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가 음미하려고 하는 더욱 세련된 감정은 주로 두 가지 종류인데, 숭고함의 감정과 아름다움의 감정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감정에서 생겨난 감동은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기분 좋게 angenehm 한다.... 숭고함은 감동시키고, 아름다움은 매료시킨다.(p15)... 숭고한 것은 언제나 반드시 거대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은 작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숭고한 것은 단순한 것이 틀림없고, 아름다운 것은 장식적이고 치장된 것일 수 있다.(p16)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中


 채용된 덕들 adoptierte Tugende은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순수한 덕 die echte Tugend은 숭고하고 존경할 만하다. 우리는 전자의 느낌을 지배하고 있는 심성을 선한 마음씨라 부르고, 그런 마음씨를 가진 부류의 사람들을 마음이 곱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원칙에 따라 덕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고귀한 마음씨를 가졌다고 하며, 그런 사람만을 정의로운 사람이라 부른다.(p31)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中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Beodachtungen u"ber das Gefu"bl Scho"nen und Erbabenen >에서 임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 1724 ~ 1804)는 아름다움과 숭고함이 만들어 내는 감정과 이들의 혼합과 균형이 세상을 어떻게 구성하는가를 설명한다.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 ~ 1797)의 <숭고와 아름다움의 관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A Philosophical Enquiry into the Origin of Ideas of the Sublime and Beautiful>를 떠올리게 하는 책 제목 속에서 우리는 칸트의 미학(美學)을 엿볼 수 있다.


 두 가지 감정을 자기 안에서 하나로 조화시킨 사람들은 숭고함의 감동이 아름다움의 감동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는 점과, 그리고 아름다움에서 비롯한 감동의 수반이나 변형이 없다면 숭고함의 감동도 사라져버리고 그 즐거움 또한 오래 갈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p21)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中


 숭고함이나 아름다움의 그 어떤 성분도 특별히 눈에 띌 만큼 점액질적인 혼합물에 속하지는 않기 때문에, 이 고유한 심성은 우리가 고려하려는 맥락에 속하지 않는다.(p42)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中


 

칸트는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인간의 본성(本性)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고, 이들을 축으로 인간을 성(性),별, 민족(民族) 별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구체적으로 2장 - 인간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숭고함과 아름다움의 성질에 관해 - 에서 인간의 성격은 이들 요소가 어떤 비율로 혼합되는가에 따라 달라지는가를 설명하는데, 칸트의 이러한 설명은 마치 <필레보스 Phile'bos>에서 플라톤(Platon, BC 428 ~ BC 427)이 '좋은 것'을 '즐거움(쾌락)'과 '지혜'의 혼합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한 것을 연상시킨다. 플라톤이 적정한 혼합을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보았듯, 칸트 역시 숭고함과 아름다움의 적절한 조화를 가장 높은 가치로 쳤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에서 숭고함은 아름다움보다 높은 가치를 지닌다. 이 책은 중국의 <주역 周易 >의 영향을 받은 듯 음(陰)과 양(陽)을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이름으로 설명한 느낌을 준다. 이는 칸트보다 한 세대 앞선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 ~ 1716)가 <주역>에 관한 주석을 달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전혀 근거가 없는 추측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하다... 3장 - 여성과 남성의 상호 관계에서의 숭고함과 아름다움의 구별에 관해 - 과 4장 - 숭고함과 아름다움의 열어 감정에 기인하는 한에서의 민족 특성에 관해 - 에 담긴 칸트의 사상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영구평화론 Zum ewigen Frieden. Ein philosophischer Entwurf >의 저자와 같은 저자인가 의심이 갈 정도로' 차별주의자 칸트'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그렇게 기분좋은 일은 아니다. 대체로, 이러한 차별은 당대 유럽 문화의 특성에 원인을 두었겠지만.


