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과자 가게 전천당 6 이상한 과자 가게 전천당 6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쟈쟈 그림, 김정화 옮김 / 길벗스쿨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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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가게는 손님을 행복하게 하려고 장사를 하는 게 결코 아닙니다. 손님의 소원을 들어드리는 것이 <전천당>의 목표입지요.˝_ 히로시마 레이코, <이상한 과자 가게 전천당 6>, p26

<이상한 과자 가게 전천당 6>에서는 항상 자신의 일을 깔끔하게 하는 베니코가 전에 없이 실수를 저지른다. 그리고 베니코의 실수 사이에서 우리는 <전천당>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손님의 소원을 이루는 것과 손님이 행복해진다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일까? 아래에서 한 번 생각해보자.

연의가 태권도를 마치고 땀을 너무 많이 흘렸을 때, 마침 행운의 손님이 되어 <전천당>의 베니코에게 갔다고 생각해보자. 목이 너무 말라 O2(오투)음료수를 계속 마실 수 있는 텀블러를 원해서 가질 수 있었다면 연의는 행복해진 걸까?


<전천당> 뽑기 기계의 장난감 캡슐이 베니코의 사소한 실수로 행운의 손님이 아닌 남자아이의 손에 들어갔다. 그다음 날 <인내 연필>은 남자아이의 손으로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_ 히로시마 레이코, <이상한 과자 가게 전천당 6>, p71

베니코의 말처럼 <전천당>에 들어가서 소원을 이루려면 ‘행운‘이 필요해. 그렇지만, 행운은 행복을 가져다줄 수 없단다.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소원을 이루려면 행운이 필요히다면 우리가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 함께 생각해볼까.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오늘 연의가 자전거를 타면서 배웠던 것도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오랫만에 타서 낯설게 느껴졌던 자전거를 거부하지 않고 계속 연습하면서 친숙해지는 과정. 꾸준함과 한 걸음 나아가려는 마음은 나중에 연의가 현명한 선택을 하는데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아빠는 생각해.

주말에 피어나는 꽃들처럼 다음 한 주도 힘차게 잘 보내! 사랑하는 아빠가.

˝정말로 소중한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하면 전부를 잃은 것이나 같지요. 저 손님은 정말로 올바른 선택을 했군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으니 말이죠.˝_ 히로시마 레이코, <이상한 과자 가게 전천당 6>,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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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과 네트워크 1 - 권력과 제국주의 케임브리지 세계사 7
크레이그 벤저민 지음, 류충기 옮김 / 소와당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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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고대 제국은 세 가지 기둥에 의지했다. 즉 군사력, 자기 정체성, 세금이 그것이다.이를 위하여 사람과 그들의 노동력을 관리했고, 이동, 잉여 생산물, 토지 , 교통로를 통제했다. 자원 개발이나 세금 수입 관련 제도와 기술도 제국 체제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경제가 발전할수록 사회적 계층도 복잡해졌다. 귀족(엘리트) 계층의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이들은 차별화된 소비를 통해 경쟁자와 자신을 구별하고자 했다. _ 크레이그 벤저민 외, <케임브리지 세계사 7 : 제국과 네트워크 1> , p81


 <케임브리지 세계사 7 : 제국과 네트워크 1 - 권력과 제국주의 Cambridge World History Vol. IV>에서 독자들은 농업 문명의 시작과 그 결과로 태어난 도시(都市)문명의 심화를 확인할 수 있다. 헤시오도스( Hesiodos, BCE 7세기 ? ~ ?)가 <일과 날 Erga kai Hemerai>에서 노래했듯, 철의 시대에 해당하는 농경 시대가 앞선 시기보다 결코 행복한 시기는 아니었다. 불평등은 커졌고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하는 시기. <제국과 네트워크 1>은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가 이러한 불평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전제 조건으로 종교(宗敎)를 언급한다.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 ~ 1969)는 도덕적 종교가 등장한 시기를 '축의 시대 Achsenzeit'로 언급한다. 종교를 통한 공동체의식의 함양은 동시에 일면식도 없는 이들을 '이웃'으로 통합하며 가족으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야스퍼스의 전제는 기원전 제1천년기 중엽을 전후한 몇 세기 동안 유라시아 세계의 몇몇 선진 문화권에서 중요한 지성적/제도적 전환이 일어났다는 가설이다. 이러한 현상은 여러 문명권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건 공통적으로, 인간의 사유 능력 및 심오한 사유의 증대를 텍스트로 정리했고, 직접적 대상을 넘어서는 이성(reason)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_ 크레이그 벤저민 외, <케임브리지 세계사 7 : 제국과 네트워크 1> , p224


