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는 일정한 법이 있는데 짐이 어찌 감히 어기겠는가! 중간에 그것이 사실이 아닌 까 의심하여 가까운 신하로 하여금 감옥으로 가서 바른대로 묻도록 하였는데, 그들이 손으로 쓴 상황을 얻어 보면 모두 스스로 승복(承服)하였으니, 짐(朕)이 의심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묵철(??)이 조정에 편지를 보내어 헤아리며 말하였다.
"우리에게 삶은 곡식의 종자를 주어서 이를 심었으나 싹이 트지 않았으니 첫 번째이다. 금과 은으로 된 그릇은 모두 거리에 넘쳐나는 것이어서 진귀한 물건이 아니니 두 번째이다. 내가 사신에게 준 붉은 자색의 의복을 모두 빼앗았으니 세 번째이다. 명주와 비단은 모두 거칠고 나쁘니 네 번째이다. 나 가한(可汗)의 딸은 마땅히 천자의 아들에게 시집을 가야하며, 무씨(武氏)는 작은 성(姓)이어서 집안으로서 짝이 아닌데도 속이고 무릅쓰면서 혼인하려 하였으니 다섯째이다. 나는 이것 때문에 병사를 일으켜서 하북(河北, 황하 북쪽)을 빼앗고자 할 뿐이다."

태후가 명하여 그를 앉게 하고 묻자, 길욱이 말하였다.
"물과 흙을 섞으면 진흙이 되었다고 하여 다툼이 있겠습니까?"
태후가 대답하였다. "없다."
또 말하였다. "나누어 반은 부처로 하고, 반은 천존(天尊)으로 하면 다툼이 있겠습니까?"
대답하였다. "다툼이 있다."
길욱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종실과 외척은 각각 그 분수를 맡게 된다면 천하가 편안합니다. 지금 태자가 이미 세워졌는데도 외척(外戚)을 오히려 왕으로 삼으셨으니, 이는 폐하께서 그들을 몰아서 훗날에 반드시 다툼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며, 둘 다 편안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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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격적인 공포다. 앞으로 십 년이라니, 죽음이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고 방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것 같은 공포, 새까만 죽음의 심연, 죽음이라는 것, 악취 때문에 염도 제대로 못했다는 말이 비로소 자신의 죽음과 결부되어 되살아난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홍씨의 악령 때문에 무서웠지만 지금은 자신의 죽음 자체와 밀착되어 몸이 떨려오는 것이다. 조준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는다. 가슴이 뛰고 끈적끈적한 땀이 전신에 흐른다. _ 박경리, <토지 12> , p338/590


 지난 7월1일부터 시작했던 토지독서챌린지. 연말이면 전체 일정의 60% 정도 지나게 된다. 토지 3부 4권(12권)을 마무리지으며 가장 인상 깊은 장면/대목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삶에의 의지', '생명(生命)의 약동'이라 여겨진다. 12권 이전에는 '삶'에 대비되는 '죽음' 이 인물의 퇴장 - 월선, 최치수 등 - 과 한 인물의 의지를 보여주는 도구 - 구천, 금녀 등 - 로 비장하게 묘사되었던 반면, 삶에 대한 내용은 그렇게 인상 깊게 다가오지 않았다. 설사 그려졌다 해도 임이네의 억척스러운 면으로 나타났기에 '죽음'에 비해 '삶'의 모습이 상대적으로 부정적으로 다가왔었다.


그렇지만, 3부 4권에서는 산 자들의 고뇌와 처절한 몸부림이 잘 묘사되면서 '죽지 않기 위해 고민하는 삶의 아름다움'이 표현된다. 조준구, 홍이, 명희가 각자 직면한 현실과 이를 넘기 위한 이들의 노력. 이러한 묘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 1859~1941)의 엘랑 비탈(elan vital 생명의 약동)을 떠올리게 된다.


