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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히드라 이야기
페르낭 브로델 지음, 김홍식 옮김 / 갈라파고스 / 2012년 3월
평점 :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는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 ~ 1985)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Civilisation materielle, economie et capitalisme>에 대한 입문서(入門書)다. 본문은 강의형식으로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내용을 파악하기는 역자가 작성한 해제(解題)가 더 좋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번 리뷰에서는 해제를 중심으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 담긴 전체적인 그림을 살펴보자.
1. 시간(Time) : 중층적 시간대에서의 변증법 구조
가. 장기지속(longue duree)의 역사
브로델은 역사를 '표층의 역사'와 '심층의 역사'로 구분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심층의 역사'에 주목하고 있다. 브로델에 따르면 장기 지속하는 심층의 역사가 인간의 조건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빙하의 90%가 수면 밑에 있으며 빙하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듯이, '무의식'이 '의식'을 결정한다는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 ~ 1939)의 이론이 브로델의 역사관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사진] 의식과 무의식(출처 : https://brunch.co.kr/@onestepculture/171)
'브로델은 단기적 시간대에 주목하는 역사를 "표층의 역사"라고 봅니다. 하지만 이 세계의 배후에는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장기 지속하는 "심층의 역사"가 자리 잡고 있다고 봅니다... 장기 지속하는 역사가 만들어내는 심층의 세계는 브로델에게서 크게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는, 인간의 조건을 결정하는 구조는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p151) ... 둘째, 장기 지속하는 심층의 세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또 다른 의미는, 브로델이 본격적으로 연구했던 주제는 아니지만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무의식과 관련됩니다.(p153)... 셋째, 장기 지속이라는 개념은 역사를 기술하는 내용이나 결과라기보다는 역사를 기술하기 위한 방법이 아닐까 하는 점입니다.'(p158)
나. 시간 지속의 변증법 dialectique de la duree
브로델은 세계를 움직이는 힘을 '표층의 역사'와 '심층의 역사' 의 대립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표층의 역사'를 움직이는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과 '심층의 역사'를 움직이는 '천천히 흐르는 시간'과의 대립이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 된다. 이러한 힘과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역사학 뿐 아니라 사회과학 방법론 전반에 걸쳐진 개념임을 브로델은 강조한다.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다중적이고 모순적 contradictoire인 여러 가지 시간, 그처럼 사회적으로 진행되는 시간의 지속은 과거의 실체일 뿐 아니라 씨실과 날실처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적 삶을 짜는 피륙입니다...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과 천천히 흐르는 시간, 이 둘 사이에는 활발하고 밀접한 대립 opposition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우리 역사가들이 보기에 이러한 대립이야말로 사회적 실제의 핵심에 존재하며 다른 어느 요소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p145)
다. 다중적(혹은 중층적) 시간대 temporalite multiple(p143)
이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과 '천천히 흐르는 시간'이 같은 시간대에 공존(共存)하며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기 때문에 우리는 '중층적 시간대'에서 살고 있다고 브로델은 설명한다.
'역사상 일어났던 모든 혁명은 짧은 시간의 힘이 긴 시간의 힘과 격전을 치르며 승리한 사례들입니다. 그만큼 엄청난 에너지가 수면 아래에 오랫동안 잠재해 있다가 짧은 기간안에 빠른 속도로 응집해서 폭발했음을 뜻합니다. 실패한 혁명은 반대로 빠른 속도로 응집하는 짧은 시간의 힘이 긴 시간의 힘에 굴복한 셈입니다... 브로델은 시간을 알기 위해 제삼의 참조점을 잡는 인식의 방향을 뒤집어서 사회적 실재를 알기 위해 시간을 참조점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참조점이 바로 중층적 시간대라는 "시간의 지도"인 셈입니다.'(p150)
2. 공간(Space) : 경제계(經濟界)
가. 삼층집 모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다루고 있는 모델은 물질생활을 기반으로 한 시장경제, 그리고 시장 경제 위에 자본주의가 위치하면서 계층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형태로 구성된다. 자급자족 경제를 '물질 생활'이라고 한다면, 교환이 발생한 이후 '경제 생활(시장경제)' 형태가 발생하게 된다.