 예후나 엘카나(Yehuda Elkana)에 따르면, 새로운 2차적 사고(second-order thinking) 덕분에  인류는 일상생활의 한계는 물론 기존 사회 의례에 내재된 우주론적 선입관을 넘어설 수 있었다. 신화적 사유가 당시의 사회를 주도했고, 그것이 의례에도 반영되어 있었다. 의례는 부족 사회 혹은 원시 사회의 응집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_ 크레이그 벤저민 외, <케임브리지 세계사 7 : 제국과 네트워크 1> , p206


 종교를 통해 일체화된 사회 내에서 불평등은 지식의 소유 정도와 어느 정도 비례했다.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도시를 유지하기 위한 제반 활동을 효율/효곽적으로 할 수 있는 지식 소유 집단의 등장은 엘리트 귀족가문의 탄생으로 연결되며, 이로부터 지배계급-피지배계급의 분화는 세습화된다. 그렇지만, 엘리트 계층의 지배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가뭄, 홍수와 같은 자연 재해는 물론 안정적인 삶을 유지시킬 수 있는 능력을 입증해야 했고, 그 결과 도시국가들은 공동체의 번영과 유지를 끊임없이 전쟁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도시국가의 하부구조를 구성하며 공동체를 유지시켰던 계급인 노예층은 그 결과물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도시국가는 점차 왕국(王國) 그리고 제국(帝國)으로 성장해간다. 


 기원전 800년에서 기원후 800년 사이 유럽, 북아프리카, 아시아의 문명들은 심각한 변화의 시기를 거쳤다. 기원후 800년을 기준으로 자연과 기술에 관한 지식의 발전 정도를 보자면, 많은 지역에서 완성 단계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발전을 위한 기본바탕은 마련되어 있었다. 그 바탕 위에서 발달한 기술이 이후 시대의 지역 문화를 형성했다. _ 크레이그 벤저민 외, <케임브리지 세계사 7 : 제국과 네트워크 1> , p242


 올랜도 패터슨(Olando Patterson)이 정의한 노예란 "태생적으로 소외되고 일반적으로 천시받으며 영속적이고 폭력적인 압제에 놓여 있는 사람"이었다(p165) ... 오늘날의 노예는 말하자면 "내부에 존재하는 타자(outsiders within)"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로서, 일을 하더라도 거의 아무런 권리가 없는 사람들, 일자리의 안전성이 극히 유동적인 사람들이다. _ 크레이그 벤저민 외, <케임브리지 세계사 7 : 제국과 네트워크 1> , p200


 도시국가들의 생산 활동 중심에는 이들 노예층이 있었다. 노예가 생산하는 물품은 주인에게 귀속되는 반면, 노예들에게 지불되는 비용은 최저생활수준에 머물렀기에 막대한 이윤이 발생한다. 도시 내에서 더이상 소비될 수 없는 잉여제품들은 키루스( Kurosch-e bozorg, BCE 600 ~ 530), 알렉산드로스(Alexander III of Macedon, BCE 356 ~ 323) 등이 건설한 대제국의 네트워크를 통해 제국 내의 도시국가들로 흘러들어갔다.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된 명품(名品)의 사용은 신분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의례(儀禮)는 차이를 의식화시켰다. 


  <케임브리지 세계사 7 : 제국과 네트워크 1>에서는 농경화로 인한 분업과 집중화의 필요가 가속화되면서 불평등도 함께 커져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시기 도시는 국가가 되고, 국가는 제국이 되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정치 경제의 주된 단위는도시와 인근 농촌에 한정된다. 제국과 세계가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뉘고, 종교를 대신한 또 다른 이데올로기가 등장하면서 제국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만드는 제국주의(Imperialism)의 출현은 아직 먼 훗날의 이야기다. <케임브리지 세계사 7 : 제국과 네트워크 2>에서는 BCE 1200 ~ CE 900년 시기 세계 여러 지역의 구체적인 역사가 소개된다. 이제 2권으로 넘어가자...