 여성을 아름다운 성 das schone Geschlecht이라고 정의한 사람은 어쩌면 그들에게 아첨하고 싶어 했던 것일 수도 있지만, 그는 자신이 믿고 있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적절하게 표현했다.(p51)... 아름다운 성은 남성만큼이나 지성을 갖추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아름다운 지성 ein shoner Verstasnd일 따름이다. 반면에 남성의 지성은 심오한 지성 ein tiefer Verstand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숭고함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 표현이다.(p53)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中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여러 민족들을 생각해볼 때 나는 이탈리아인과 프랑스인은 대개 아름다움의 감정의 측면에서 다른 민족과 구별되고, 독일인과 영국인 그리고 스페인인은 흔히 숭고함의 감정에서 다른 민족들과 구별된다고 생각한다.(p79)... 독일인들은 운 좋게도 숭고함에서나 아름다움에서나 모두 잘 혼합된 감정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숭고함의 감정에서 영국인과 같지 않고, 아름다움의 감정에서 프랑스인과 다르다면, 그런 두 가지 감정들을 결합시키려 할 경우 독일인은 양 자 모두를 넘어서게 될 것이다.(p85)... 아프리카의 니그로는 본래 유치함을 넘어설 만한 감정이라고는 갖고 있지 못하다... 두 인종간의 차이는 본질적이며, 그것은 피부색에서와 마찬가지로 심성의 역량에서도 크게 나타난다.(p93)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中


 독일 남성이 아니면 글을 읽기 심히 불편한 부분이 있고, 여기에 더해 다분히 국뽕 MSG가 물씬 첨가된 느낌을 주는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이 쓰여진 년도가 프로이센이 전성기에 있던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der Grosse, 1712 ~ 1786)의 치세 시기인 1765년도 쓰여진 것임을 생각해본다면, 완전히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당시 프로이센은 7년 전쟁을 통해 떠오르는 신흥강대국이 되고 있었으니, 조국의 미래에 대한 낙관이 칸트에게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동시에, <영구 평화론>은 프로이센이 프랑스에게 연패를 당하고 거의 몰락하던 시기에 쓰여진 저작이라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러한 시대상황이 칸트의 사상에도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이에 대해서는 뒤로 미루고, 여기서는 칸트의 작품 안에 담긴 유럽의 근대사상의 한계와 함께 나아가 일본이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통해 이루려고 했던 탈아입구(脫亞入歐)의 본질을 거칠게나마 그려보는 것으로 그치자.


 [그림] Frederick the Great( 출처 : https://withberlinlove.com/2014/08/03/sunday-documentary-frederick-the-great-and-the-enigma-of-prussia/)


 이 세상에 존재하는 성별 관계를 살펴보면, 오직 유럽인들만이 강력한 경향성의 감각적인 매력을 수많은 꽃들로 장식했으며, 그들만이 그것을 여러 도덕적인 것들과 엮어놓은 비밀을 발견할 것이다.(p94)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中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은 칸트의 저작 중 비교적 쉽게 읽히는 책이다. 그렇기에, 다른 책과 함께 비교해서 읽는 것이 즐겁게 읽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된다. 예를 들면,  이 책에 영향을 준 에드먼드 버크의 <숭고와 아름다움의 관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와 비교해서 읽어도 좋을 듯하다. 또한, 칸트의 생애 내에서는 초기 저작에 속하는 이 책과 비교해서 <판단력 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 >을 보는 것도 의미있을 듯하다. 프랑스 대혁명(1789) 이후 노철학자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에 대한 생각은 과연 얼마나 바뀌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재밌는 지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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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8 15: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08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20-06-08 2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유발 하라리의 <극한의 경험> 그리고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과 함께 읽기를 추천드립니다.
숭고함도 일종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
결국 요즘 주로 드는 생각은 ‘칸트가 죽어야 인류가 산다’는 느낌입니다. ‘ ㅎㅎ

겨울호랑이 2020-06-08 21:23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극한의 경험>은 예전에 읽어보았는데, 숭고함의 측면에서는 미처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을 들으니,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추천해주신 <여행의 기술>은 처음이지만, 곁들어 읽어봐야겠습니다. 추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 면에서 칸트가 근대를 대표하는 인물인만큼 근대를 넘어서기 위해서 칸트를 부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anti-칸트‘가 아닌 합리론과 경험론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서양철학을 대신할 새로운 시대의 철학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도 여겨집니다. ^^:)

