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일기 발터 벤야민 선집 14
발터 벤야민 지음, 김남시 옮김 / 길(도서출판)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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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 하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얼마나 자주 회의가 개최되어야 하는지 관찰해 본다면 이는 정말 맞는 말이다. 무언가 준비되고 예상된 대로 일어나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 뒤죽박죽인 삶에 대한 이 진부한 표현이 여기선 모든 경우마다 어김없이 집약적으로 들어맞기 때문에 러시아적 숙명론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공동체 내에 서서히 문명적인 계산이 관철된다면 무엇보다 이는 개인들의 삶을 더 뒤죽박죽으로 만들 것이다. _ 발터 벤야민, <모스크바 일기>, p80


 발터 벤야민 (Walter Bendix Schonflies Benjamin, 1892~1940)의 <모스크바 일기>는 혁명의 혼란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소련을 바라보는 독일 지식인의 시선이 잘 드러난다. 그렇지만,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많은 이들의 기대와 적극적인 참여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어지러움 속에서 벤야민 자신 또한 겪어야 하는 좌절들이 본문의 여러 곳에서 잘 드러난다.


 문학가이자 예술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거기에 적지 않은 역할을 수행했던 당 간부들, 어떻게 해서든 이들과 벤야민 자신에게도 생산적 관계를 맺어보려 했지만 결국 성과 없이 끝나버리고 만 시도들이 이 글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독일문학과 정신사를 다루는 러시아 잡지의 특파원으로 그런 관계를 만들어 보려던 시도는 좌절한다. 그와 더불어 이 글에는 독일공산당 가입 문제에 대한 그의 고민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_ 발터 벤야민, <모스크바 일기>, p7, 게르숍 숄렘 서문 中


  모스크바에서 그가 직면한 여러 한계 상황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연인 아샤 라치스(Asja Lacis, 1891~1979)에 대한 열렬한 감정 덕분이었다. 비록 그러한 감정의 결과가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벤야민과 라치스를 보며 여러 형태의 사랑과 우정을 떠올리게 된다. 니체와 살로메, 브람스와 클라라 슈만, 루소와 바랑 부인, 쇼팽과 조르주 상드, 차이코프스키와 폰 메크 부인 등등. 이들의 관계는 결코 묶을 수는 없다. 사랑과 우정, 사랑 내에서도 서로 다른 깊이를 가졌던 이들 안에서 공통분모를 찾는다면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내게 모스크바는 이제 하나의 요새다. 내 건강에 좋다고는 하지만 세차게 나를 엄습하는 혹독한 기후, 언어에의 무지, 라이히의 존재, 아샤의 매우 제한된 삶의 방식들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성벽이며 더 뚫고 나아가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게 한다. 치명적인 크리스마스의 멜랑콜리를 피해 보고자 하는 이 여행의 부수적 목적을 내가 얼마만큼이나 달성할 수 있을지 아직도 불확실하다. 하지만 내가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버티고 있는 것은 아샤에게 나에 대한 애착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_ 발터 벤야민, <모스크바 일기>, p91


 의심할 바 없이 이 일기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벤야민과 라치스 사이의 엄청나게 문제가 많던 관계이다(p9)... 그러나 이 일기는 벤야민이 사랑했던 이 여인의 지적인 면에 대해서는 어떤 이해나 통찰도 주지 않는다. 체류가 끝날 때까지 거의 좌절된 구애의 이야기로 채워진 이 일기는 그야말로 절망적 절절함으로 가득차 있다. _ 발터 벤야민, <모스크바 일기>, p10, 게르숍 숄렘 서문 中


 발터 벤야민의 내적, 외적 갈등이 담긴 <모스크바 일기>는 우리에게 인간 발터 벤야민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의 역사철학이 선형적인 진보사관과는 다른 역사를 기억의 대상으로 보는 독창성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책이라 생각된다...


 애정과 갈등을 둘러싼 개인적 삶의 곡선은 사회주의 건설을 둘러싼 당시 소비에트 연방의 사회, 정치, 문화적 사건들의 좌표 속에서 움직이고 있으며, 그 사이사이를 벤야민의 섬세한 시선을 통해 드러나는 도시 모스크바의 인상학이 메우고 있다.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을 통해 벤야민은 혁명의 구호 속에 감추어져 있던 불안과 위험, 고통을 이미 혁명이 한창 건설 중일 때부터 감지하였는데, 이는 관념적 이상에 근거한 모든 종류의 맹목적인 역사 진보를 거부하는 그의 역사철학적 입장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_ 발터 벤야민, <모스크바 일기>, p20, 옮긴이의 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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