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트롱은 고대 또는 근대적 형태의 폭력은 그 근원을 종교 그 자체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인간과 국가에 내재된 본성"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신명기에 나타나는 제노포비아Zenophobiaa적 신학사상은 유대왕국이 정치적으로 붕괴에 직면했을 때 나타났"고, 무슬림의 지하드Jih?db나 타크피르takfir(배교자 혹은 불신자를 규정하는 절차)의 부활은 "주로 서구 제국주의(기독교와 결탁한)가 초래한 정치적 긴장상태와 팔레스타인 문제"때문이라는 것이다.

엘러는 모든 종교가 ‘본질적’으로 폭력 성향을 갖는다는 주장을 부인한다. 그러나 그는 일신교의 선과 악을 명확히 구분하는 이분법적 성향이 "돌이킬 수 없이 적대적"이며 "투쟁과 폭력의 가능성이 상존하는" 두 영역을 만들어냄으로써, "세계의 기본 구조에 분쟁의 씨앗을 심었을" 뿐 아니라, "타 종교에 대한 박해는 필수불가결하고 중요한 행동이라고 여기도록 하는 맹렬한 신념을 추종자들의 마음속에 새긴다."라고 주장한다.

성소聖所와 신의 영감을 받았거나 그와 유사한 권위를 부여받은 성서聖書가 애벌로스가 언급한 첫째와 둘째 희소자원에 해당한다. 이것들이 희소자원인 이유는 이것에 접근하거나 이것을 통제하고 해석하는 자격이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특권 의식과 구원이 나머지 희소자원인데 이것들은 종교적 전통에 따라 특별한 경우 외에는 개인에게 부여되지 않는다. 네 가지 자원은 분명 서로 관련되어 있는 한편, 여러 측면에서 상호독립적이다.

진화적 관점에서 볼 때 일신교는 대단히 효율적으로 내집단과 외집단의 구별을 만들어냈으며, 또한 그것을 강화하고 정당성을 부여해왔다. 아브라함 종교는 모든 동정심을 없애고("너희의 눈이 그들을 동정하지 말 것이며", 신명기 7:16) 모든 형태의 폭력을 허용한다("그들의 머리와 손가락을 잘라 버리라", 수라 8:12). 1차 십자군전쟁은 이런 유혈폭력의 좋은 보기이다.

수컷 동물들 (특히 유인원과 원숭이) 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끔찍한 진화적 전략은 영아살해다. 오직 수컷만이 그런 행동을 저지르며, 특히 다른 수컷을 권좌에서 밀어낸 후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영아살해의 번식적 이득은 명백하다. 경쟁자 수컷의 자손을 살해함으로써 살해자(그리고 그의 수컷 자손)는 미래에 암컷을 두고 경쟁할 필요가 없어진다. 또한 이렇게 자식을 잃은 암컷은 즉시 발정기에 들어가 살해자에게 추가적인 번식의 기회를 제공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비폭력이 폭력보다 목적 달성이란 측면에서 더 뛰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민중의 힘"이라고 체노베스는 말한다. 그러면 얼마나 많은 민중이 저항에 참여해야 하는가? 그녀의 데이터에 따르면 "일단 전인구의 3.5%가 능동적이고 지속적으로 참여한 저항운동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으며, 많은 경우 그보다 작은 참여율로도 성공했다." 또한 "실제로 3.5%의 문턱을 넘어선 모든 투쟁은 비폭력적인 것이었다. 순전히 비폭력 수단에 의지한 투쟁의 규모는 평균적으로 폭력적 투쟁의 네 배였다. 그리고 성별, 연령, 인종, 정치세력, 사회계층, 그리고 생활 영역권에서의 대표성도 훨씬 높았다."

테러리스트는 자신보다 강한 적들로 하여금 그 칼날을 스스로에게 향하도록 하는 전술을 쓴다. 그리고 그런 전술이 미국에서 효과를 보고 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사법제도와 법 집행의 왜곡, 프라이버시의 침해, 국민의 삶을 개선하는 데 선용할 수 있는 에너지와 자원의 낭비 등을 자초했다. 미국에 진정한 위협은 테러리즘이 아니라 공포의 문화다.

의식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수록 자아의 실재에 대한 믿음은 약해진다. 그러므로 자아의 환영에 현혹되지 않고 의식의 실체를 직접 경험한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 결과로 우리는 편협한 시각을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압박감을 극복할 수 있으며, 보편적인 사랑을 비롯해 명상이 약속하는 모든 혜택을 누릴 수 있다.

