 또다른 표현으로도 느껴진다. 이로 인해 1920년대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이후 1930년대 새롭게 전개된 항일무장투쟁에서 사회주의 계열이 더 힘을 얻게 된 여러 요인 중 하나로 종교에 대한 실망감 또한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3.1 운동을 준비하고 주도한 세력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를 비롯한 종교계 인사들과 애국적인 교원들과 학생들로서 주로 민족주의운동세력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었다.(p22)... 3.1운동의 교훈은 부르주아 민족주의 상층은 더 이상 항일민족해당운동의 지도세력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계급적 제한성은 일본의 식민지지배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데까지 도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_ 박경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1> , p25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계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하겠다. _ <마태 28:20> <신약성경>  


 개인적으로 내가 여옥이라면, 긴 말을 하지 않고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심정을 대신하지 않았을까 싶다. 형제의 아픔에 동감한다면, 성경의 말씀처럼 세상 끝 날까지 형제와 함께 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조직으로서 교단(敎團)과 종교의 가르침 사이에는 현실적인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음도 함께 생각하게 된다.


 <토지 10>에는 이에 앞서 명희와 여옥의 대화가 소개된다. 부인과 이혼하고 명희와 결혼한 남편 조용하 이야기가 이들 사이에 오가지만, 다음 구절은 대화 이전에 앞서 있었던 홍이와 장이의 불륜을 떠올리게 한다.


 별안간 들린 것처럼 여옥의 음성은 강렬하였다. 눈은 더욱 어둡게 타는 것 같았다.

 "그렇담 나도 간음한 여자가 아니겠니?"

 "누구든지 간음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라." _ 박경리, <토지 10> , p639/682


 멀고도 가까운 것이 남녀의 사이라던가. 아무도 없는, 외부와 단절된 차고가 유죄였는지 모른다. 불이 붙으면 태워야 하는 것이 이치였었는지 모른다. 사랑은 여하한 경우에도 아름다운 것인지 모른다. 치욕과 멸망의 결과가 크면 클수록 더욱 치열하게 타오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예감하면서, 강하게 예감하면서, 이들의 관계는 깊어지고 말았다. 사랑의 환희는 슬픔이었다. _ 박경리, <토지 10> , p617/682


 어머니에게 상처를 입고, 장이에게 상처를 준 홍이. 장이에게 대한 과거의 죄책감으로 현재의 부인 보연에게 다른 상처를 만든 홍이의 모습에서 안타까움, 연민을 느끼게 된다.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이들의 사랑이야기. 그리고 이를 자연스럽게 신여성(新女性) 여옥의 등장으로 연결하는 작품의 매끄러움에 감탄을 하게 된다. 홍이의 개인적인 불안의 감정으로부터 여옥의 종교의 역할까지 개인의 감정선과 시대의 흐름을 오가며, 인물과 시대를 하나로 연결하는 작가의 솜씨에 감탄하면서 <토지> 3부 2권을 마무리한다... 


 어미에 대한 의사의 선고는 충격이었다. 까맣게 잊었던 장이의 귀향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어미 때문에 받은 충격은 어떤 종류의 것인지,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놀라움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장이에 대해서는 몹쓸 짓을 했다는 회한이 홍이로 하여 잠들지 못하게 하였다. 장이에게도 물론 메울 수 없는 상처였겠으나 홍이는 자신에게도 얼마나 깊은 상처였는가를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이다. 젊음의 실수, 시기가 청춘이며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기 때문에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을 홍이는 깨달은 것이다. 보고 싶고 그립고, 그렇지 않았다. 내가 몹쓸 짓을 하였구나, 다만 아픔이었다. _ 박경리, <토지 10> , p605/682


 육신의 고통이 무엇이랴! 시궁창과 같은 오욕, 홍이는 혀를 물어끊고 죽을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웠다. 그러면서도 홍이는 어디든 도망을 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징역이 무서워서도 아니요, 죽음이 무서워서도 아니요, 보연이와 장인, 장모, 처제들, 기름집의 오타며 미야코며 일주며 자신을 아는 모든 사람의 눈길이 무서웠다. 그러나 도망갈 곳이 없었다. 아비의 깊고 깊은 눈이 뼛속까지 스며든다. 그리고 장이를 두고 갈 수 없다. _ 박경리, <토지 10> , p623/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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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1-11-27 2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문열의 ‘불멸‘에도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을 때, 안중근 일가가 독실한 가톨릭교도임에도 불구하고 파리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이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고 나와요. 그토록 힘들게 이 땅에서 일군 가톨릭 전파를 안중근 의사의 행동으로 일본에게 금지 당하지 않을까하는 우려 때문에요. 같은 신, 같은 말씀이라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 된다는게 속상했어요.
언제 읽어도 빛나는 겨울호랑이님의 명품 페이퍼 입니다^^

겨울호랑이 2021-11-28 07:56   좋아요 1 | URL
페넬로페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사이비 종교를 제외한 거의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큰 틀에서 같은 방향을 지향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종교 갈등이 신앙 자체보다 이면에 깔려있는 교단의 이해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부딪혀서 생긴 문제가 대부분임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신자 또는 신도들이 신앙공동체 안에 소속되어 있지만, 때로는 공동체와 자신을 객관적으로 봐야할 이유 중 하나도 이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페넬로페님 항상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