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아대륙이 농업 위주의 자급자족 경제로는 급성장하는 영국 자본주의 시스템과 경쟁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활용했다. 조각조각 난 인도 토후국들은 영국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에 상대가 되지 않았고, 그 덕분에 동인도회사는 무시하지 못할 군사력을 유지하고 손실을 메우고, 유럽식으로 훈련받은 인도 세포이 병사들로 이루어진 군대에 갈수록 더 의존할 수 있었다. 그러한 군사력은 전장에서 충분히 통했고, 더 중요하게는 유럽 정규군보다 비용이 덜 들었다. 그 결과 회사의 지배 영역을 확장하는 비용은 줄곧 비교적 낮게 유지되었다.
동인도회사 총독으로 웰링턴 공작의 형 리처드 웰즐리가 임명된 것은 영국이 인도 지배를 확대하게 되는 결정적 순간이었다. 5장에서 살펴본 대로 웰즐리는 유럽 대부분 나라의 발목을 잡은 혁명의 혼란을 면밀히 주시했고, 바로 지금이 인도에서 영국의 입지를 단단히 다질 순간이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입지를 다지고 나면 인도의 방대한 자원들은 영국의 이해관계를 전 세계적으로 증진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웰즐리는 프랑스 세력에 대한 공포를 자신의 제국주의적 구상에 대한 구실이자 영국의 팽창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이용했다. 그가 인도 토후국들을 취급하는 방식에서 종속 동맹 시스템에 대한 영국의 태도 변화가 확연히 감지되었다
중국의 관점에서 마카오 사건은 아닌 게 아니라 만만찮은 적수에 맞선 중요한 승리였지만 이러한 결론은 나폴레옹 전쟁 동안 영국의 개입이라는 더 폭넓은 국제적 맥락을 간과한 것이다. 육군은 유럽에 투입되어 있고 해군은 전 대양에 흩어져 있는 상황에서 영국은 또 다른 분쟁에 휘말릴 생각이 없었고, 그것이 핵심적인 세입원과 엮인 경우라면 더욱 그랬다. 마카오 사건은 자국 영토가 침해된다면 중국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영국이 가늠해볼 기회가 되었고, 청나라 조정이 그런 일을 일체 용납하지 않으리란 점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이해가 향후 영국의 대중국 정책을 형성했다.
모리셔스 함락은 인도양에서 프랑스의 마지막 전초기지를 제거했다. 영국은 마지막 남은 프랑스의 프리깃함들을 압수했을 뿐 아니라 인도양 전역에 걸친 추후의 활동을 위한 핵심 기지도 손에 넣었다. 〔프랑스식 지명 모리스에서〕 모리셔스로 재명명된 섬은 1968년까지 영제국 소속으로 남았다. 마스카렌제도의 함락 소식은 그랑포르에서 프랑스의 승리에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나폴레옹이 프랑수아 로크베르 후위제독에게 소규모 전대를 이끌고 인도양으로 출항하라고 재가한 뒤에야 도착했다.100 로크베르는 1811년 2월에 마스카렌제도에 도착했다가 그곳이 영국인들의 수중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영국 해군 전대가 곧 그들을 추격해 1811년 5월 20일에 타마타브(마다가스카르에 있는 교역소) 근처에서 한 척을 제외하고 모두 사로잡았다. 타마타브 전투는 인도양에서 벌어진 프랑스 해군의 최종 교전이었고 영국 상선들에 대한 프랑스의 위협을 거의 다 종식시켰다.