피케티는 조세와 재정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의 마법이 아니라 경제정책이라고 주장한다. 피케티에 따르면 불평등을 초래하는 근본 원인은 정치적 상황이다.

피케티는 지난 100여 년의 역사를 살펴보면 소득불평등은 노동과 자본 영역 모두에 널리 퍼져 있지만 자본 투자 영역에서 훨씬 심각하게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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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정치가들은 제국이란 ‘무력’으로 얻어내고 유지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동일한 수단에 의해 더 우세한 열강에게 넘어갈 것이라고 믿었다. 나폴레옹의 태도가 영국의 태도와 조금이라도 다른 게 있는가?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은 세력 균형을 극적으로 변화시키고 프랑스의 헤게모니를 무너뜨릴 기회를 알리면서 유럽 전역에 충격파를 몰고 왔다. 1812년 12월 러시아 협상가들과 프로이센 장군 요한 폰 요르크 사이에 체결된 타우로겐 협약은 나폴레옹 전쟁의 새로운 국면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아마도 최종 조약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참패를 당한 프랑스에 대해 동맹 세력이 놀랄 만큼 관대했다는 점일 것이다. 중요한 양보로서 그들은 최종 조약이 공식 비준되기도 전에 프랑스 영토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합의했다. 더 나아가 프랑스 군대의 향후 규모에 아무런 제한을 부과하지 않았고, 프랑스가 내야 할 배상금을 산정하거나 프랑스 군대가 점령지와 정복지에서 뜯어낸 막대한 액수를 보상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놀랍게도 나폴레옹이 정복전쟁 동안 탈취한 막대한 양의 예술품을 반환하라는 요구도 없었다.

메테르니히는 유럽 사회들이 일종의 균형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균형이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정복전쟁들로 깨졌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유럽에 다시 안정을 가져오려면 "정당한" 통치자들이 왕위에 복귀해야 하며 나폴레옹이 초래한 변화들의 전부는 아니라 해도 일부는 되돌릴 필요가 있었다. 정치적 평형 상태는 또한 서부에서 프랑스를 억제하고 동부에서 러시아의 지배를 방지함으로써 유럽에서 오스트리아의 입지를 수호하려는 메테르니히의 목표에 핵심적 성격을 부여했다.

정당성 원칙의 옹호자로 스스로를 내세움으로써 탈레랑은 실질적으로 프랑스를 패전국에서 러시아의 침략적 행위를 억지하고자 하는 누구에게나 소중한 파트너로 탈바꿈시켰다. 이는 당연히 영국과 오스트리아에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나폴레옹 전쟁은 19세기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전쟁은 군주제, 귀족제, 노예제 같은 제도들의 정당성과 전통적 생활방식을 뒤흔들었다. 또한 해소되지 않은 여러 쟁점들을 남겼다. 그러므로 후속 세대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중앙집권화와 근대화, 공화주의와 군주정주의, 산업화와 급진주의의 유산들을 두고 씨름했다. 세인트헬레나섬에 유배된 나폴레옹은 정치적 전설이 자라나게 했고, 전설은 재빨리 그에 맞서 싸웠던 사람들의 후손들에 의해 기려지고 이상화된 자애로운 황제에 대한 강력한 신화로 진화했다.

나폴레옹 전쟁은 무엇보다도 유럽 내 갈등이었지만, 유럽과 나머지 세계와의 관계를 형성했다. 이 무력 분쟁은 유럽 국가들이 개혁과 근대화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과하도록 강요하고 촉진했으며, 그 과정에서 세계 여러 지역들 간 세력 균형을 변화시켰다. 유럽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유럽은 중국과 이슬람 세계의 더 선진적이고 세련된 문명들에 뒤처져 있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이 막을 내릴 때쯤 군사적 문제, 산업 발달, 기술력 측면에서 나머지 세계에 대한 유럽의 우위는 확연했다. 이는 대분기의 시작이었고, 이 전환의 엄청난 의미는 19세기가 흐를수록 더 분명해진다.

빈 회의에서 도출된 나폴레옹 전쟁 이후 평화 정착은 네 가지 원칙을 토대로 했다. 첫째, 유럽 열강은 어느 한 나라가 유럽을 지배하는 상황을 막고 평화 유지에 협력적인 접근법을 장려함으로써 정치적·군사적 세력들 간의 국제적 평형 상태를 유지하고자 했다.

