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대항해』는 난파선과 선박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그것들이 이야기의 주요 구성 요소이기는 하다. 이것은 물 위와 뭍 위 양쪽의 사건에 대한 것이다. 선구적인 수중 고고학자 조지 베이스가 한때 내게 강력하게 상기시켰듯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든 간에 난파선은 우리에게 바다 밑바닥에 남은 잔해보다는 육지의 사회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려 준다.

고대 항해자들이 마음속 깊이 새겼던 것 중 하나는 인명 피해의 불가피성, 결코 귀환하지 못한 카누들, 현대의 유럽과 미국 어부들 사이에 여전히 남아 있는 침몰과 좌초에 대한 거친 숙명론이었다. 모든 대양을 해독하는 작업은 오랜 경험과 냉정한 현실주의, 조심스러운 항해 그리고 깊은 바다 풍경과 얼마나 친숙한가의 문제였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자신들끼리 서로 협력하듯이 바다와 협력한다. 하루하루를 바다와 함께 살아가기 때문이다. 바다의 힘은 저마다의 몸과 영혼의 일부이다. 성스러운 존재들의 바다 여정과 그들의 가르침은 이야기와 노래, 제의를 통해 대대로 전해졌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고기잡이들이 깊은 바다로 나가거나 상상의 여행을 떠날 때면 이 고대의 가치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

뗏목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에 충분한 인구를 실어 갈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수천 년에 걸친 바다 횡단을 통해 선박의 유형에 심대한 변화가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면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세 가지 유형의 다른 선박이 등장했는데 바로 갈대 보트와 나무껍질 보트, 그리고 통나무 카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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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서독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와 빌리 브란트는 각자 두 가지 역사적 임무를 완수했다. 아데나워는 독일 우파를 대체로 자유주의 이상에 관용적인 하나의 민주주의 정당으로 통합했고, 서독을 서방에 안착시켰다. 브란트는 사회민주당을 중도 좌파 집권당으로 만들었고, 전 세계에서 독일에 대한 존중을 회복시켰다.

국내 정치에서, 시민권과 위대한 사회로 인해 민주당은 한 세대 동안 남부의 지지를 잃을 것이라고 존슨은 예견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시간이 반세기 이상 지속되었으니, 그가 너무 적게 추산한 셈이었다. "백인의 반격"으로 민주당은 남부에서, 그리고 북부의 노동 계급 다수에게서 지지를 잃었는데, 법원이 주택 공급 양상 때문에 전교생이 흑인이거나 전교생이 백인인 지역 학교들에 인종이 섞이게 하고자 강제 버스 통학을 명령한 후에 특히 그랬다.

하이에크와 달리 뷰캐넌은, 예컨대 자본주의가 사회적·윤리적 안정성을 영원히 뒤집어버리기 이전의 분명한 역사적 평온 상태에서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흄이 윤리적·사회적 응집력을 믿었던 것처럼 그냥 그렇게 윤리적·사회적 응집력이 믿을 만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공적 논쟁의 초점을 높은 고용률 유지에서 낮은 인플레이션 유지로 이동시키는 데 있어 밀턴 프리드먼(1912~2006)보다 더 큰 역할을 한 경제학자는 없었다. 일류 경제 이론가이자 통화 역사가이기도 한 프리드먼은 어빙 피셔와 마찬가지로, 잘못된 통화 관리가 1920년대 후반의 경기 침체를 10년에 걸친 장기 불황으로 바꾸어놓았다고 보았다. 프리드먼의 주장에 따르면, 올바른 통화 정책을 취하는 것이 정부의 최우선적인 경제적 임무였다.