 불구자로서의 번민이나 부모가 자식에게 가한 수모, 천지간에 맘도 몸도 기댈 수 없었던 처절한 고독, 그것은 병수 자신을 위한 목마름이었지만 그 목마름 같은 것을 누르고도 남을 크나큰 고통은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의식이었다. 부모의 큰 죄는 바로 자신의 죄요, 부모의 악업으로 얻은 재물로 자신이 연명되고 있다는 그 뼈를 깎는 고통, 더러운 곡식을 아니 먹으려고 수없이 기도했던 자살, 그러나 생명에의 집착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포기하였고 더러운 물 더러운 곡기를 미친 듯 빨아당기지 아니했던가. 병수는 죽지 못하는 치욕 때문에 미쳐 날뛰었다. _ 박경리, <토지 12> , p346/590


 아우성이다. 부서지는 파도다. 격렬한 감정이 출구를 찾듯 아우성이다. 그러나 이상현에 대한 그리움은 아니었다. 조용하에 대한 증오도 아니었다. 자신의 생명, 생명의 불꽃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기나긴 숨결, 부패의 늪에서 몸을 일으키고 싶은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12> , p420/590


 삶을 이어가려는 자신의 본능과는 달리 자신을 조여오는 주위 환경. 자신을 위협하며 조여오는 자연/사회의 위협에 대응하여 살기 위해 생명체들은 힘(에너지)를 쌓고 마치 연어가 거센 물살을 거스르며 상류로 올라가듯 흐름에 역행한다. 열역학 법칙으로 대표되는 자연의 법칙에 거스르며 살아있음을 존재하는 연어의 움직임은 <토지>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심지어 악인(惡人) 조준구의 행동도 그의 독백을 통해 우리에게 개연성있는 행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생명의 약동을 갖고 있기 때문일까.

 

 우리가 말하는 생명의 약동은 요컨대 창조의 요구로 이루어진다. 그 약동은 절대적인 방식으로 창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물질을, 즉 자신과 반대되는 운동을 목전에서 만나기 때문이다.(p375)... 동물이든 식물이든 생명 전체는 그 본질적인 점에서 에너지를 축적하고 다음에는 그것을 유연하고 변형가능한 관(管) 속에 풀어 놓으려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이 관들의 끝에서 생명은 무한히 다양한 일들을 수행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생명의 약동(엘랑 비탈)이 물질을 관통하면서 단번에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p379)... 종 種은 자신만을 생각하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간다. 그로부터 자연이라는 무대에서 무수한 투쟁이 유래한다. 또한 놀랍고도 충격적인 부조화도 거기서 유래한다. 그러나 그에 대해 생명 원리 자체에 책임이 있다고 해서는 안 된다. _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 p380


  주변 환경과 인물들간의 갈등. 그리고 이로부터 드러나는 생명의 모습. 그렇다면, 이러한 갈등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다소 대립되는 입장에 서 있는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와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1825~1895)의 내용을 거칠게나마 조합해보자면 인물들 주위환경은 엔트로피(entropy)법칙과 같은 자연 법칙이 지배하는 반면,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은 이와 무관하게 작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토지>안에서는 최참판 댁의 자산을 탐하는 조준구의 욕망도, 결혼을 통해 신분 상승을 기대했던 명희의 속내도 이러한 갈등의 결과가 아니었을런지.  


 

 현재의 모든 사건에서 그러한 것처럼 태초로부터 모든 작용력들이 여러 힘으로 분해되어 영속적으로 더욱 복잡성을 창출한다는 것도 예상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복잡성의 증가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이 틀림없다. 진보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고, 인간이 좌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유익한 필수과정이다._ 허버트 스펜서, <진보의 법칙과 원인>, p90


 엄청나게 다양한 본성들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 사이에는 모두가 인정하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으니,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하려는 타고난 욕망을 지닌다는 점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인간은 자신이 태어난 사회의 안녕과는 무관하게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하고 싶어 한다... 모든 인간은 외부 자연 상태와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필수적인 조건인 '생명의 욕구', 즉 끝없이 만족을 갈구하는 경향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이기적인 경향이 사회 내부에서 자유롭게 발휘되도록 내버려 둔다면, 이는 그 사회를 파괴하는 확실한 동인이 된다. _ 토마스 헉슬리, <진화와 윤리> , P 40/173