두 번째는 정당성의 원칙으로서, 이 원칙은 합법적인 군주정들을 복귀시키고 그리하여 대륙에서 전통적인 제도들의 보전을 외견상으로는 꾀했다.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그리고 나폴레옹 치하에서 많은 군사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귀족계급이 주관하는 군주제 국가들의 구질서는 살아남았고 궁극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자유주의의 주요 관념들─개인의 자유, 법 앞에서의 평등, 자유방임 경제─은 1815년에 결코 패배한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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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아대륙이 농업 위주의 자급자족 경제로는 급성장하는 영국 자본주의 시스템과 경쟁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활용했다. 조각조각 난 인도 토후국들은 영국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에 상대가 되지 않았고, 그 덕분에 동인도회사는 무시하지 못할 군사력을 유지하고 손실을 메우고, 유럽식으로 훈련받은 인도 세포이 병사들로 이루어진 군대에 갈수록 더 의존할 수 있었다. 그러한 군사력은 전장에서 충분히 통했고, 더 중요하게는 유럽 정규군보다 비용이 덜 들었다. 그 결과 회사의 지배 영역을 확장하는 비용은 줄곧 비교적 낮게 유지되었다.

동인도회사 총독으로 웰링턴 공작의 형 리처드 웰즐리가 임명된 것은 영국이 인도 지배를 확대하게 되는 결정적 순간이었다. 5장에서 살펴본 대로 웰즐리는 유럽 대부분 나라의 발목을 잡은 혁명의 혼란을 면밀히 주시했고, 바로 지금이 인도에서 영국의 입지를 단단히 다질 순간이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입지를 다지고 나면 인도의 방대한 자원들은 영국의 이해관계를 전 세계적으로 증진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웰즐리는 프랑스 세력에 대한 공포를 자신의 제국주의적 구상에 대한 구실이자 영국의 팽창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이용했다. 그가 인도 토후국들을 취급하는 방식에서 종속 동맹 시스템에 대한 영국의 태도 변화가 확연히 감지되었다

중국의 관점에서 마카오 사건은 아닌 게 아니라 만만찮은 적수에 맞선 중요한 승리였지만 이러한 결론은 나폴레옹 전쟁 동안 영국의 개입이라는 더 폭넓은 국제적 맥락을 간과한 것이다. 육군은 유럽에 투입되어 있고 해군은 전 대양에 흩어져 있는 상황에서 영국은 또 다른 분쟁에 휘말릴 생각이 없었고, 그것이 핵심적인 세입원과 엮인 경우라면 더욱 그랬다. 마카오 사건은 자국 영토가 침해된다면 중국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영국이 가늠해볼 기회가 되었고, 청나라 조정이 그런 일을 일체 용납하지 않으리란 점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이해가 향후 영국의 대중국 정책을 형성했다.

모리셔스 함락은 인도양에서 프랑스의 마지막 전초기지를 제거했다. 영국은 마지막 남은 프랑스의 프리깃함들을 압수했을 뿐 아니라 인도양 전역에 걸친 추후의 활동을 위한 핵심 기지도 손에 넣었다. 〔프랑스식 지명 모리스에서〕 모리셔스로 재명명된 섬은 1968년까지 영제국 소속으로 남았다. 마스카렌제도의 함락 소식은 그랑포르에서 프랑스의 승리에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나폴레옹이 프랑수아 로크베르 후위제독에게 소규모 전대를 이끌고 인도양으로 출항하라고 재가한 뒤에야 도착했다.100 로크베르는 1811년 2월에 마스카렌제도에 도착했다가 그곳이 영국인들의 수중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영국 해군 전대가 곧 그들을 추격해 1811년 5월 20일에 타마타브(마다가스카르에 있는 교역소) 근처에서 한 척을 제외하고 모두 사로잡았다. 타마타브 전투는 인도양에서 벌어진 프랑스 해군의 최종 교전이었고 영국 상선들에 대한 프랑스의 위협을 거의 다 종식시켰다.

