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나는 여러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시진핑 정권이 5년 내 대만 침공을 감행할 가능성이 꽤 높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대만은 중국의 입장에선 경제적·지정학적 가치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진핑 정권이 만약 2022년 공산당 당대회에서 연임에 성공할 경우 대만 문제는 시진핑 정권의 정치적 정당성 문제와 직결될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정도로 대만은 지금의 중국, 집권당인 중국 공산당, 그리고 시진핑 정권의 명운에 중대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여기에 시진핑의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그의 복고주의적 세계관 또한 무시하지 못할 요인으로 추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구적 가치를 부정하고 자력갱생을 내세우며 중국 인민의 자체적 역량으로 세계 초강대국이 되겠다는 국수주의적 발상의 원조는 마오쩌둥이며, 앞에서 살펴보았듯 마오쩌둥의 시대를 긍정한 대표적 인물 중 한 사람이 바로 시진핑이기 때문이다.

보시라이 정변 사태는 덩샤오핑이 만든 집단지도체제의 취약점이 극대화되어 발생한 정치적 위기이며, 후진타오 계파와 장쩌민 계파 간에 벌어졌던 치열한 권력 다툼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중국은 ‘절반의 중국’, 즉 ‘선진국 중국’이었을 뿐이었다. 나머지 절반인 ‘개발도상국 중국’은 나의 시야에 비껴 나 있었다.

하지만 2020년 기준 중국 농촌에는 여전히 전체 인구의 36%에 가까운, 약 6억 명의 농민들이 살고 있다.[17] 그리고 이 수치에는 사실상 농촌과 비슷한 생활환경이지만 행정구역상 도시로 분류된 인구가 제외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 농촌 거주 인구 비율은 중국의 도시화율을 살펴봐야 한다. 2019년 중국 통계공보에 따르면 중국의 도시화율은 이제 갓 60%를 넘어선 60.6%에 해당한다. 이는 전체 인구의 40% 정도가 여전히 농촌에 거주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 미국, 일본, 프랑스 대다수 선진국들의 도시화율이 80%를 넘는 것과 대비된다

중국에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가장 결정적인 신호는 바로 인구 문제이다. 그 나라의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중국의 인구 구조가 급속도로 노령화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은 두 개의 중국을 해결할 충분한 ‘시간’과 ‘동력’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중국 정권이 반도체 굴기에 얼마나 사활을 걸었는지는 ‘제조2025’의 10대 육성 산업 중 첫 번째가 바로 반도체인 것으로도 잘 드러난다. 소위 ‘산업의 쌀’이라고 불리는 반도체가 가진 산업 생태계에서의 위상, 그리고 미래 산업인 AI, 빅 데이터, 사물 인터넷 등에서 갖는 반도체의 중요성을 고려해 볼 때 중국의 다음 국가 육성 산업들 중에서 반도체가 최우선 순위가 된 이유는 너무도 확실했다. 그리고 중국 반도체 굴기의 최대 피해 국가 중 하나가 장차 한국이 될 것도 역시나 자명해 보였다.

중국의 대만 침공은 사실 내가 생각하는 중국 내부의 마지막 리스크와도 직결된다. 바로 현 중국 국가 주석이자 중국 공산당 총서기인 시진핑 본인이 그 리스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까지 내가 상술했던 이 모든 것이 차이나 쇼크 그 자체다. 중국이 자신들의 염원대로 미국과 맞먹거나 미국을 능가하는 국력을 갖추는 데 성공해도 한국에는 큰 위협이고, 중국이 내부적 문제 해결에 실패해서 주저앉아도 한국에 큰 위험이 닥치게 된다. 중국 정도의 사이즈 되는 나라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것 자체가 사실 그 나라의 숙명적인 스트레스다.

최근 한국의 언론 매체들 다수가 한국에 전달하는 중국에 대한 소식은 주로 극단적 국수주의 네티즌들의 한국에 대한 도발, 그리고 중국에 대한 부정적인 소식들에 집중되어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시작된 2022년은 한국이 다시 한번 적응력과 유연성을 발휘해야 할 새로운 시대에 정식으로 진입했다는 상징적인 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그 새로운 시대란 바로 ‘신냉전이라는 뉴노멀’이다.