 도시화로 다양한 수공업 기술이 발달했는데, 특히 금속 제련과 도자기 생산 분야에서 고도로 복잡한 단계까지 수준이 높아졌다. 서양, 인도, 중국은 모두 거대한 기념비적 건물을 건설할 정도의 기술력과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사회 인프라 구조 건설과 관련해서 건축 기술의 수준이 높았다. _ 크레이그 벤저민 외, <케임브리지 세계사 7 : 제국과 네트워크 1> , p286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글로벌 관점에서 보자면 지역별로 나뉜 교환 체계라고 할 수 있는 네트워크들이 서로 연결되어 대륙 간 무역로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대륙 간 무역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무역로를 거친 개별 상품의 가치가 매우 비쌌다는 점, 그래서 그런 상품은 상당히 좁은 엘리트 계층의 소비 능력에 따라 유통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_ 크레이그 벤저민 외, <케임브리지 세계사 7 : 제국과 네트워크 1> , p113

고대 세계에서 국가, 제국, 지역 간 네트워크의 형성과 유지는 전통적으로 남성의 기획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와 대비되는 여성의 세계는 가정과 생활 경제였다. - P154

"파트롱(patron)"이란 후원자 혹은 작품의 구매자 혹은 작가의 고용주를 간단히 표현하는 말이다. 예술은, 특히 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남아 있을 정도로 견고한 물질로 만들어진 작품은 대개 값비싼 재료를 사용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방대한 자원을 통제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 파트롱이 된다. 예를 들어 통치자, 국가, 교회 때로는 부유한 중산층 등이다. 파트롱은 자신들이 보기에 가장 좋은 것, 혹은 자신의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에 비용을 대줌으로써 예술의 발전 과정에 기여한다. - 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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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04-03 17: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느덧 7권까지 읽으셨군요^^ 저도 이 시리즈 찜해놓고 있는데 언제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계속 보관함에 들어있어요!ㅎㅎㅎ

겨울호랑이 2023-04-03 20:15   좋아요 1 | URL
네, 어찌어찌하다보니 7권까지 흘러왔습니다. 한 번 마음을 정하면 끝까지 파고 드는 거리의화가님이시라, 다른 책들이 마무리되면 금방 독파하시리라 생각합니다. 평안한 저녁 되세요! ^^:)
 

자기모순은 니체 사상의 특징이다. 우리는 거의 언제나 니체의 어떤 판단에 대해서도 정반대의 판단을 또한 발견할 수 있다. 겉으로 보면 그는 모든 것에 관해서 두 가지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우리는 바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니체로부터 마음껏 인용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니체는 권력의지를 바그너를 통해서 처음 직접 관찰했으며, 거기서 얻은 인식을 물리학적·우주론적 세계 일반으로 넓혀 체계적으로 이해해보려 분투했다. 1880년대의 유고들은 그런 분투의 흔적이다. 그러나 결국 니체는 권력의지를 보편적 체계로, 일종의 형이상학적 체계로 세우는 데 실패한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의 힘이 우리 안에 있다고 믿었다. 니체의 무시무시한 언어들은 우리 내면의 어두운 동굴 속 불 뿜는 용을 거꾸러뜨리고, 우리 안의 신화적인 힘에 호소력을 발휘해 그 힘을 밖으로 불러낸다. 니체의 언어를 통해 디오니소스의 귀환과 부활은 낡은 신화에서 벗어나 생생한 현실이 된다.
그리고 이 귀환과 부활의 반복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 권력의지다. 권력의지는 우주라는 거대한 바다를 출렁이게 하는 힘들의 관계가 아니라, 죽음으로부터 부활로 삶을 이끌어가는 무한한 재생의 동력이다.

요약하자면, 니체의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는 백승영에게 이르러 ‘생성의 영원회귀’로 나타난다. 동일한 것을 생성, 즉 영원한 변화와 변전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들뢰즈가 주장한 ‘차이의 영원회귀’와 다를 바 없게 된다.

세계의 관점이 아닌 우리들의 관점에서 영원회귀는 하나의 선택(의지)을 요구한다. 세계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사물로서 우리 역시 생성과 소멸의 반복하는 운동 속에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 자신이 구체적으로 그것을 선택함으로써 건강한 변신을 이루는 것은 중요하다

니체는 자서전에서 《선악의 저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책은 본질적으로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다. 그 비판은 근대 학문, 근대 예술, 심지어는 근대 정치마저도 제외하지 않으며, 그 밖에 근대의 반대 유형인 고귀한 긍정의 유형에 대한 지침서이기도 하다. 이 후자의 의미로 보자면 이 책은 ‘고귀한 자들’을 위한 학교다."