결국 그들은 미국이 북아메리카의 에스파냐 영토를 획득하는 미래가 차악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나폴레옹이 신생 공화국을 위협할 식민 제국을 건설하는 끔찍한 그림을 그려 보이며 미국을 영국과의 동맹에 끌어들이고자 했다. 1803년 애딩턴 총리는 미국인들에게 영국 정부는 루이지애나가 "프랑스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차원"20에서 미국 영토에 추가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므로 루이지애나 매입 소식을 들었을 때 영국 외무장관은 미국 쪽 상대방[미국 국무부]에게 "폐하(조지 3세)께서 이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였다"라고 알렸다. 물론 여기에 표명된 감정은 진심과 거리가 멀었다

루이지애나 매입의 여파로, 에스파냐 영토에 대한 미국의 욕망은 더욱 커졌다. 미국 정부는 영국이 플로리다를 탐낸다고 의심했는데, 나폴레옹 전쟁 시기를 한참 지나서까지도 지속될 의혹이었다. 더 목전의 목표는 영국의 해상력을 활용해 프랑스의 식민지 염원을 좌절시키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제국적 권력은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독일 국가들에서 민족의식의 기운을 일깨웠고, 프랑스의 점령은 교육 받은 엘리트층과 궁극적으로는 서민들로부터 애국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프로이센에서는 민족 정서가 꿈틀대고 있었고 이곳의 저명한 독일 작가와 철학자들은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리고 민족주의 선전과 자유에 대한 새로운 의식을 일깨우는 데 위대한 재능을 바쳤다. 앞서 겪은 군사적 패배들과 그에 따른 깊은 낭패감과 굴욕감은 독일 계몽사상의 성격 자체를 변화시키는 데 일조해, 이전의 세계시민주의와 합리주의 요소를 희생시켜가며 독일 계몽주의에 낭만적이고 민족주의적인 특색을 가미했다

러시아 원정은 나폴레옹 제국에 참사에 가까운 결과를 가져왔다. 제국은 전에도 시험에 들었지만 이전의 어느 실패도 러시아에서 당한 패배의 규모에는 근접하지 않았다. 대육군은 전멸하다시피 했다. 침공에는 궁극적으로 60만 명가량이 투입되었지만─주력 침공군은 45만 명이었고 나중에 약 15만 명의 증원군이 더 불려왔다─12월에 네만강을 다시 건넌 병사는 10만이 채 못 됐다. 50만 명의 병력 손실 가운데, 아마도 무려 10만 명 정도는 이탈병일 것이고 12만 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다.52 나머지는 질병이나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또는 혹독한 환경에 노출되어 죽었다. 그만큼 파국적인 것은 군사 장비의 손실이었다. 나폴레옹은 약 1300문의 대포 가운데 920문을 잃었고, 기병은 사실상 일소되었다. 훈련된 말 대략 20만 마리가 러시아 벌판에 쓰러져 있었다. 포병과 기병 어느 쪽도 향후의 전역 동안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대육군은 전력의 거의 절반을 전쟁의 첫 8주 사이에 수비대 배치와 질병, 탈영, 사상자로 인해 상실했다. 또 이번 원정군에는 이전의 전역들에서 볼 수 있었던 수준 높은 규율이나 전폭적인 헌신이 없었다. 7~8개국에서 온 병사들이 원정군을 구성했고, 따라서 그들은 패배의 부침 앞에서 단결력과 규율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나폴레옹은 병참에 철저하게 대비했지만, 그의 보급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영국은 나폴레옹에 맞서 전 세계에 걸쳐 무력 분쟁에 얽혀 있고, "그중에서도 나라의 이해관계가 (…) 더 직접적으로 걸려 있는 지역에서 싸움을 한층 더 열심히 수행하는 데" 자원이 투입되어야 했다. 리버풀의 편지는 캐나다가 스스로 건사해야 하며, 캐나다에서 영국의 전략은 순전히 미국에 영토를 뺏기지 않는 수세적인 전략이어야 함을 분명히 했다. 심지어 영국군이 나중에 멕시코만 연안지역과 체서피크만에 공세를 감행했을 때에도 이 군사작전들의 전반적인 목적은 캐나다 전선의 압력을 덜어주는 것이었다. 반대편 미국의 전쟁 목표는 선원의 강제 징모와 해상에서 중립국의 권리 쟁점을 놓고 영국의 양보를 얻어내는 것뿐 아니라 쇼니족의 테쿰세와 텐스크와타와가 수립한 대연맹 같은 친영파 원주민 부족과 캐나다를 상대로 한 영토 팽창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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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Cognition>의 2012년 기사에서 설레스트 키드Celeste Kidd와 홀리 팔머리Holly Palmery, 리처드 애슬린Richard N. Aslin은 아이들의 성장 환경에 비추어 볼 때 두 번째 마시멜로를 가지고 돌아오겠다는 연구자의 약속에 의심을 품을 만한 사정이 있는 아이들은 마시멜로를 먹을 확률이 컸다고 밝혔다. 불안정한 환경에서 양육되는 아이들은 "이미 뱃속에 들어간 마시멜로 외에는 확실한 게 없는" 반면, 안정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두 번째 보상이 정말로 눈앞에 나타날 거라는 확신을 갖고 몇 분을 더 참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통계 자료에는 쉽게 납득할 수 있는 부분도 있는 반면 한번 의심해보아야 하는 부분도 있다. 그 연구가 특정한 패턴에 맞추려고 특정 데이터만 추출한다거나 맞지 않는 데이터는 조작하고 배제하는 것은 아닌지 항상 주의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다른 연구 결과가 시사하는 바에 따르면, 채식주의자들이 더 건강한 이유는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충분한 채소를 섭취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진화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 인간은 적응력이 매우 강하며 구석기 시대 이후로 계속 진화해왔다는 점이다. 처음에 우리 조상은 성인이 되면 더는 젖당을 소화시키지 못했다. 아기들은 모유를 소화할 수 있도록 락타아제를 만들 수 있지만, 성장함에 따라 락타아제를 생산해내는 능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인구의 대부분이 평생 동안 락타아제라는 효소를 만들어낸다. 인류의 일부는 젖소에서 얻는 ‘우유’라는 새로운 영양원을 이용할 수 있도록 진화했다. 북유럽에서는 낙농업이 시작된 후에 락타아제 지속성lactase-persistence이 있는 유전자의 출현 비율이 총인구의 80% 이상으로 높아졌지만, 낙농업이 실행되지 않은 다른 지역에서는 그 비율이 거의 0%로 남아 있다

