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서독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와 빌리 브란트는 각자 두 가지 역사적 임무를 완수했다. 아데나워는 독일 우파를 대체로 자유주의 이상에 관용적인 하나의 민주주의 정당으로 통합했고, 서독을 서방에 안착시켰다. 브란트는 사회민주당을 중도 좌파 집권당으로 만들었고, 전 세계에서 독일에 대한 존중을 회복시켰다.

국내 정치에서, 시민권과 위대한 사회로 인해 민주당은 한 세대 동안 남부의 지지를 잃을 것이라고 존슨은 예견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시간이 반세기 이상 지속되었으니, 그가 너무 적게 추산한 셈이었다. "백인의 반격"으로 민주당은 남부에서, 그리고 북부의 노동 계급 다수에게서 지지를 잃었는데, 법원이 주택 공급 양상 때문에 전교생이 흑인이거나 전교생이 백인인 지역 학교들에 인종이 섞이게 하고자 강제 버스 통학을 명령한 후에 특히 그랬다.

하이에크와 달리 뷰캐넌은, 예컨대 자본주의가 사회적·윤리적 안정성을 영원히 뒤집어버리기 이전의 분명한 역사적 평온 상태에서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흄이 윤리적·사회적 응집력을 믿었던 것처럼 그냥 그렇게 윤리적·사회적 응집력이 믿을 만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공적 논쟁의 초점을 높은 고용률 유지에서 낮은 인플레이션 유지로 이동시키는 데 있어 밀턴 프리드먼(1912~2006)보다 더 큰 역할을 한 경제학자는 없었다. 일류 경제 이론가이자 통화 역사가이기도 한 프리드먼은 어빙 피셔와 마찬가지로, 잘못된 통화 관리가 1920년대 후반의 경기 침체를 10년에 걸친 장기 불황으로 바꾸어놓았다고 보았다. 프리드먼의 주장에 따르면, 올바른 통화 정책을 취하는 것이 정부의 최우선적인 경제적 임무였다.

정치적으로 말해서, 1950년대에 민주당원과 공화당원들은 자유주의적 중도파로 수렴되었다. 존 롤스는 미국이 최우선적인 자유주의적 합의를 근간으로 하는, 관리 가능한 불일치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자유주의 역사학자 하츠와 자유주의적 정치학자 립셋은 미국을 마치 진짜로 그런 나라인 것처럼 다루었고, 이 두 사람만이 이런 식으로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1970년대에 와서는 자유주의와 미국주의의 결합이 믿음을 주기보다는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자유주의와 미국주의 각각이 도전에 직면했다. 좌파에서는 정체성 정치가 민주당의 오랜 루스벨트-트루먼 연합의 분열을 도왔다. 민주당은 국가와 도시보다 피부색, 민족 집단, 젠더에 대해 더 많이 토론하기 시작했다. 우파에서는 도덕 정치가 과거의 소수파를 지배적이고 반자유주의적인 핵심 세력으로 만들면서 공화당을 완고하고 협소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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