북다이제스터 2020-06-08 21:33   좋아요 1 | URL
네ㅎㅎ... 겨울호랑이 님께서 이미 <극한의 경험> 읽으신 거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 나름 ‘극한의 경험’=‘숭고함의 경험’으로 읽어서 기억에 남았던 것 같습니다.
칸트가 오랫동안 합리론과 이성 관련 일련의 책을 쓴 이유 중 하나가 데이비드 흄 이론을 뒤집기 위함이었다는 얘기가 있던데요, 그렇다면 칸트 이론 정반대인 흄 이론만으로도 칸트 대안으로 이미 충분할 것 같습니다. 하여튼 전 칸트가 흄을 극복하지 못 했다고 믿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0-06-08 21:43   좋아요 1 | URL
제가 아직 데이비드 흄의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세히 읽어보지는 못해서 대략의 내용만을 알고 있습니다만,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을 듣고 보니 빨리 읽어보고 싶어 집니다^^:) 다만, 흄이 나중에 회의주의에 빠진 것에 반해 칸트는 이성에 대해 낙관하는 편에 서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칸트의 흄에 대한 반박이 충분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20-06-08 21:46   좋아요 1 | URL
제가 원래 회의주의 책을 좋아하는 탓도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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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세트 - 전5권
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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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Ⅲ―2- 완결
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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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Ⅱ
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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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 2 - 2015년 개역판, 정치경제학비판 자본론 2
카를 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 비봉출판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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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적으로 보아 자본은 생산자본, 화폐자본, 상품자본으로 공간적으로 나란히, 상이한 단계에서, 동시에 존재한다. 그러나 각 부분은 끊임없이 한 단계 또는 하나의 기능적 형태에서 다른 것으로 이행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차례차례로 그 모든 단계 또는 기능적 형태에서 기능하게 된다... 세 순환의 통일 중에서 비로소 총과정의 연속성 - 위에서 말한 중단이 없다 - 이 실현된다. 사회적 총자본은 항상 이 연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과정은 항상 세 순환의 통일을 포함하고 있다.(p124) <자본론 2> 中


 산업자본은 잉여가치 또는 잉여생산물의 취득뿐 아니라 그것의 창조까지도 자기의 기능으로 삼고 있는 유일한 자본의 존재방식이다. 그러므로 산업자본은 생산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조건으로 하며, 그것의 존재는 자본가와 임금노동자 사이의 계급적대를 내포하고 있다. 산업자본이 사회의 생산을 지배함에 따라 노동과정의 기술과 사회적 조직이 변혁되며, 이와 함께 사회의 경제적, 역사적 유형이 변혁된다.(p64) <자본론 2> 中


 <자본론 2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O"conomie 2>에서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 ~ 1883)는 화폐자본의 순환에 대해 상세하게 접근한다. 구체적으로 마르크스는 유통단계에서 나타나는 자본의 모습을 화폐자본, 상품자본, 생산자본의 모습으로 구분하고, 이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사회적 총자본을 구성한다고 보았다. 이 과정에서 마르크스가 제기하는 것은 화폐자본의 문제인데, 구체적으로 화폐자본이 생산자본으로 변화하면서 시작되는 시작점에서 이미 자본주의는 잘못된 출발을 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지적이다.


 M - C(LP+MP), 또는 그것의 일반적 형태 M - C [각종 상품구매의 총계]는 일반적 상품유통의 한 행위인데, 그것은 또한 자본의 독립적 순환의 한 단계로서는 자본가치가 화폐형태에서 생산적 형태로 전환하는 것이며, 더욱 간단히 말해 화폐자본이 생산자본이 전환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고찰되는 자본순환에서는 화폐는 자본가치의 최초 담당자로 나타나며, 따라서 화폐자본은 자본이 투하되는 형태를 대표한다.(p35) <자본론 2> 中


 자본주의 생산은 투하가지의 증식을 목적으로 한다. (산업)자본가는 생산을 통해 투하된 가치보다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한다. 그렇지만, 가치의 창출은 노동력에 의해서만 가능하기에, 순환단계에서는 가치의 이전만이 가능할 뿐이다. 때문에,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구입한 노동력의 대가를 적게 지급함으로써 이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자본론2>의 결론이다. 본문에서는 이에 대한 고찰이 상세하게 이루어지는데, 이번 리뷰에서는 간략하게나마 이를 따라가보도록 하자.