니체의 핵심 사유인 권력의지 사상에 입각해서 보면 그의 민주주의 비판은 분명한 논리적 일관성이 있다. 민주주의는 확실히 약자들의 반란을 통해 성립한 제도이며, 약자들을 주인으로 만들어내는 제도이다. 니체는 약자가 아니라 강자가 지배해야 하며 강자를 약자로부터 보호하고 키워내야만 초인의 창출과 진정한 창조 활동이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에 이런 약자의 세상을 만든 민주주의를 용납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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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년 고구려가 수도를 남쪽의 평양(平壤)으로 옮긴 뒤로는 한반도 세력의 성격이 더욱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이후 고구려를 포함하여 한국인이 형성되었을 때, 그들에게 고구려의 유산은 필수 불가결했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한국의 영어식 명칭인 코리아(Korea)가 바로 고구려(Kogury)의 축약형인 고려 (Kory)에서 비롯된 것이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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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은 나비처럼, 비눗방울처럼 가볍게 이 대지 위를 춤추며 다니는 존재다. 바로 그런 초인을 지향하는 차라투스트라 니체의 가장 큰 적이 바로 그의 실존을 아래로 잡아당겨 한없이 무겁게 만드는 ‘중력’이다.

그토록 위험한 텍스트가 왜 그토록 매혹적인 텍스트가 되는가? 그 위태로운 발언들이 그려내는 이미지들이 우리 내부의 어떤 원시적 영역에까지 파고들어 거의 야성적인 힘을 깨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길들여진 무기력증을 깨뜨려 내면 저 깊은 곳의 생명력을 들쑤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생명력, 그 야성적인 힘을 제어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 된다. 그것을 제어하지 못할 때 니체의 텍스트는 파괴의 교과서가 된다

니체는 보통 선거라는 형식으로 드러나고 관철되는 평등한 자들의 지배를 초인의 탄생을 근원적으로 말살하는 사태로 인식한다. 바로 이 평등한 대중이 지배하는 민주주의, 평등주의 시대야말로 최후의 인간의 시대인 것이다. 이 시대를 혁파하지 않으면 초인은 창출될 수 없다. 초인은 오직 평범함의 대척점에 있는, 대중과 평등의 불구대천의 원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니체가 강조하는 것은 ‘삶은 항상 자기 자신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명제다. 니체는 삶이 자기를 극복하는 데에 민주주의와 평등주의 가치들이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삶 자체를 구렁에 빠뜨린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자기 극복의 최대의 적은 이 평등화한 대중 사회라는 니체의 진단이 문제인 것이다. 니체는 이 진단을 그냥 한 번 하고 만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수없이 반복했다. 그러므로 니체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반민주주의자가 된다는 것과 같은 것이기 쉽다.

분명한 것은 민주주의나 평등주의에 대한 반대가 니체의 목적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니체는 삶의 자기 극복과 초인의 탄생을 목적으로 삼았고, 그 목적을 이루는 데 민주주의·평등주의 이념과 가치들이 결정적인 걸림돌이 된다고 보았을 뿐이다. 따라서 반민주주의도 반평등주의도 니체에게는 수단의 지위에 머무른다.

권력의지는 날것 그대로 관찰하면,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패배시켜 지배자로 군림함으로써 이웃 민족들에게 두려움과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는 데서 드러난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 다시 말해 만물의 척도이자 의미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니체의 설명을 따르면, 권력의지는 다른 것이 아니라 타자를 정복하고 지배하는 것에서 관찰된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분출과 충돌 때문에 이 세계에 평화가 없고 갈등과 혼란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그는 의지 자체를 없앰으로써 불교적 열반 상태에 이르는 것을 삶의 목표로 제시했다. 반면에 니체는 권력의지를 삶을 창조하고 전진시키는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권력의지는 어떤 경우에도 부정되어서는 안 되고 또 부정될 수도 없는 삶의 본질이자 목표이다.

진리를 알고자 하는 욕망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불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모든 것의 비밀을 파헤쳐 그 본질, 그 실체를 알아내고자 하는 의지는 그 자체로 선한 욕망 아닌가. 그러나 니체는 이 진리 의지란 것이 세상 모든 것을 생각을 통해 내 머릿속에 집어넣고자 하는 의지, 다시 말해 나의 이해 능력으로 장악하고자 하는 의지임을 폭로한다. 그렇게 사유 능력으로 대상을 파악하는 것은 그 대상을 내 의지 아래 굴복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진리 의지는 그러므로 지배 의지이고, 권력의지다

니체의 권력의지는 언제나 생명체 안에서, 혹은 생명체와 더불어 이야기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니체의 권력의지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우주 전체의 본질로서 제시된다. 이것은 인간을 우주로 투사한 발상이다. 반면에 니체는 쇼펜하우어식 우주 이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영원한 자기 창조와 영원한 자기 파괴라고 하는 이러한 나의 디오니소스적인 세계, 이중적 관능이라는 이러한 비밀의 세계, 이러한 나의 선악의 저편의 세계, 이는 순환의 행복 속에 목적이 없다면 목적이 없으며, 원환 고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 선한 의지를 갖지 않는다면, 의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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