살을 빼는 데 특정 다이어트가 다른 다이어트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아니었다. 식단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동기 부여다. 감량한 체중을 유지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매일의 식단과 체중을 기록하고, 꾸준히 운동하며, 규칙적인 식생활(주말이나 특별한 경우에도 식습관을 바꾸지 않는다.)을 유지한다. 모든 다이어트는 본질적으로 열량을 더 적게 섭취하면서도 견딜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효과가 더 좋은 속임수는 사람마다 다르다. 중요한 것은 포만감이다.

어떤 음식은 다른 음식보다 특정 영양소를 더 많이 함유하고 있다. 그러나 ‘슈퍼푸드superfood’라는 개념은 허황된 통념이다. 모든 영양소를 완벽하게 공급하는 음식이란 없다. 물론 스피룰리나m는 상당히 다양하고 풍부한 영영소를 함유하고 있으며, 시금치는 더욱더 그러하다. 슈퍼푸드 목록들은 서로 일치하지 않으며, 무려 200가지 음식을 포함하기도 한다. 그런 음식들이 모두 슈퍼푸드라면 거의 모든 음식이 슈퍼푸드일 테니 그 개념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다.

유전자 변형 식품의 폄하는 자연주의적 오류p, ‘과학문맹’, 그리고 이윤을 추구하는 거대기업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었다. 천체물리학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Neil deGrasse Tyson은 최근 트위터에 이런 말을 남겼다. "유전자 변형 식품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거의 모든 식품이 인위 선택에 의해 유전자가 변형되어왔다는 점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물은 생명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지만, 너무 많으면 너무 적은 것만큼이나 해롭다. 사람은 물 중독으로 죽을 수도 있다. 운동선수에게 체액 보충은 중요한 일이지만, 수분 과잉으로 마라톤 선수들이 죽기도 했다. 탈수증dehydration에 대한 오해는 수두룩하다. 날마다 물을 8~10잔씩 마셔야 한다는 통념도 잘못 알려진 것이다.

마이클 폴란Michael Pollan에 따르면 그동안 나온 건강 식단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먹어라. 적당한 양만큼. 식물 위주로." 과일 및 채소 섭취량을 늘리고, 적색육과 가공식품 섭취량을 줄이고, 다양한 음식을 골고루 먹고, 열량을 제한하고, 체중을 조절하라.

