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 폭력비판을 위하여 / 초현실주의 외 발터 벤야민 선집 5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 길(도서출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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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과 깨어남의 변증법은 그 구조를 두고 볼 때 비평적 인식의 방법론으로서 침잠과 파괴라는 두 원칙, 다시 말해 대상(꿈) 속으로의 미메시스적 '침잠'과, 그 대상(꿈)의 연속성을 중단시키고 이로부터 대상에 대한 진정한 인식을 전복적으로 얻어내는 '파괴'라는 비평의 두 원칙에 상응한다. _ <해제 :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적 구제비평>, p29


 진리에 대한 신화의 무차별성은 이의성으로 현상되어 나타나는데, 이 현상을 변증법적으로 사유하여 신화의 신화성을 파악하는 것이 인식의 목표가 된다. 즉 신화의 극복은 역사를 그 신화에 추상적으로 대결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역사 속에 작용하는 신화적 이의성을 변증법적으로 사유함으로써 이루어지며, 이 사유를 통해 현상이 구제된다. _ <해제 :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적 구제비평>, p35


 발터 벤야민(Walter Bendix Schonflies Benjamin, 1892~1940) 선집에 있는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폭력비판을 위하여>, <초현실주의> 등은 그의 역사철학적 인식이 담긴 미학 비평서다. 벤야민에게 역사성은 단독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낡음과 새로움, 법적 목적과 자연적 목적, 운명과 성격 등 상호 대립하는 이미지들을 '언어'를 통해 규정하려는 노력은 오류를 만들어낼 뿐이다. 그리고, 이들의 강한 결속은 신화성의 부활을 가져오게 되며 우리는 이를  20세기 모더니티에서 신화적 키치(kitsch)롤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새로운 생산수단의 형식은 처음에는 예전 생산수단의 형식에 지배받기 마련이다(마르크스). 이 새로운 생산수단의 형식은 집단의식 속에 이미지들을 산출하는데, 이 이미지들 속에서 새것은 옛것과 상호 침투한다. 이 상들은 소망의 이미지들(Wunschbider)이다. 그리고 이 이미지들 속에서 집단은 사회적 생산물의 미숙함과 사회적 생산질서의 결함들은 지양하면서 동시에 미화하려 한다. 그와 함께 이 소망의 이미지들 속에는 낡아버린 것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놓으려는 강한 노력이 나타난다. 이러한 경향은 새로운 것에서 자극을 받는 구상적 판타지로 하여금 태고의 것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_ 발터 벤야민, <19세기의 수도 파리(1935)>, p179


  만국박람회와 철제 구조물이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의 '판타스마고리아'.  여기에서 사람들은 교환가치에 대한 환영에 빠지게 되고, 환영 안에서 억압받는 이들은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 속에서 갈 길을 잃고 만다. 벤야민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기한 방안이 바로 '침잠'과 '파괴'다. 이들을 통해서 환영에 대한 연속적 인식은 기억으로 붙잡을 수 있으며, 역사는 과학적 인식과 기억의 대상의 결합을 통해 현재성을 갖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인식과 기억의 결합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역사는 주체에 의해 올바르게 해석된다.   


 어떤 희망도 없는 체념이 바로 위대한 혁명가의 최후의 말이다. 19세기는 새로운 기술적 잠재성들에 상응하는 새로운 사회적 질서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그 최후의 말이 옛것과 새것의 길 잃은 중개자들, 판타스마고리아의 심장부에 있는 그 중개자들에게 남겨지게 된 이유이다. 판타스마고리아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 바로 그 세계가 모더니티이다. _ 발터 벤야민, <19세기의 수도 파리(1939)>, p250