 자본주의적 생산의 주된 동기는 항상 투하가치 capital advanced의 증식인데, 이 가치가 독립적인 형태[즉 화폐형태]로 투하되든 상품으로 투하되든 마찬가지다. (p187) ... 자본가는 자기가 유통에서 인출하는 것보다 적은 가치를 화폐의 형태로 유통에 투입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상품의 형태로 인출한 것[ c+ v ] 보다 더욱 많은 가치 [ c+ v + s]를 상품의 형태로 투입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자본의 인격화, 산업자본가로서만 기능하는 한, 그에 의한 상품가치의 공급은 항상 상품가치에 대한 그의 수요보다 크다... 그가 비싸게 팔 수 있는 것은, 그가 자기의 상품들을 가치 이상으로 팔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상품들의 가치가 그것을 생산하는 데 소요된 요소들의 가치총액보다 더욱 크기 때문이다.(p139) <자본론 2> 中


 자본가계급이 그들의 이윤을 끌어내는 원천은, 노동력의 대가를 그 가치[즉 임금노동자가 노동력의 정상적 재생산에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 이하로 지불하는 방식으로 정상적 임금에서 떼어냄으로써 형성될 것이다. 따라서 정상적 임금이 지불된다면, 산업자본가나 놀고먹는 자본가들에게는 이윤의 어떤 원천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p610) <자본론 2> 中 


  자본의 순환 공식 M - C ... P ... C' - M' 은 자본가에게 자본 순환이 증대된 C', M'을 가져다주는 것을 보여준다. 때문에, 자본가들은 이 순환구조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자하는 유인을 갖는다. 순환구조 내에서 회전시간은 생산시간과 유통시간으로 나뉘는데, 유통시간은 상품의 시공간 이동만을 가능하게 할 뿐이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잉여가치의 창조를 위해 생산시간을 늘리려 한다. 이제 생산으로 들어가보자.


 산업의 순환[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의 가장 분명한 특성 중의 하나는, 한편에서는 생산자본의 구성요소들이 상품시장에서 상품으로 구입되어 끊임없이 갱신되지 않으면 안 되며,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과정의 생산물이 노동과정에서 나와서 상품으로 끊임없이 판매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p137) <자본론 2> 中 


 자본의 순환을 개개의 단일 과정이 아니라 주기적 과정이라고 파악할 때 그것은 자본의 회전이라고 불리다. 이 회전의 시간은 자본의 생산시간과 유통시간의 합계에 의해 결정된다.(p188) <자본론 2> 中


 생산은 생산자본에 의해 이루어진다. 마르크스는 <자본론2>에서 생산자본을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으로 나누고, 생산은 가변자본인 노동력과 자본가 소유의 불변자본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작업이라 보았다. 여기서 노동력의 특성에 대해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즉, 노동력은 불변자본과는 달리 상품으로 소유권이 분리되며, 노동자는 가치 이전 후 화폐형태로 그 대가를 받는데, 자본가에 의한 착취가 이루어진다.


 가치의 형성, 따라서 잉여가치의 창조와 관련하여 생산과정에서 수행하는 기능의 상이성에 의하여, 생산수단과 노동력은, 그것이 투하 자본가치의 존재형태인 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으로 구별된다. 생산수단과 노동력은 생산자본의 구성부분으로서 또 하나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 즉 생산수단은 일단 자본가의 소유로 되기만 하면 생산과정의 외부에서도 그의 자본으로 남아 있지만, 노동력은 생산과정 안에서만 개별자본의 존재형태로 된다는 점이다.(p45) <자본론 2> 中


 노동력은 노동자의 손에서는 자본이 아니라 상품이며, 그리고 노동자가 그것을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팔 수 있는 한 그에게 수입을 가져다준다. 노동력은 팔린 다음에 자본가의 손에서 생산과정 그 자체가 진행되는 동안에 자본으로 기능한다. 여기에서 노동력은 두 가지 목적에 봉사한다. 즉 노동력은 노동자의 손에서는 그 가치대로 팔리는 상품이며, 노동력을 구매한 자본가의 손에서는 가치와 사용가치를 생한하는 힘이다. 그러나 노동자가 자본가로부터 화폐를 받게 되는 것은 그가 자본가에게 자기의 노동력의 사용을 맡겨버린 다음, 즉 그의 노동력이 이미 노동생산물의 가치 중에 실현된 다음의 일이다.(p474) <자본론 2> 中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대가가 화폐라는 점은 자본가들이 형성된 잉여가치를 노동자로부터 가져가는 것을 정당화한다. 유통되지 않은 화폐인 퇴장화폐로 가치는 이전되며, 축적된 예비자금은 노동의 대가로 활용되며 이 순환을 원활하게 한다. 예비자본에 더해 산업예비군까지 존재한다면, 자본가들은 더 저렴한 비용으로 노동력을 살 수 있을 터이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자본론 3>으로 미루도록 하자. 