정치적으로 말해서, 1950년대에 민주당원과 공화당원들은 자유주의적 중도파로 수렴되었다. 존 롤스는 미국이 최우선적인 자유주의적 합의를 근간으로 하는, 관리 가능한 불일치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자유주의 역사학자 하츠와 자유주의적 정치학자 립셋은 미국을 마치 진짜로 그런 나라인 것처럼 다루었고, 이 두 사람만이 이런 식으로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1970년대에 와서는 자유주의와 미국주의의 결합이 믿음을 주기보다는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자유주의와 미국주의 각각이 도전에 직면했다. 좌파에서는 정체성 정치가 민주당의 오랜 루스벨트-트루먼 연합의 분열을 도왔다. 민주당은 국가와 도시보다 피부색, 민족 집단, 젠더에 대해 더 많이 토론하기 시작했다. 우파에서는 도덕 정치가 과거의 소수파를 지배적이고 반자유주의적인 핵심 세력으로 만들면서 공화당을 완고하고 협소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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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자료만 보면 나보니두스는 바빌론 신전의 조직과 경제적 구조를 개혁하고, 이라크 남부에서 지중해로 이어지는 중요한 사막 무역로를 확보한 성공적인 통치자로 평가할 수 있다. 한편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이 바빌론을 정복한 뒤,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기 위해 편향적으로 작성된 기록에는 매우 다른 평가가 실려 있다. 그에 따르면 나보니두스는 무례하고 건방진 자로서 마르두크와 바빌론 주민들을 크게 모욕했기 때문에 고결한 키루스가 이 사악한 자를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크세르크세스가 오래전부터 지속되어 온 에산길라 신전의 사회적·경제적 조직을 와해하고, 신을 섬기는 자들의 권리를 보호하지 않고, 신전공동체의 큰 매력인 오랜 특권을 박탈함으로써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무너뜨린 것은 분명하다. 아시리아 왕들을 좌절시켰던 바빌론의 도시 엘리트들이 장악한 종교적·정치적 권력은 종언을 고했다.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귀족 세력이 와해되면서 페르시아 통치에 대한 바빌론의 오랜 저항은 완전히 무너졌다.

만약 바빌론을 외형적으로는 보수적이며 전통적 특권을 사수하려는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사회로 규정한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바빌로니아의 문화적·인종적 용광로는 시골 지역이었다. 아히캄, 아히카르와 같은 포로 출신들은 사업 기록에 점토판을 활용하거나 아람어 문자를 수용하는 등 새로운 고향 및 이웃의 문화를 받아들이려 했다.

쐐기문자 문화는 에산길라 및 바빌로니아의 다른 신전들에서 살아남았지만, 점차 의례·주술·의식 및 천문학의 용도로만 쓰이게 되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알려진 쐐기문자 텍스트는 천체의 움직임에 대한 관찰 보고서인데, 이는 미래에 대한 신의 설계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했다. 바빌론에서 알려진 가장 마지막 텍스트는 서기 74년에 쓰인 것이고, 우루크의 경우는 몇 년 후인 서기 79년이다.

《바빌론 탈무드》는 서기 3~5세기 사이 이라크 남부와 사산제국 지역에서 유대교 학자들에 의해 편집되었는데, 바빌론이라는 이름은 바빌론 도시뿐 아니라 바빌로니아 전역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지역은 ‘순수한 혈통’으로 여겨졌으며, 이곳의 유대인은 별다른 확인 없이 통혼이 가능하다고 인정되었다. 만다교 서책과 마찬가지로 《바빌론 탈무드》는 고대 바빌론의 징조와 의학 및 주술 지식을 보존하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지식 전수의 통로가 되었다. 한때 철저하게 통제되던 바빌론의 관측천문학과 수리천문학은 이제 고대 세계 전역으로 전파되어 각광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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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김호동 지음 / 사계절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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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의 봉기는 19세기 중반 청제국이 처했던 상황, 또 그러한 상황을 가져온 세계사적인 변화와 연관시킬 때 비로소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났으며 또 어떠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봉기의 가장 결정적인 기폭제는 결국 1862년 섬감 陝甘 지역에서 일어난 회민 봉기의 성공과 그로 인한 청조의 권위붕괴가 가져다 준 충격이었다(p134)... 1864년 신강 무슬림 봉기는 태평천국운동, 섬감의 회민 봉기 등이 표상하는 청조체제의 근본적인 동요 속에서 일어난 현상으로서, 이러한 변화들은 결국 동아시아가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던 변화들이다. _ 김호동,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p135

김호동 (金浩東, 1954 ~ )교수의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Revolution and its failure in modern Central Asia>는 19세기 중반 오늘날 신장 지역에서 약 10년 간 독립국가를 만들었던 신강 무슬림 봉기와 야쿱 벡(Jacob Beg, 1820 ~ 1877)의 카쉬가리아 왕국의 성립과 멸망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분석한 책이다. 약 10여 년에 불과한 이 짧은 시기가 갖는 역사적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다시 청 제국의 일부가 된 신강을 내지와 마찬가지로 '성 省'으로 편입되고 중국의 '불가분할적' 영토의 일부로 바뀌는 조치들이 취해지기 시작했다. 과거와 같이 일리 장군을 필두로 각급 대신 大臣들이 관할하는 군사적 지배, 하킴을 비롯한 현지의 벡 관리들을 활용하는 간접적 지배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곧이어 청조 말기 내지에서 일어난 혼란으로 말미암아 많은 수의 한인 漢人들이 신강으로 이주하기 시작해, 이를 통해 점진적이지만 확고한 '중국화'가 진행되어갔다. _ 김호동,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p343

