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주신 설계 의뢰 편지를 기쁜 마음으로 읽어보았어요. 오랜만에 직접 손으로 쓴 의뢰 편지를 받아서 그런지 가슴속에 등불이 켜진 듯이 따뜻한 기분을 느끼면서 여러 번 되풀이해 읽어보았습니다(p33)... 손으로 쓴 편지에서는 글쓴이의 체온과 숨결이 분명하게 전달되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점을 느끼는 것이 설계할 때 중요한 단서가 될 듯싶고요.(p34)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 中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 パン屋の手紙: 往復書簡でたどる設計依賴から建物完成まで >에서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후미 (中村 好文)는 빵집 주인 진 도모노리 (神 幸紀)로부터 빵 가게의 설계를 수락하면서, 그의 손 편지에 깊은 감동을 받았음을 밝힌다. 주택 건축가인 나카무라에게 주택의 의미는 단순한 생산품이 아닌, 사람과 사람의 신뢰의 축적물이기에, 정성어린 의뢰인의 손 편지는 더욱 남달랐을 것이다. 또한, 의뢰인 진에게도 자신의 집 옆에 있는 빵 가게는 소중한 곳이기에, 그 역시 간절하게 자신과 뜻이 맞는 이를 만나고 싶었을 것이다. 이러한 진의 마음은 르 코르뷔지에 (Le Corbusier, 1887 ~ 1965)가 잘 표현한 듯하다. 


 설계 의뢰자와 건축가 사이에는 무엇보다도 서로의 마음이나 입장을 존중하고 경의를 표하는 신뢰관계가 쌓여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손으로 쓴 편지가 큰 도움이 되었다.... 담백한 마음으로 편지를 주고받은 행위를, 하나하나 돌을 쌓아올리는 석조건축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별다른 특징이 없는 돌이지만 그것들이 쌓이고 나면 견고하고 존재감이 있는 건물이 된다.(p6)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 - 머리말 - 中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소유의 안전하고 영구적인 집에서 안주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 꿈이 도저히 실현 불가능할 때, 사람들은 감정적 히스테리를 일으키기도 한다. 자신의 집을 짓는다는 것은 마치 유언을 남기는 것과 흡사하다(p235)... 내 집을 짓는 때가 왔을 때, 그것은 석공이나 기술자의 시간이 아니라 자기의 인생에서 최소한 하나의 시 詩를 짓는 시간이다... 왜냐하면 집은 경력의 완성이며... 생활로 인해 많이 늙고 지쳐 류머티즘과 죽음... 그리고 가당치 않은 생각에 사로잡혀 버리는 바로 그 순간이기 때문이다.(p237) <건축을 향하여> 中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 결혼을 하더라도 좋은 시절이 없는 것처럼, 이들의 작업기간에도 갈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한 번뿐이었지만, 이들의 작은 어긋남은 건축 철학과 관련된 부분이었기에 큰 문제로 발전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처음의 만남처럼 편지를 통해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해 나간다.


 그동안에 주고받은 편지를 찬찬히 다시 읽어보니 설계나 공사 내용에 대해서 의견이 대립했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딱 한 번 사소한 갈등이 있었던 것 외에는 대체로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점차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신뢰관계가 착실하게 구축되어갔다.(p5)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 - 머리말 - 中


 저는 건축가이니 역시 구조, 성능, 사용하기 편리한 정도나 내구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요.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기능성이나 합리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에요. 그리고 이와 같은 기능성이나 합리성이 뒷받침된 건축이야말로 '아름답다'는 신념이 제 속에 있고요... 여기서 잠시 멈춰서서 생각해보면, 혹시 도모노리 씨와 마리 씨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분위기의 건축' '화장의 건축'이 아닐까 하는 점이에요. 이런 관계로 저는 '오래된 느낌' '소박한 느낌' '작은 집다운 모습'을 내기 위해 연출하는 것 역시 본말전도가 아닐까 생각해요. 이것도 일종의 '화장'이기 때문이죠. 이 점을 확실하게 이해해주었으면 해요.(p132)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 中


 건축가의 건축철학과 의뢰인의 방향이 맞지 않는 상황에서 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상대에게 충분히 내보이며, 이해를 구한다. 오해를 풀고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더 신뢰관계를 다져가는 모습 속에서, 짧은 건축기간이 인생의 축소판임을 깨닫게 된다. 결혼을 통해 부부가 되어 각자의 삶을 지어내는 것도 긴 건축작업이기에, 각자의 삶의 철학을 이해하고 대화를 통해 완성해 가는 것이 부부에게 주어진 미션(mission)이 아닐까.


