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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김호동 지음 / 사계절 / 1999년 11월
평점 :
1864년의 봉기는 19세기 중반 청제국이 처했던 상황, 또 그러한 상황을 가져온 세계사적인 변화와 연관시킬 때 비로소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났으며 또 어떠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봉기의 가장 결정적인 기폭제는 결국 1862년 섬감 陝甘 지역에서 일어난 회민 봉기의 성공과 그로 인한 청조의 권위붕괴가 가져다 준 충격이었다(p134)... 1864년 신강 무슬림 봉기는 태평천국운동, 섬감의 회민 봉기 등이 표상하는 청조체제의 근본적인 동요 속에서 일어난 현상으로서, 이러한 변화들은 결국 동아시아가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던 변화들이다. _ 김호동,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p135
김호동 (金浩東, 1954 ~ )교수의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Revolution and its failure in modern Central Asia>는 19세기 중반 오늘날 신장 지역에서 약 10년 간 독립국가를 만들었던 신강 무슬림 봉기와 야쿱 벡(Jacob Beg, 1820 ~ 1877)의 카쉬가리아 왕국의 성립과 멸망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분석한 책이다. 약 10여 년에 불과한 이 짧은 시기가 갖는 역사적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다시 청 제국의 일부가 된 신강을 내지와 마찬가지로 '성 省'으로 편입되고 중국의 '불가분할적' 영토의 일부로 바뀌는 조치들이 취해지기 시작했다. 과거와 같이 일리 장군을 필두로 각급 대신 大臣들이 관할하는 군사적 지배, 하킴을 비롯한 현지의 벡 관리들을 활용하는 간접적 지배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곧이어 청조 말기 내지에서 일어난 혼란으로 말미암아 많은 수의 한인 漢人들이 신강으로 이주하기 시작해, 이를 통해 점진적이지만 확고한 '중국화'가 진행되어갔다. _ 김호동,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p343
저자는 본문에서 무슬림 봉기와 야쿱 벡과의 전쟁 전후 청나라의 대(對)신장 지역에 대한 정책이 전면적으로 달라졌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전까지 청나라는 지방 귀족의 자치권을 인정해주고 느슨한 형태의 지배를 실시해왔다. 이러한 형태의 간접 지배 결과 중앙정부는 끝없이 많은 돈을 제국의 안정을 위해 쏟아부어야 했으며, 적지 않은 군대의 주둔도 불가피했다. 그렇지만, 민중의 입장에서 이러한 형태의 구조는 수탈자의 증가에 불과했기에 이에 대한 반발이 1864년 무슬림들의 무장봉기로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간접 지배층 역시 상황에 따라 언제든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 수 있었기에 1864~77년의 혼란이 마무리 된 후 지배형태는 직접 지배 형태로 변화될 수밖에 없었다.
1864년 무슬림 봉기가 있기 전 신강에 있는 청조 관리들이 봉착해 있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경비부족이었다. 매년 150만량 이상을 내지 각성 各省으로부터 보조받지 않으면 안 되는 실정이었으나 1840년대 이후 청조를 위기에 몰아넣은 크고 작은 사건들은 보조금의 지급을 어렵게 만들었다. _ 김호동,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p71
무함마드 카쉬미리의 <승전서 勝戰書>에 의하면 혁명이 일어나기 전 무슬림 농민들에게 부과된 과도한 세금, 특히 청조 관리 -> 통사 通事 -> 무슬림 벡 -> 농민들에게로 내려가면서 그 액수가 점점 더 불어났던 폐습 弊習을 지적하고 이로 인해 가족들이 이산하고 '고향'(vatan)을 버리고 타지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던 비참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_ 김호동,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p96
19세기 후반의 신장 지역의 한(漢)화가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해당 지역의 무슬림 세력과 종교적인 권위는 쇠퇴하고 근대적인 민족(民族)문제가 본격적으로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저자는 이 시기를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시기로 판단한다. 오늘날 우리가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신장-위구르' 지역명 역시 이러한 민족국가 개념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리라.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을 통해 독자들은 신장 지역의 근현대사 단면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신장 위구르 지역 주민에 대한 각종 탄압과 대규모 한족 이주 문제의 기원이 이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과 함께 과거 이 전쟁이 영국-러시아 간의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의 지역전 성격을 띄고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당시 야쿱 벡 정권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던 영국과는 대조적으로 그 정권이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이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그 세력 확장에 대해 일리점령으로 대응했던 러시아 정부로서는 청군에 대한 식량판매를 통해 경제적/정치적 이익을 노리려 했던 것은 아마 당연한 결정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_ 김호동,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p309
글의 마지막은 야쿱 벡의 카쉬가리아 왕국의 마지막을 소개하는 것으로 갈무리하려고 한다. 한 지도자의 외교적 판단이 어떻게 국가의 명운을 좌우하는지 동투르키스탄의 아픈 역사가 잘 보여준다...
조직적인 훈련과 신식장비로 무장한 3만 명 이상의 야쿱 벡 군대가 그렇게 쉽게 궤산된 직접적인 원인에는 야쿱 벡 자신의 결정적인 실책이 있었다. 그는 무슬림 국가의 존립을 위한 최상의 방책이 청과의 군사적 대결이 아니라 외교적 협상에 있다고 보았고 이를 위해 자신의 특사를 런던으로 파견했다. 그는 무슬림 국가의 존속을 희망했던 영국측의 중재노력에 기대를 걸었고 청의 종주권을 인정할 용의도 있음을 밝혔다. 따라서 그 같은 협상을 원만히 타결시키기 위해 가능하면 전선에서 청군과 충돌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함으로써 휘하 군대에 대해 청군에게 발포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좌종당의 군대는 투르판으로 밀려내려왔고, 야쿱 벡의 발포금지 명령으로 아무런 대응책도 취할 수 없었던 무슬림 군대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어버렸다. _ 김호동,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p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