결국 그들은 미국이 북아메리카의 에스파냐 영토를 획득하는 미래가 차악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나폴레옹이 신생 공화국을 위협할 식민 제국을 건설하는 끔찍한 그림을 그려 보이며 미국을 영국과의 동맹에 끌어들이고자 했다. 1803년 애딩턴 총리는 미국인들에게 영국 정부는 루이지애나가 "프랑스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차원"20에서 미국 영토에 추가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므로 루이지애나 매입 소식을 들었을 때 영국 외무장관은 미국 쪽 상대방[미국 국무부]에게 "폐하(조지 3세)께서 이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였다"라고 알렸다. 물론 여기에 표명된 감정은 진심과 거리가 멀었다
루이지애나 매입의 여파로, 에스파냐 영토에 대한 미국의 욕망은 더욱 커졌다. 미국 정부는 영국이 플로리다를 탐낸다고 의심했는데, 나폴레옹 전쟁 시기를 한참 지나서까지도 지속될 의혹이었다. 더 목전의 목표는 영국의 해상력을 활용해 프랑스의 식민지 염원을 좌절시키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제국적 권력은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독일 국가들에서 민족의식의 기운을 일깨웠고, 프랑스의 점령은 교육 받은 엘리트층과 궁극적으로는 서민들로부터 애국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프로이센에서는 민족 정서가 꿈틀대고 있었고 이곳의 저명한 독일 작가와 철학자들은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리고 민족주의 선전과 자유에 대한 새로운 의식을 일깨우는 데 위대한 재능을 바쳤다. 앞서 겪은 군사적 패배들과 그에 따른 깊은 낭패감과 굴욕감은 독일 계몽사상의 성격 자체를 변화시키는 데 일조해, 이전의 세계시민주의와 합리주의 요소를 희생시켜가며 독일 계몽주의에 낭만적이고 민족주의적인 특색을 가미했다
러시아 원정은 나폴레옹 제국에 참사에 가까운 결과를 가져왔다. 제국은 전에도 시험에 들었지만 이전의 어느 실패도 러시아에서 당한 패배의 규모에는 근접하지 않았다. 대육군은 전멸하다시피 했다. 침공에는 궁극적으로 60만 명가량이 투입되었지만─주력 침공군은 45만 명이었고 나중에 약 15만 명의 증원군이 더 불려왔다─12월에 네만강을 다시 건넌 병사는 10만이 채 못 됐다. 50만 명의 병력 손실 가운데, 아마도 무려 10만 명 정도는 이탈병일 것이고 12만 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다.52 나머지는 질병이나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또는 혹독한 환경에 노출되어 죽었다. 그만큼 파국적인 것은 군사 장비의 손실이었다. 나폴레옹은 약 1300문의 대포 가운데 920문을 잃었고, 기병은 사실상 일소되었다. 훈련된 말 대략 20만 마리가 러시아 벌판에 쓰러져 있었다. 포병과 기병 어느 쪽도 향후의 전역 동안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대육군은 전력의 거의 절반을 전쟁의 첫 8주 사이에 수비대 배치와 질병, 탈영, 사상자로 인해 상실했다. 또 이번 원정군에는 이전의 전역들에서 볼 수 있었던 수준 높은 규율이나 전폭적인 헌신이 없었다. 7~8개국에서 온 병사들이 원정군을 구성했고, 따라서 그들은 패배의 부침 앞에서 단결력과 규율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나폴레옹은 병참에 철저하게 대비했지만, 그의 보급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영국은 나폴레옹에 맞서 전 세계에 걸쳐 무력 분쟁에 얽혀 있고, "그중에서도 나라의 이해관계가 (…) 더 직접적으로 걸려 있는 지역에서 싸움을 한층 더 열심히 수행하는 데" 자원이 투입되어야 했다. 리버풀의 편지는 캐나다가 스스로 건사해야 하며, 캐나다에서 영국의 전략은 순전히 미국에 영토를 뺏기지 않는 수세적인 전략이어야 함을 분명히 했다. 심지어 영국군이 나중에 멕시코만 연안지역과 체서피크만에 공세를 감행했을 때에도 이 군사작전들의 전반적인 목적은 캐나다 전선의 압력을 덜어주는 것이었다. 반대편 미국의 전쟁 목표는 선원의 강제 징모와 해상에서 중립국의 권리 쟁점을 놓고 영국의 양보를 얻어내는 것뿐 아니라 쇼니족의 테쿰세와 텐스크와타와가 수립한 대연맹 같은 친영파 원주민 부족과 캐나다를 상대로 한 영토 팽창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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