내가 이 장을 통해 마지막으로 공유하며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바로 한국인 특유의 유연성과 적응력의 재발휘, 그리고 이를 통한 뉴노멀 시대에 맞는 새로운 포지셔닝의 시대적 필요성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느님은 우리에게 부, 명예, 생명, 건강까지 내려 주되, 어떤 때는 우리에게 해가 되도록 내려 주실 수도 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모두 우리에게 언제나 이롭지는 않기 때문이다. 만일 하느님이 병을 고쳐 주는 대신 우리에게 죽음 또는 병의 악화를 보내 주신다면, "당신의 막대와 회초리가 나를 위로하오니"(「시편」 22), 우리에게 마땅한 것을 우리보다 훨씬 확실하게 고려하는 그분 섭리의 이치에 따라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모자라고 흠이 있는 조건을 지녔으니 우리는 적어도 더 겸손하게 처신하고, 변덕을 더 억제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오성에 받아들이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자주 그릇된 것들을 받아들이며, 자주 판단을 번복하며 틀리는 바로 그 연장들을 가지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법률은 구속력과 관례에서 그것의 권위를 끌어낸다. 그러니 그것을 그 발생 근원으로 되돌려 파악하려 하는 것은 위험하다. 강물이 그렇듯이 그것은 굴러다니면서 비대해지고 고상해진다. 강물을 그 근원지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라. 그것은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작은 물줄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것이 늙어 가면서 그렇게 오만해지고 억세지는 것이다.

육체의 정념들 때문에 받는 충격과 동요도 우리 영혼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 영혼 자체에 속하는 정념들이 주는 충격은 그보다 더하다. 그것들이 어찌나 영혼을 강하게 휘어잡는지, 영혼에겐 자체의 안에서 이는 바람 말고는 다른 추진력이나 움직임이 전혀 없고, 그 바람이 일지 않으면 마치 바다 한가운데서 바람이 도와주려 하지 않고 팽개쳐 버린 배처럼 꼼짝도 않으리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파를 따라 그런 견해를 지지하는 이가 우리를 크게 폄훼하는 것도 아니리라. 영혼이 행한 가장 아름다운 행위 대부분이 그런 정념의 충동에서 나오고 또 그것을 필요로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니까.

우리는 이성이 제거되거나 마비되었을 때 개선된다. 신들의 방에 들어가 우리 숙명의 흐름을 예견하는 두 가지 자연스러운 길은 광기와 잠이다. 이것은 재미있는 고찰거리이다. 정념 때문에 이성이 떨어져 나가면 우리는 유덕해진다. 광기나 죽음의 영상이 이성을 뽑아내 버리면 우리는 예언가나 점쟁이가 된다. 철학이 한 말 중 내가 이보다 더 기꺼이 믿는 것은 없다.

위대한 인물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는 우리 세계의 한계를 정해 놓았다. 고대 철학자들 모두 자기들이 놓쳤을 수도 있는 몇몇의 외딴 섬들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의 크기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일 자연이 그 통상적 운행의 일정 기간에,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믿음, 판단, 견해 역시 가두는 것이라면, 그런 것들도 양배추와 마찬가지로 변화, 절기, 탄생과 죽음을 가진 것이라면, 하늘이 제 마음대로 그것들을 흔들고 굴리는 것이라면 우리가 그것들에게 무슨 대단하고 항구적인 권위를 부여하겠는가?

