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의 자료만 보면 나보니두스는 바빌론 신전의 조직과 경제적 구조를 개혁하고, 이라크 남부에서 지중해로 이어지는 중요한 사막 무역로를 확보한 성공적인 통치자로 평가할 수 있다. 한편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이 바빌론을 정복한 뒤,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기 위해 편향적으로 작성된 기록에는 매우 다른 평가가 실려 있다. 그에 따르면 나보니두스는 무례하고 건방진 자로서 마르두크와 바빌론 주민들을 크게 모욕했기 때문에 고결한 키루스가 이 사악한 자를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크세르크세스가 오래전부터 지속되어 온 에산길라 신전의 사회적·경제적 조직을 와해하고, 신을 섬기는 자들의 권리를 보호하지 않고, 신전공동체의 큰 매력인 오랜 특권을 박탈함으로써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무너뜨린 것은 분명하다. 아시리아 왕들을 좌절시켰던 바빌론의 도시 엘리트들이 장악한 종교적·정치적 권력은 종언을 고했다.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귀족 세력이 와해되면서 페르시아 통치에 대한 바빌론의 오랜 저항은 완전히 무너졌다.

만약 바빌론을 외형적으로는 보수적이며 전통적 특권을 사수하려는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사회로 규정한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바빌로니아의 문화적·인종적 용광로는 시골 지역이었다. 아히캄, 아히카르와 같은 포로 출신들은 사업 기록에 점토판을 활용하거나 아람어 문자를 수용하는 등 새로운 고향 및 이웃의 문화를 받아들이려 했다.

쐐기문자 문화는 에산길라 및 바빌로니아의 다른 신전들에서 살아남았지만, 점차 의례·주술·의식 및 천문학의 용도로만 쓰이게 되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알려진 쐐기문자 텍스트는 천체의 움직임에 대한 관찰 보고서인데, 이는 미래에 대한 신의 설계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했다. 바빌론에서 알려진 가장 마지막 텍스트는 서기 74년에 쓰인 것이고, 우루크의 경우는 몇 년 후인 서기 79년이다.

《바빌론 탈무드》는 서기 3~5세기 사이 이라크 남부와 사산제국 지역에서 유대교 학자들에 의해 편집되었는데, 바빌론이라는 이름은 바빌론 도시뿐 아니라 바빌로니아 전역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지역은 ‘순수한 혈통’으로 여겨졌으며, 이곳의 유대인은 별다른 확인 없이 통혼이 가능하다고 인정되었다. 만다교 서책과 마찬가지로 《바빌론 탈무드》는 고대 바빌론의 징조와 의학 및 주술 지식을 보존하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지식 전수의 통로가 되었다. 한때 철저하게 통제되던 바빌론의 관측천문학과 수리천문학은 이제 고대 세계 전역으로 전파되어 각광받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