 잉여가치의 형성은 유일하게 진정한 비밀이지만, 자본가들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투하가치액은 잉여가치에 의하여 증식되지 않는다면 자본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잉여가치는 처음부터 전제되고 있으며, 그것의 존재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잉여가치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잉여가치를 화폐화하기 위한 화폐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것이다.(p406) <자본론 2> 中 

 

 퇴장화폐라는 형태는 유통하지 않는 화폐의 형태며, 유통이 중단되어 화폐형태로 보존되고 있는 화폐의 형태다. 화폐퇴장의 과정 그 자체에 관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모든 상품생산에 공통적인 현상인데, 그것이 목적 그 자체로서 구실한 것은 오직 미발달한 전자본주의적 상품생산에서이다... 퇴장화폐는 화폐자본의 하나의 형태로서 나타나며, 화폐퇴장은 자본축적에 일시적으로 수반하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나타난다.(p98) <자본론 2> 中 


 자본가들은 예비자금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만 똑같은 규모로 사업을 계속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가변자본가치가 화폐형태로 환류하는 것이 빠른가 느린가에 관계없이, 사업을 중단 없이 계속할 수 있기 위해서는 화폐형태의 예비자본이 필요하다.(p558) <자본론 2> 中  


 <자본론 2>에서는 이처럼 추가자본의 투입없이도 자본순환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이러한 순환은 곧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데, 그것은 노동자가 자신 소유의 자본[가변자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필요노동시간과 최소생계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자본은 이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확대된 규모의 재생산으로 끝나는 <자본론 2>는 <자본론 3>에서 어떤 내용이 전개될지를 넌지시 알려준다. 확대재생산이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붕괴로 이어진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다음 과제로 넘기고 일단은 여기서 멈추도록 하자.


 단순재생산에서도 잉여가치의 일부는 생산물로서가 아니라 항상 화폐형태로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현재 있는 화폐량이 퇴장화폐와 유통하는 화폐로 분할되는 비율은 끊임없이 변동하지만, 화폐량은 언제나 퇴장화폐와 유통하는 화폐로 있는 화폐의 합계와 동등하다.(p401)... 노동력과 생산수단에 지출된 유동자본의 화폐형태는 생산물의 판매에 의하여 보충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물 자체의 현물형태에 의하여 보충되며, 따라서 그것의 가치를 화폐형태로 유통에서 끌어냄으로써 보충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 생산된 추가적 화폐에 의하여 보충된다.(p403) <자본론 2> 中 


 확대된 규모의 재생산은 생산물의 절대적 크기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 확대재생산은 상품량이 주어진 경우에는 주어진 생산물의 절대적 크기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 확대재생산은 상품량이 주어진 경우에는 주어진 생산물의 여러 요소들의 조합이나 기능이 달라지는 것을 전제로 할 따름이라는 것, 따라서 가치량으로 보면 먼저 단순재생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변화된 것은 단순재생산의 주어진 요소들의 양이 아니라 그 질적 특성이며, 이 변화가 그 다음의 확대된 규모의 재생산의 물질적 전제다.(p640) <자본론 2> 中 


 <자본론 2>에서 마르크스가 설명한 자본주의 세계의 모습은 다분히 기독교 세계의 비유로 느껴진다. 상품 자본, 화폐 자본, 생산 자본으로 구성된 산업자본과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구성된 하느님의 모습. 이처럼 마르크스의 자본 구분은 기독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as)를 연상시킨다. 또한, 잉여가치의 형성과 관련하여 '처음부터 전제된 잉여가치'의 모습 속에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25 ? ~ 1274)의 제1원인으로서 신(神)을 떠올리게 된다. 또한, 노동으로부터 창출된 잉여가치의 의미는 인간으로부터 신에게로 나아가는 일종의 방향성을 느끼게 되는데, 여기에는 그의 유물론적 사관이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 In Nomine Patris, et Filii, et Spiritus Sancti (출처 : https://medium.com/poets-unlimited/in-nomine-patris-et-filii-et-spiritus-sancti-1d35bc836d07)