 '분위기의 건축' '화장의 건축'이란 말을 들으니 가슴 한구석이 찔립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저의 질문은 깊은 의미가 담긴 말이 아니라 나카무라 선생님이 설계한 건물의 그 부분이 좋다는, 결국 표충적인 질문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굳이 이렇게까지 엄하게 지적해주시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나카무라 선생님과의 사이에 틈이 생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오히려 나카무라 선생님의 감각에 가까워지고 싶고 더욱 더 배우고 싶은 마음이지요.(p135)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 中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를 통해서 결혼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면, 다른 한 편으로 포스트 코로나(Post Corona) 시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전염병의 확산으로 인해 맞게 된 비대면(Un Contact)의 시대. 이 사태 이후에 분명 사회는 5G를 기반으로 자율주행, 드론을 활용한 무인택배, 사물인터넷(IoT), 로봇을 활용한 제조업, 의료제도 개편 등의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가 우리에게 긍정적일까? 현재까지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이 언택트 사회에서 유일하게 이득을 보는 존재는, 매년 베르사유궁에 초대되는 IT 스타트 기업과 대기업인 셈이다. 아직 인터넷 기기를 사용하지 않고 있는 인구도 수백만 명이나 되지만, 전 세계가 '초연결 사회'로 진입하는 광경을 지켜보는 에릭 슈미트 전 구글 회장은 지난 5월 10일, 그는 미국 CBS 뉴스 방송에서 "코로나 사태로 인한 자가격리 기간 동안 우리는 10년을 앞서 성장했다. 이제 인터넷을 쓰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로 중요해졌다. 인터넷 없이는 일도, 일상생활도 불가능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만약, 그러한 삶이 우리에게 바람직하지 않다면, 우린 다른 길을 살펴봐야할 것이다.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에서는 자신의 꿈을 혼자 힘으로는 이룰 수 없기에, 건축가의 힘을 빌려 함께 만들어가는 의뢰인과 건축가의 모습이 그려진다. 건축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분업의 원칙에 따라 움직이지만, 그가 작업을 수행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단순한 이기심이 아닌, 감정(sentiment)의 발로라는 사실은 자본주의의 기원을 애덤 스미스 (Adam Smith, 1723 ~ 1790) 의 <국부론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보다 먼저 쓰여진 <도덕감정론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으로 올라가야함을 일깨운다. 이들 두 권의 책을 종합해서 보면, 애덤 스미스에게 이기심은 타인의 동감을 끌어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인간이 이기적이라 할지라도, 타인의 행/불행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요인, 원리가 인간의 본성 속에 명백히 내재하여 있다... 타인의 슬픔을 보고 슬픔을 함께 느끼는 감정의 존재는 증명을 요하지 않는 하나의 명백한 사실이고, 그 사람이 얼마나 선하냐 유덕하냐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 본원적 감정의 하나이다.(p672) <도덕감정론> 中


 인간은 항상 다른 동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 단지 그들의 선심에만 기대해서는 그 도움을 받을 수 없다. 그가 만약 그들의 자애심(自愛心, self-love)이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발휘되도록 할 수 있다면, 그래서 자기가 그들에게 해주기를 요구하는 일을 그들이 자기에게 해주는 것이 그들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설득할 수 있다면, 그들의 도움을 얻으려는 그의 목적은 더 효과적으로 달성될 것이다.(p18) <국부론 (상)> 中


 우리가 매일 식사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과 양조장 주인, 그리고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그들의 고려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한 고려에서 그는 활과 화살의 제조를 그의 주된 업무로 삼게되며, 그리하여 그는 일종의 무기 제조자가 된다. 그는 이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자기에에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노동생산물 중 자기 자신의 소비를 초과하는 잉여부분 모두를 타인의 노동생산물 중 자기가 필요로 하는 부분과 확실히 교환할 수 있다는 사실은, 각자로 하여금 특정 직업에 종사하여 그 특정 직업에 적합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능과 자질을 개발하고 완벽하게 만들도록 장려한다.(p19) <국부론 (상)> 中


 아직도 코로나 19의 확진자가 계속 발생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전염병에 대한 공포가 가져온 변화가 우리에게 더 큰 위협이 된다면, 우리는 인간과 공동체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물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 <국부론>의 빵집 주인의 이기심에서 발현된 사회적 분업이 산업화, 자동화라는 극단으로 치닫는 현실에서 우리는 초심(初心)으로 돌아가 동감(同感)과 우리의 공동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닐까. 코로나 19가 던져준 이러한 물음에 대해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에 담긴 삶의 모습은 이에 대한 답을 넌지시 던져주는 듯하다.

 

 가장 개인적인 것은 한 사람이 간직한 자신만의 비밀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가장 개인적인 것은 개인이라는 테두리를 부수고 나눔을 요구하며, 나아가 나눔 자체로 긍정되기 때문이다. 그 나눔에서 공동체가 비롯되고, 그 나눔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다.(p40) <밝힐 수 없는 공동체> 中


PS.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 속에서 <도덕감정론>, <국부론>의 내용을 떠올릴 수 있다면, 빵집 시리즈의 연장선상에서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田舍のパン屋が見つけた「腐る經濟」>는 주제면에서 좋은 생각할 거리를 준다하겠다... <자본론> 리뷰를 채 마무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페이퍼를 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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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6 12: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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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6 20: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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