우리 어리석음에 대한 증거들 중에서도 잊어서는 안 될 하나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인간이란 욕심을 내면서도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낼 수 없으며, 향유는 그만두고 그저 상상과 소원으로라도 우리는 우리의 만족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 생각더러 마음대로 자르고 꿰매 보라고 하라. 아마도 그것은 자기에게 적합한 것을 원할 줄도 모를 것이요, C 저를 만족시키지도 못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를 정의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로 보인다. 그냥 아무것도 없는 것no thing 또는 하나도 없는 것not a thing이니까. 하지만 그 ‘것thing’이란 대체 무엇일까? 나는 여기서 최대한 포괄적인 의미로 ‘것’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무에 대한 몇 가지 다른 개념들이 있다는 점에서 다른 종류 혹은 다른 수준의 무를 구성하는 ‘것’들을 발견한다고 해서 모순은 아니다. 이런 무를 구성하는 것들을 구분해 분석하는 것은 인식이 가능하고 실제로 존재했을지 모르는 서로 다른 종류의 무를 나누는 분류체계를 가능하게 해 무의 본성에 대한 이해를 풍성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분류체계는 모든 구체적인 대상의 부재가 형이상학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밝히려는 ‘빼기 논증subtraction argument’의 전통을 물려받았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빼기 논증은 구체적 대상을 하나씩 제거해가는 일련의 세계를 상상하여, 세계에 존재하는 마지막 대상까지도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5
이런 식으로 사고를 발전시켜보니 무에는 가장 단순한 무(무 1번)에서 가장 절대적인 무(무 9번)까지 아홉 단계의 무가 있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호킹과 믈로디노프는 우주 전체를 모형화하기 위해 현재 5가지의 끈 이론 모델들을 통합하고 11차원을 포함하는 끈 이론의 확장판인 ‘M이론’을 선택했다. 그들은 "M이론이 가장 보편적인 초대칭 중력이론이다."라면서, "이러한 이유로 우주에 대한 완전한 이론으로 M이론은 유일한 후보다. 아직 증명되지 않았지만 우주가 유한하다면, M이론은 그 자신을 창조하는 우주의 한 모델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 위의 질문에 대한 유신론자의 답변은 신이 우주 이전에도 존재했으며, 창세기에 기술된 바와 같이 단 한 번의 창조를 통하여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무에서ex nihilo) 우주가 생겨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우주 ‘이전에’ 존재하던 창조자가 ‘이후에’ 우주를 창조했다는 생각에는 시간적인 순서 개념이 함축되어있다. 신의 창조를 통해서든 빅뱅Big Bang 때문이든 간에 유대-기독교 전통(유대-기독교 시대보다 앞선 바빌로니아의 우주관도 마찬가지)과 과학적 세계관 모두에서 시간은 우주가 생겨나면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신은 공간과 시간 바깥에 존재했어야 한다.

왜 아무것도 없는 대신에 무엇인가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무nothing’가 자연스러운 상태고 ‘유something’는 무로부터 생겨났기 때문에 그 이유가 설명되어야 한다는 가정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어쩌면 ‘유’가 자연스러운 상태이고 ‘무’가 해결해야 할 수수께끼일 수도 있다.

점성술에 대한 믿음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인들을 중요도 순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낮은 소득 - 젊은 나이 - 낮은 예배 참석률 - 기혼자 - 성경구절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음 - 백인 이외의 인종 - 여성. 즉 점성술에 대한 믿음에서 성별은 기여도가 가장 떨어지는 요인이다

이 글에서는 성차가 사람들의 믿음에 주는 영향이 얼마나 적은지를 살펴본다. 그러면서 초자연적 현상을 믿는 사람들을 둘러싼 몇 가지 일반적이고 때로는 불편한 속설을 분석한다. 다음 주제들에 대해서도 간단히 살펴볼 예정이다. (1) 모든 인구 집단에서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믿음이 존재한다는 점, (2) 데이터와 관련된 문제들, (3) 인구통계학적 요인이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점, 그리고 (4) 성차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두 가지 이론의 부적절성. 이 글의 결론은 사람들의 인식과는 달리 남성과 여성이 갖는 믿음의 차이가 아주 크지 않으며 필연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입면 악몽의 공포와 그 구체적인 내용은 기존에 알려진 REM 생리학과 영적인 존재에 관한 문화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믿음, 수면마비의 조건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만일 그대가 "나는 거짓말을 한다."라고 말하고 그대가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대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 결론에 이르게 하는 어법, 논리, 힘 등은 앞의 언술과 같다. 그런데도 우리는 진창에 빠져 버리는 것이다.

각각의 존재는 다른 것들의 자질을 모두 자기 자질에 결부시켜 인식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자질들을 확장하거나 줄일 수는 있지만 그게 전부이다.

"민중은 자기를 해방시켜 줄 진리를 찾고 있는데, 그들의 종교는 그의 안녕을 위해 속여야 한다고 생각한다."(아우구스티누스) 인간의 눈은 사물들을 제가 알아보는 방식으로밖엔 보지 못한다.

우리가 바라듯이 우리 영혼의 조건을 돋보이게 하려면 단순하고 순수한 천연 상태에서도 이미 영혼들은 모두 박식하다고 전제해야 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영혼은 육체 안으로 들어오기 전, 육신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난 상태에서도 박식했을 것이다. 육체에서 나간 뒤에 그렇기를 우리가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영혼은 육체에 들어와서도 그 지식을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플라톤이 우리가 배우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았던 것을 기억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했던 것처럼. 그러나 우리 각자는 그것이 틀린 말임을 경험으로 입증할 수 있다.