요약하자면 영양에 대해 설명하는 일은 과학의 영역이지 직관의 영역이 아니다. 건강과 건강관리는 고려해야 할 요인이 많다. 나쁜 소식을 하나 전하자면 체중 감량은 매일의 에너지 소비를 늘리고 음식 섭취를 줄여야 하는, 여전히 힘든 과제라는 것이다. 하나의 영양소를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다. 예전에도 지방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탄수화물 역시 같은 길을 걸을지도 모른다. 이에 반대하려면 입증 책임은 반대하는 그 저자들에게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까지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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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지기 2022-07-11 2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시멜로 이야기가 충격적이네요... ㅎㅎㅎ

겨울호랑이 2022-07-11 22:20   좋아요 1 | URL
네, ^^:)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마시멜로의 교훈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저도 이번에 알았습니다. 데이터가 주어져도 데이터에 어떤 질서를 부여하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적인 금융, 기술, 군사 강국이었지만, 그 국내 기반은 불완전했다. 코로나19가 고통스럽게 드러냈듯이, 미국의 보건 시스템은 망가지기 일보 직전이며, 미국의 사회안전망은 수천만 명의 사람들을 빈곤의 위험에 빠뜨렸다. 시진핑의 ‘중국몽中國夢’은 2020년을 거치면서도 온전히 살아남았지만, 미국의 ‘아메리칸 드림’은 그렇지 못했다. 2020년에 신자유주의가 겪은 전반적인 위기는 미국과 미국 정치 스펙트럼의 한 부분에 구체적이고 충격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신종 감염병 패러다임은 현대적 삶의 방식이 만들어내는 위협에 대한 심오한 진단이었다. 신종 감염병 패러다임의 타당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반反백신주의자들이 이끄는 단체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부수적인 요소일 뿐이다. 실제로 논란이 된 것은 신종 감염병에 대한 경고 그 자체가 아니라, 과연 우리에게 그 경고에 담긴 시사점을 받아들이고 끝까지 밀고 나갈 의지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만약 현대 경제·사회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질병 위험을 발생시키고 있다면, 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경제는 관념이다. 진짜 관념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실제 사람과 사물, 현실의 생산과 재생산 네트워크를 집계한 통계와 일련의 생각과 개념을 결합한 관념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GDP 같은 수치들은 총액은 적절히 잡아내지만, 혼란스러운 분리감을 만들어낸다. GDP 성장률과 다른 사회적 과제 사이의 ‘교환’이 의미 있는 일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바이러스는 경제라는 사회와 분리된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허상임을 드러낸다.

2월 7일은 중국 공산당의 권위가 가장 심각하게 도전받은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이날은 정부 대응이 전환점을 맞은 순간이기도 했다. 급증한 시위는 강경한 진압과 만났다. 검열은 과열 상태에 돌입했다. 소셜 미디어 게시물이 급속도로 삭제되었다. 감히 온라인에 비판 영상을 올린 우한의 기자들이 실종되었다. 쉬장룬 교수는 가택 연금되었고 바깥세상과 단절되었다. 중국 공산당의 안보 기관은 무시무시했으며, 진압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진압이 전염병 통제에서 거둔 성공과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워싱턴이나 런던에서 그러했듯이, 시진핑 주석의 정치적 위기 대처가 허술했다면, 시진핑 주석의 공고한 권력은 흔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중국은 소련처럼 붕괴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형세를 뒤집고 해외의 비판자들을 상대로 우위를 점했다. 이 질병과 처음 맞닥뜨린 국가인 중국에서는 위협이 급속도로 억제되었으며, 이 덕에 시진핑 정권은 마음껏 추가 조치를 할 수 있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통제 불능 상태였던 곳은 유럽과 미국, 라틴아메리카였다. 이 근본적인 차이가 2020년과 그 이후에 일어난 다른 모든 일의 틀을 잡았다

서방에서는 중국식의 가혹한 조치를 공산당의 일상적인 방식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중국의 현실을 잘못 본 것인 동시에 중국 중앙정부의 과감성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우한 봉쇄 조치는 최근 중국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2003년 사스에 노출된 베이징 주민 4000명이 격리 수용되었으며, 대학생 300명이 2주 동안 군부대에 억류되었다. 이런 조치는 그 자체로 주 혹은 나라 하나와 맞먹는 인구 1100만 명의 도시를 통째로 봉쇄하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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