'브로델은 14~15세기에서 18세기 사이 약 400 ~500년 동안의 유럽에 적용했던 여러 가지 모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삼층집 모델입니다. 맨 밑에는 물질생활이 있고, 그 위에 시장경제가 있고, 꼭대기에 자본주의가 위치한다는 경제 모델입니다. (물질생활 - 시장경제 - 자본주의)(p162)... 인간이 가족이나 마을 단위에서 자급자족하며 사느냐, 아니면 교환하며 사느냐는 기준에서 보면, "물질생활(물질문명 civilisation materielle)"은 거의 다 자급자족에 가까운 사용가치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브로델은 자급자족에서 탈피해, "교환가치의 문지방을 넘어서며서부터 경제가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이때부터 물질생활의 거대한 등판을 딛고 "경제생활 vie economique"이 시작됩니다.'(p169)
여기서, 자본주의는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한 일종의 특수한 형태로 단순한 경제 구조로 정의되기 어려운 문화적 실체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자본주의는 경제 영역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특수한 형태입니다. 그 실체는 인접한 영역과 그 영역들에 침투한 모습을 비추어 보지 않고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을 것이고, 그때에야 자본주의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날 것입니다.(p182)... 자본주의는 물질생활과 시장경제를 자신의 존재 기반으로 깔고 앉아 독점으로 높은 이익을 추구하는 무언가의 활동이다. 그러기 위해 기존의 사회 질서와 위계, 국가, 문화 등 온갖 영역에 침투하여 무언가의 사회적 구조물을 만들어 그와 결합해 존재하는 실체다.'(p183)
나. 경제계 economiemonde
또한, 브로델은 일정 공간 내에서 중심부-중간부-주변부의 구조를 가지면서 하나의 독립된 경제권을 다음과 같이 '경제계'로 정의하고 있다.
'경제계의 특징으로는 첫째, 경제계는 일정한 지리적 공간을 차지하며 그 공간의 한계를 이루는 울타리는 매우 천천히 변한다. 둘째, 경제계에는 하나의 핵, 즉 중심이 존재하며 이 핵이 경제계 전체의 분업을 조직하는 힘을 행사한다. 셋째, 경제계는 이 핵을 중심으로 생활수준의 높낮이가 갈리는 계층적 경제원(중심부, 중간부, 주변부)으로 분화된다는 것입니다.'(p163)
다. 삼층집과 경제계의 조합
'주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15 ~18세기의 자본주의를 분석할 때 도입한 삼층집 모델과 함께 생각해보면, 삼층집 모델을 지리적 공간에 횡적으로 펼치고 그 공간에 '중심부-중간부-주변부'라는 계층적인 지배/종속관계를 더한 것이 경제계 모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중심부에도 자본주의-시장경제-물질생활의 삼층집이 있고, 중간부와 주변부에도 각각 삼층집이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브로델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중심부의 최상층에 위치한 자본주의가 경제계 전체를 조직하는 힘을 발휘하는 곳이 됩니다.'(p189)
위의 삼층집과 경제계 모델을 브로델의 설명에 따라 조합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림] 삼층집과 경제계의 조합(by 겨울호랑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에서는 이처럼 브로델의 역사를 움직이는 힘과 경제 모델이 잘 정리되어 있다. 아마도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는 시간적으로 '표층의 역사'와 '심층의 역사'가 부딪혀서 만들어낸 힘(역사를 움직이는 힘)이 공간적으로는 '경제계'에'중심부-중간부-주변부'의 관계 속에서 어떤 작용을 하여 경제계가 확대 또는 축소되어 왔는지가 그려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론해본다. 구체적인 내용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통해 확인해 보면 될 듯하다. 이처럼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원서 3권(번역본 6권)에 해당하는 경제사상(經濟思想)의 큰 틀을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는 유익한 브로델 사상 입문서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