 스펜서와 헉슬리의 이러한 일부 가정들은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에서 대략적으로 합류(合流)되는 느낌을 받는다. 생명 진화 자체는 법칙으로 작용하지만, 생명체는 우연성이 작용한다는 베르그송의 논리를 통해 일제하 식민시대라는 거대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저마다 생존을 위해 움직이는 생명의 약동을 <토지>의 인물들을 통해확인하며 2021년 토지 독서 챌리지 마지막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단일성과 다수성은 무기물질의 범주들이며 생명의 약동은 순수한 단일성도 다수성도 아니라는 것, 그리고 생명의 약동이 물질에 전달되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게 되어도 그 선택은 결코 결정적인 것이 아니리라는 것이다. 약동은 전자에서 후자로 무한히 도약할 것이다. 그러므로 개체성과 연합이라는 두 방향으로 진행되는 생명의 진화는 전혀 우연적인 요인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생명의 본질 자체에 기인하는 것이다 (P388)... 사실상 생명체는 행동의 중심이다. 그것은 세계 안에 도입되는 일정량의 우연성 contingence, 즉 일정량의 가능적 행동이다. 그 양은 개체들에 따라 특히 종들에 따라 변화 가능하다. _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 P390


ps. 개인적으로 '엘랑비탈'을 느낄 때는 아침에 휴대폰 알람 소리를 들을 때가 아닐까 싶다. 침대에서 더 늦게까지 자고 싶어지는 마음이 자연의 법칙이라면, 먹고 살기 위해 눈을 뜨는 행동은 이에 반(反)하는 생명의 약동이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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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외부 자연 상태와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필수적인 조건인 ‘생명의 욕구’, 즉 끝없이 만족을 갈구하는 경향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이기적인 경향이 사회 내부에서 자유롭게 발휘되도록 내버려 둔다면, 이는 그 사회를 파괴하는 확실한 동인이 된다.

사회적 진보가 진행될수록 그 구성원들과 동료들의 관계는 가까워지며,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통해 얻어지는 기쁨과 고통의 중요성은 커진다. 우리는 자신의 공감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판단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판단한다.

인간 사회 전체의 기본적인 결속력을 형성해 주는 이 감성은 결국 우리가 양심이라고 부르는 한 사회의 조직적인 공감 또는 개인적으로 체화되는 공감으로 진화하게 된다. 나는 그 진화 과정에 윤리(적) 과정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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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생리학자들이 유기체의 발달 법칙이라고 생각하던 것이 만물에 공통되는 발달의 법칙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보였다. 연속적인 분화 과정을 통해서 간단함에서 복잡함으로 가는 변화는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원시 우주의 변화와 비슷하게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귀납적으로 초기의 변화를 추정할 수 있다.

이런 균일한 과정으로부터 이 법칙이 결과로 가져오는 근본적인 필연을 추정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모든 과정을 관통해서 결정하는 원칙을 이성으로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법칙(law)의 보편성이 보편적인 원인(cause)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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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중요한 것은 엘랑 비탈의 개념이 『창조적 진화』의 마지막 말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책의 3장 말미에 이르러 베르그손은 궁극적으로 운동의 개념을 통해 생명과 물질의 전개과정을 통일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엘랑 비탈이라는 표현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초반부에 물질과 뚜렷이 구분되는 생명의 특성을 제시하기 위해 등장한 일종의 가설이다.

마치 『물질과 기억』이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에서 출발함을 명확히 표명하면서도 말미에 가서는 운동의 개념으로 이들을 통일하고 있는 것과 같다. 즉 이원론을 이루는 두 요소들은 언제나 일원론으로 통일되기 위해서 잠정적으로만 첨예하게 구분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지시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장켈레비치를 인용하면 그의 유명한 용어, 즉 <이원론적 일원론>이라는 말로 베르그손의 입장을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생명의 철학으로 알려진 『창조적 진화』의 입장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운동 혹은 흐름, 그의 용어로는 <지속>의 일원론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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