 <자본론 2>에서 다루어지는 자본의 모습은 산업자본이다. 때문에, 화폐/금융과 관련해서는 설명의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루돌프 힐퍼딩 (Rudolf Hilferding, 1901 ~ 1941)의 <금융자본론 Das Finanzkapital>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마지막으로, <자본론 2>에서 이루어진 고전학파 경제학자 스미스(Adam Smith, 1723 ~ 1790)와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 1772~1823)의 비판을 옮기면서 리뷰를 갈무리한다...  


 스미스가 알아야 할 것은, 동일한 물건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자본의 운동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치 여하에 따라 고정자본(노동수단, 생산자본의 요소들)으로서 기능할 수도 있고 '유동'자본, 상품자본(생산영역에서 유통영역으로 밀려나오는 생산물)으로서 기능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p235)... 스미스는 그가 제기하고 있는 예에서 '생산도구'를 고정자본으로 규정하고, 임금과 [보조재료를 포함한] 원료에 투하된 자본부분(생산물의 가격에 의해 이윤과 함께 회수된다)을 유동자본으로 규정하고 있다.(p236) <자본론 2> 中


 부르주아 경제학은 임금에 투하되는 자본부분을, 원료에 투하되는 자본부분과 전혀 구별하지 않고 있으며, 오직 형식적으로만 - 즉 자본이 생산물에 의하여 일부분씩 유통되는가 또는 한꺼번 유통되는가 하는 점에서만 - 불변자본과 구별한다. 이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의, 따라서 또 자본주의적 착취의 현실적 운동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기초가 없어져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오직 투하가치의 재현이 문제로 되고 있을 뿐이다.(p268)... 리카도는 바턴과 마찬가지로 가변자본, 불변자본 사이의 비율과 유동자본, 고정자본 사이의 비율을 계속 혼동하고 있다.(p277) <자본론 2>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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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7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07 1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20-06-07 16: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윗 글에 단 하나의 전제 조건이 있더라구요.
자본에 소유권이 없어야 한다.
근본적으로 자본에 소유권이 있는 자본주의에서는 통용되기 힘든 주장일 수 있기에 마르크스가 소유권 철폐를 주장한 것 같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0-06-07 17:14   좋아요 2 | URL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처럼 노동을 상품화하는 가변자본과는 달리 감가상각분으로 가치이전 하는 불변자본은 생산구조 내에서 충돌하고, 이러한 충돌이 계급간 착취의 형태로 나타나기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만드시 몰락한다고 예언했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이후 체제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의한 생산수단 공유라는 주장이 등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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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내주신 설계 의뢰 편지를 기쁜 마음으로 읽어보았어요. 오랜만에 직접 손으로 쓴 의뢰 편지를 받아서 그런지 가슴속에 등불이 켜진 듯이 따뜻한 기분을 느끼면서 여러 번 되풀이해 읽어보았습니다(p33)... 손으로 쓴 편지에서는 글쓴이의 체온과 숨결이 분명하게 전달되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점을 느끼는 것이 설계할 때 중요한 단서가 될 듯싶고요.(p34)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 中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 パン屋の手紙: 往復書簡でたどる設計依賴から建物完成まで >에서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후미 (中村 好文)는 빵집 주인 진 도모노리 (神 幸紀)로부터 빵 가게의 설계를 수락하면서, 그의 손 편지에 깊은 감동을 받았음을 밝힌다. 주택 건축가인 나카무라에게 주택의 의미는 단순한 생산품이 아닌, 사람과 사람의 신뢰의 축적물이기에, 정성어린 의뢰인의 손 편지는 더욱 남달랐을 것이다. 또한, 의뢰인 진에게도 자신의 집 옆에 있는 빵 가게는 소중한 곳이기에, 그 역시 간절하게 자신과 뜻이 맞는 이를 만나고 싶었을 것이다. 이러한 진의 마음은 르 코르뷔지에 (Le Corbusier, 1887 ~ 1965)가 잘 표현한 듯하다. 