저자는 본문에서 무슬림 봉기와 야쿱 벡과의 전쟁 전후 청나라의 대(對)신장 지역에 대한 정책이 전면적으로 달라졌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전까지 청나라는 지방 귀족의 자치권을 인정해주고 느슨한 형태의 지배를 실시해왔다. 이러한 형태의 간접 지배 결과 중앙정부는 끝없이 많은 돈을 제국의 안정을 위해 쏟아부어야 했으며, 적지 않은 군대의 주둔도 불가피했다. 그렇지만, 민중의 입장에서 이러한 형태의 구조는 수탈자의 증가에 불과했기에 이에 대한 반발이 1864년 무슬림들의 무장봉기로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간접 지배층 역시 상황에 따라 언제든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 수 있었기에 1864~77년의 혼란이 마무리 된 후 지배형태는 직접 지배 형태로 변화될 수밖에 없었다.

1864년 무슬림 봉기가 있기 전 신강에 있는 청조 관리들이 봉착해 있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경비부족이었다. 매년 150만량 이상을 내지 각성 各省으로부터 보조받지 않으면 안 되는 실정이었으나 1840년대 이후 청조를 위기에 몰아넣은 크고 작은 사건들은 보조금의 지급을 어렵게 만들었다. _ 김호동,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p71

무함마드 카쉬미리의 <승전서 勝戰書>에 의하면 혁명이 일어나기 전 무슬림 농민들에게 부과된 과도한 세금, 특히 청조 관리 -> 통사 通事 -> 무슬림 벡 -> 농민들에게로 내려가면서 그 액수가 점점 더 불어났던 폐습 弊習을 지적하고 이로 인해 가족들이 이산하고 '고향'(vatan)을 버리고 타지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던 비참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_ 김호동,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p96

19세기 후반의 신장 지역의 한(漢)화가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해당 지역의 무슬림 세력과 종교적인 권위는 쇠퇴하고 근대적인 민족(民族)문제가 본격적으로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저자는 이 시기를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시기로 판단한다. 오늘날 우리가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신장-위구르' 지역명 역시 이러한 민족국가 개념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리라.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을 통해 독자들은 신장 지역의 근현대사 단면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신장 위구르 지역 주민에 대한 각종 탄압과 대규모 한족 이주 문제의 기원이 이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과 함께 과거 이 전쟁이 영국-러시아 간의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의 지역전 성격을 띄고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당시 야쿱 벡 정권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던 영국과는 대조적으로 그 정권이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이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그 세력 확장에 대해 일리점령으로 대응했던 러시아 정부로서는 청군에 대한 식량판매를 통해 경제적/정치적 이익을 노리려 했던 것은 아마 당연한 결정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_ 김호동,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p309

글의 마지막은 야쿱 벡의 카쉬가리아 왕국의 마지막을 소개하는 것으로 갈무리하려고 한다. 한 지도자의 외교적 판단이 어떻게 국가의 명운을 좌우하는지 동투르키스탄의 아픈 역사가 잘 보여준다...

조직적인 훈련과 신식장비로 무장한 3만 명 이상의 야쿱 벡 군대가 그렇게 쉽게 궤산된 직접적인 원인에는 야쿱 벡 자신의 결정적인 실책이 있었다. 그는 무슬림 국가의 존립을 위한 최상의 방책이 청과의 군사적 대결이 아니라 외교적 협상에 있다고 보았고 이를 위해 자신의 특사를 런던으로 파견했다. 그는 무슬림 국가의 존속을 희망했던 영국측의 중재노력에 기대를 걸었고 청의 종주권을 인정할 용의도 있음을 밝혔다. 따라서 그 같은 협상을 원만히 타결시키기 위해 가능하면 전선에서 청군과 충돌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함으로써 휘하 군대에 대해 청군에게 발포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좌종당의 군대는 투르판으로 밀려내려왔고, 야쿱 벡의 발포금지 명령으로 아무런 대응책도 취할 수 없었던 무슬림 군대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어버렸다. _ 김호동,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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