 과거를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원래 어떠했는가'를 인식하는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다는 것을 뜻한다. 역사적 유물론의 중요한 과제는 위험의 순간에 역사적 주체에게 예기치 않게 나타나는 과거의 이미지를 붙드는 일이다. 어느 시대에나 전승된 것을 제압하려 획책하는 타협주의로부터 그 전승된 것을 쟁취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_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p334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얽힘으로 인한 과거로의 퇴행을 막는 것을 역사적 소명으로 인식한 발터 벤야민에게 '도도한 역사의 흐름', '끊임없이 상승하는 역사의 법칙'을 강조하는 전통적 진보(進步)사관은 역사적 실체를 온전하게 파악하는 것을 방해한다. 사진을 극도로 싫어했던 벤야민에게는 미안하지만, 사진가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 1908~2004)의 <결정적 순간>이 역설적으로 벤야민의 '침잠'과 '파괴' 그리고 '파괴'와 '구제'를 잘 표현한 것이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  


 상호통합적인 구조를 변증법적인 틀을 통해 바라보고 이러한 역사철학적 인식으로부터 정치적 실천을 강조한 발터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를 읽으며, 미학과 역사철학을 넘나드는 그의 사상에서 '수행'과 '전복'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유(思惟)에는 생각의 흐름만이 아니라 생각들의 정지도 포함된다. 사유는 갑자기 정지하는 그 순간에 그 상황에 충격을 가하게 되고, 또 이를 통해 그 상황은 하나의 단자(單子, Monade)로 결정(結晶)된다. 역사적 유물론자는 역사적 대상에 다가가되, 그가 그 대상을 단자로 맞닥뜨리는 곳에서만 다가간다. 이러한 단자의 구조 속에서 그는 사건의 메시아적 정지의 표지, 달리 말해 억압받는 과거를 위한 투쟁에서 나타나는 혁명적 기회의 신호를 인식한다. 그는 균질하고 공허한 역사의 진행 과정을 폭파하여 그로부터 하나의 특정한 시대를 끄집어내기 위해 그 기회를 포착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한 시대에서 한 특정한 삶을, 필생의 업적에서 한 특정한 작품을 캐낸다. _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p348


폭력에 대한 비판은 폭력의 역사에 대한 철학이다. 역사의 ‘철학‘인 이유는 그 역사의 결말이라는 이념만이 그 역사의 시대적 자료들에 대해 비판하고 구분하며 결정하는 입장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것에만 정향할 뿐인 시선은 기껏해야 법정립적인 것과 법보존적인 것으로서의 폭력의 형상들에서 변증법적 부침(浮沈) 정도를 감지해낼 수 있을 뿐이다. - P115

초현실주의자들은 확실성을 가지고 심리가 아니라 사물들을 추적한다. 대상들의 토템 나무(Totembaum)를 그들은 긍원사의 밀림 속에서 찾아 헤맨다. 이 토템 나무 최상단의, 최후의 찡그린 얼굴이 키치이다. 키치는 우리가 꿈속에서나 대화에서 사멸한 사물세계의 힘을 빨아 들이기 위해 두르는 평범한 것의 마지막 마스크이다(p138)... 혁명을 위한 도취의 힘들을 얻기, 이것이 초현실주의의 모든 책과 시도가 추구하는 목표이다. 초현실주의는 그것을 자신의 가장 고유한 과제라고 불러도 좋다. - P162

잔재가 남는다. 집단 역시 신체적이다. 그리고 기술 속에서 그 집단에게 조직되는 자연(physis)은 그것의 정치적이고 개관적인 현실에 따라 볼 때 저 이미지 공간 속에서만, 즉 범속한 각성이 우리를 친숙하게 만드는 그 이미지 공간에서만 생성될 수 있다. 그 자연 속에서 신체와 이미지 공간이 서로 깊이 침투함으로써 모든 혁명적 긴장이 신체적인 집단적 신경감응(kollecktive Innervation)이 되고 집단의 모든 신체적 신경감응이 혁명적 방전(放電)이 되어야만 비로소, 현실은 <공산주의자 선언>이 요구하는 것처럼 그 자체를 능가하게 될 것이다. - P167

우리들 앞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전개되고 있는 바로 그것에서 그(역사의 천사)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쉼 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만을 본다. 그는 산산이 부서진 것들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이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 - P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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