 설계 의뢰자와 건축가 사이에는 무엇보다도 서로의 마음이나 입장을 존중하고 경의를 표하는 신뢰관계가 쌓여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손으로 쓴 편지가 큰 도움이 되었다.... 담백한 마음으로 편지를 주고받은 행위를, 하나하나 돌을 쌓아올리는 석조건축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별다른 특징이 없는 돌이지만 그것들이 쌓이고 나면 견고하고 존재감이 있는 건물이 된다.(p6)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 - 머리말 - 中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소유의 안전하고 영구적인 집에서 안주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 꿈이 도저히 실현 불가능할 때, 사람들은 감정적 히스테리를 일으키기도 한다. 자신의 집을 짓는다는 것은 마치 유언을 남기는 것과 흡사하다(p235)... 내 집을 짓는 때가 왔을 때, 그것은 석공이나 기술자의 시간이 아니라 자기의 인생에서 최소한 하나의 시 詩를 짓는 시간이다... 왜냐하면 집은 경력의 완성이며... 생활로 인해 많이 늙고 지쳐 류머티즘과 죽음... 그리고 가당치 않은 생각에 사로잡혀 버리는 바로 그 순간이기 때문이다.(p237) <건축을 향하여> 中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 결혼을 하더라도 좋은 시절이 없는 것처럼, 이들의 작업기간에도 갈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한 번뿐이었지만, 이들의 작은 어긋남은 건축 철학과 관련된 부분이었기에 큰 문제로 발전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처음의 만남처럼 편지를 통해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해 나간다.


 그동안에 주고받은 편지를 찬찬히 다시 읽어보니 설계나 공사 내용에 대해서 의견이 대립했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딱 한 번 사소한 갈등이 있었던 것 외에는 대체로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점차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신뢰관계가 착실하게 구축되어갔다.(p5)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 - 머리말 - 中


 저는 건축가이니 역시 구조, 성능, 사용하기 편리한 정도나 내구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요.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기능성이나 합리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에요. 그리고 이와 같은 기능성이나 합리성이 뒷받침된 건축이야말로 '아름답다'는 신념이 제 속에 있고요... 여기서 잠시 멈춰서서 생각해보면, 혹시 도모노리 씨와 마리 씨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분위기의 건축' '화장의 건축'이 아닐까 하는 점이에요. 이런 관계로 저는 '오래된 느낌' '소박한 느낌' '작은 집다운 모습'을 내기 위해 연출하는 것 역시 본말전도가 아닐까 생각해요. 이것도 일종의 '화장'이기 때문이죠. 이 점을 확실하게 이해해주었으면 해요.(p132)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 中


 건축가의 건축철학과 의뢰인의 방향이 맞지 않는 상황에서 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상대에게 충분히 내보이며, 이해를 구한다. 오해를 풀고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더 신뢰관계를 다져가는 모습 속에서, 짧은 건축기간이 인생의 축소판임을 깨닫게 된다. 결혼을 통해 부부가 되어 각자의 삶을 지어내는 것도 긴 건축작업이기에, 각자의 삶의 철학을 이해하고 대화를 통해 완성해 가는 것이 부부에게 주어진 미션(mission)이 아닐까.