그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조건을 위로해 주려고 늘 이런 모순된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영혼은 필멸이거나 불멸이다. 필멸이면 고통을 모를 것이요, 불멸이면 점점 나아질 것이다." 그들은 ‘더 나빠지면 어쩔 것인가?’ 하는 다른 가지는 절대 건드리지 않고, 사후에 닥쳐올지 모르는 고통에 대해서는 시인에게 맡겨 둔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좋은 패를 자기 것으로 갖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존재를 연장하려고 노심초사한다. 그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서 그것을 준비해 두었다. 신체의 보존을 위해서는 무덤이 있고, 이름의 보존을 위해서는 영광이 있다.

요컨대 고대인들의 정신이 지닌 자유와 대담성은 철학과 인간학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여러 분파를 만들어 냈고, 그 각각은 제 주장을 펼치기 위해 저마다의 판단과 선택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살며, "고정되고 한정된 몇몇 견해에 매여 끌려가는 나머지 자기가 동의하지 않는 것들까지 옹호해야 할 판이 되었고"(키케로), 처세의 압박과 명령 때문에 교양을 쌓고, 학교들도 이젠 하나의 모델만 따르며, 동일한 교육, 한정된 학과밖엔 다루지 않게 된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더 이상 어떤 화폐가 더 무겁고 값이 나가는지는 문제 삼지 않고, 각자 일반적으로 동의하고 통용되는 바에 따라 그 값어치를 받아들입니다. 진정한 가치를 따지지 않고 통용 가치만 따지는 것이지요. 모든 것이 그런 식으로 값이 매겨집니다.

기초가 결여되면 그의 논증은 땅에 떨어진다. 토론과 탐구가 궁극의 목표로 삼는 것은 오직 원칙들이다. 그것들이 나아가는 길을 이 목표가 붙들어 주지 않으면 끝없는 불확실성에 빠질 것이다. "한 사물이 다른 것보다 더 이해되거나 덜 이해될 수는 없다. 모든 사물에는 각각 하나의 이해 방식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인간의 시선이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깊은 심연에 잠겨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더 그럼 직하다는 것을 고백하고, 그들의 판단력이 이런 징후보다 저런 징후에 기우는 경향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들은 자기네 판단력으로 어떤 결론을 내리는 것은 금하면서도 그런 경향은 인정했던 것이다.

사물이 제 모습, 제 본질 그대로 우리 안에 깃들지 않으며 제 힘과 권위로 거기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경험한다. 만일 그 자체로 들어온다면 우리 모두가 그것을 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일 테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지만 시간과 공간을 우리 필요에 맞게 사용하고 환상적인 정밀도로 그 각각을 측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공간과 시간이라는 물리량을 그 자체로 설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공간과 시간은 실재의 근본적인 배경을 형성하기 때문에 공간과 시간에 대한 정의는 언제나 순환적일 수밖에 없다. 다른 개념들은 공간과 시간을 기준으로 정의될 수 있지만 공간과 시간은 ‘경험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최근 물리학에서 일반상대론과 양자역학을 통일하려는 시도(끈 이론, 루프 양자 중력, 다차원 브레인branes, 양자화된 시공간)는 결국 특이점을 회피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우리는 특이점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무를 만드는 것은 사실상 (필자는 결코 절대라고 말하지 않았다) 불가능하다. 앞의 주장은 창조자의 존재를 분명하게 부정하지는 않지만 무로부터 우주의 창조라는 유신론적 개념이 옹호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왜 무가 아니라 무엇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전통적으로 중요한 철학적 문제 중 하나다. 현대 물리학은 이 질문을 뒤집는다. 아마도 이런 질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과연 무엇인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 우주에서 관찰되는 모든 물리적 과정은 ‘무로부터의 창조’라기보다는 물질과 에너지의 재배열이나 전환이다. 반면 우주의 창조는 지금까지 연구된 물리적 과정과는 다르며, 따라서 그것이 인과적 설명의 대상이라고 믿을 어떤 근거도 없다.

우주론적 논증에 따라 유신론적 신을 도입하는 일은 단지 교묘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합리주의자는 유신론자의 ‘신’을 선험적 의도나 인격이 아닌 ‘물리학의 원리’로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크레이그의 논증은 우주의 창조 과정에 신이 어떻게든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에 불과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