 '분위기의 건축' '화장의 건축'이란 말을 들으니 가슴 한구석이 찔립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저의 질문은 깊은 의미가 담긴 말이 아니라 나카무라 선생님이 설계한 건물의 그 부분이 좋다는, 결국 표충적인 질문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굳이 이렇게까지 엄하게 지적해주시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나카무라 선생님과의 사이에 틈이 생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오히려 나카무라 선생님의 감각에 가까워지고 싶고 더욱 더 배우고 싶은 마음이지요.(p135)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 中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를 통해서 결혼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면, 다른 한 편으로 포스트 코로나(Post Corona) 시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전염병의 확산으로 인해 맞게 된 비대면(Un Contact)의 시대. 이 사태 이후에 분명 사회는 5G를 기반으로 자율주행, 드론을 활용한 무인택배, 사물인터넷(IoT), 로봇을 활용한 제조업, 의료제도 개편 등의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가 우리에게 긍정적일까? 현재까지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이 언택트 사회에서 유일하게 이득을 보는 존재는, 매년 베르사유궁에 초대되는 IT 스타트 기업과 대기업인 셈이다. 아직 인터넷 기기를 사용하지 않고 있는 인구도 수백만 명이나 되지만, 전 세계가 '초연결 사회'로 진입하는 광경을 지켜보는 에릭 슈미트 전 구글 회장은 지난 5월 10일, 그는 미국 CBS 뉴스 방송에서 "코로나 사태로 인한 자가격리 기간 동안 우리는 10년을 앞서 성장했다. 이제 인터넷을 쓰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로 중요해졌다. 인터넷 없이는 일도, 일상생활도 불가능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만약, 그러한 삶이 우리에게 바람직하지 않다면, 우린 다른 길을 살펴봐야할 것이다.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에서는 자신의 꿈을 혼자 힘으로는 이룰 수 없기에, 건축가의 힘을 빌려 함께 만들어가는 의뢰인과 건축가의 모습이 그려진다. 건축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분업의 원칙에 따라 움직이지만, 그가 작업을 수행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단순한 이기심이 아닌, 감정(sentiment)의 발로라는 사실은 자본주의의 기원을 애덤 스미스 (Adam Smith, 1723 ~ 1790) 의 <국부론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보다 먼저 쓰여진 <도덕감정론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으로 올라가야함을 일깨운다. 이들 두 권의 책을 종합해서 보면, 애덤 스미스에게 이기심은 타인의 동감을 끌어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인간이 이기적이라 할지라도, 타인의 행/불행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요인, 원리가 인간의 본성 속에 명백히 내재하여 있다... 타인의 슬픔을 보고 슬픔을 함께 느끼는 감정의 존재는 증명을 요하지 않는 하나의 명백한 사실이고, 그 사람이 얼마나 선하냐 유덕하냐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 본원적 감정의 하나이다.(p672) <도덕감정론> 中


 인간은 항상 다른 동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 단지 그들의 선심에만 기대해서는 그 도움을 받을 수 없다. 그가 만약 그들의 자애심(自愛心, self-love)이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발휘되도록 할 수 있다면, 그래서 자기가 그들에게 해주기를 요구하는 일을 그들이 자기에게 해주는 것이 그들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설득할 수 있다면, 그들의 도움을 얻으려는 그의 목적은 더 효과적으로 달성될 것이다.(p18) <국부론 (상)> 中


 우리가 매일 식사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과 양조장 주인, 그리고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그들의 고려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한 고려에서 그는 활과 화살의 제조를 그의 주된 업무로 삼게되며, 그리하여 그는 일종의 무기 제조자가 된다. 그는 이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자기에에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노동생산물 중 자기 자신의 소비를 초과하는 잉여부분 모두를 타인의 노동생산물 중 자기가 필요로 하는 부분과 확실히 교환할 수 있다는 사실은, 각자로 하여금 특정 직업에 종사하여 그 특정 직업에 적합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능과 자질을 개발하고 완벽하게 만들도록 장려한다.(p19) <국부론 (상)> 中


 아직도 코로나 19의 확진자가 계속 발생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전염병에 대한 공포가 가져온 변화가 우리에게 더 큰 위협이 된다면, 우리는 인간과 공동체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물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 <국부론>의 빵집 주인의 이기심에서 발현된 사회적 분업이 산업화, 자동화라는 극단으로 치닫는 현실에서 우리는 초심(初心)으로 돌아가 동감(同感)과 우리의 공동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닐까. 코로나 19가 던져준 이러한 물음에 대해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에 담긴 삶의 모습은 이에 대한 답을 넌지시 던져주는 듯하다.

 

 가장 개인적인 것은 한 사람이 간직한 자신만의 비밀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가장 개인적인 것은 개인이라는 테두리를 부수고 나눔을 요구하며, 나아가 나눔 자체로 긍정되기 때문이다. 그 나눔에서 공동체가 비롯되고, 그 나눔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다.(p40) <밝힐 수 없는 공동체> 中


PS.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 속에서 <도덕감정론>, <국부론>의 내용을 떠올릴 수 있다면, 빵집 시리즈의 연장선상에서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田舍のパン屋が見つけた「腐る經濟」>는 주제면에서 좋은 생각할 거리를 준다하겠다... <자본론> 리뷰를 채 마무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페이퍼를 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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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6 12: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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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6 20: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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