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에서 비극으로 -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 삼부작 위대한 순간 4
김기영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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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에서 비극으로 :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 삼부작>은  고대 그리스 비극 작가 아이스퀼로스 Aischylus의 비극 3부작 <오레스테이아 Oresteia> 작품인 <아가멤논 Agamemnon>, <제주(際酒)를 바치는 여인들 Choephoroi>, <자비로운 여신들 Eumenides>에 대한 해설서다. 책의 제목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신화인 <오디세이아 Odysseia>에 묘사된 '펠롭스 가문의 신화'가 '비극 悲劇'에서는 어떻게 그려지는지 차이점을 밝히고 주제를 찾아가는 내용이다.  <신화에서 비극으로>는 작품만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인상적이었던 두 내용을 중심으로 이번 리뷰에서 살펴보자.


1. 비극의 주인공  : 클뤼타이메스트라 Klytaimnestra


[그림] 남편 아가멤논을 살해하기 직전의 클뤼타이메스트라 (출처 : https://erprofessor.wordpress.com/2016/12/)


 3부작의 첫 작품 <아가멤논>의 주인공은 아가멤논의 아내 '클뤼타이메스트라'이다. 저자는 <오디세이아>에서는 아가멤논 살해의 주인공이 아이기스토스임에 반해 비극에서 아가멤논의 살해는 클뤼타이메스트라에 의해 주도적으로 시행되고 있다는 점을 비극과 신화의 가장 큰 차이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클뤼타이메스트라는 극(劇)의 중심에 서게 된다.


 '로고스의 구사 능력은 호메로스 서사시에서 볼 수 있듯 아킬레우스나 오뒷세우스와 같은 영웅이 지닌 덕목이다. 이러한 능력을 클뤼타이메스트라가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의 캐릭터에 남성 영웅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음을 의미한다.'(p64)


 '아가멤논은 절제하는 자에서 휘브리스 hybris를 저지르는 자로, 승리한 정복자에서 아내의 손에 죽는 패배자로, 희생제물을 바친 자에서 희생제물로 뒤바뀌는 것이다. 이러한 반전 드라마를 연출하는 자가 바로 클뤼타이메스트라이다. 무지한 승리자 아가멤논을 조종하여 과거 죄를 소환하고 그 죄를 벌하는 걸 정당화하는 과정을 우리 눈앞에 연극적으로 펼쳐 보이기 때문이다.'(p79)


'아가멤논의 살해 장면은 무엇보다도 남성이 어떻게 여성에게 정복되는지 잘 보여준다. 이때 클뤼타이메스트라의 성격이 매우 돋보인다. 그녀는 두 가지 무기를 가진 존재라 하겠다. 로고스를 잘 구사하여 남을 속이고 의사소통 체계를 통제하고 지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마치 남성 영웅처럼 도끼를 사용해 단호하고 무자비하게 남편을 살해해 복수한다.'(p90)


2. 다신(多神)에서 유일신(唯一神)


 <아가멤논>에서 남편을 살해한 부인 클뤼타이메스트라는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 아들 오레스테스에 의해 복수를 당한다. 아버지의 원수인 어머니에게 복수하는 문제는 오레스테스에게 고통스러운 선택의 문제로 다가온다. 이러한 선택의 문제가 후대에 세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 ~1616)의 <햄릿 Hamlet>에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널리 잘 알려져 있다.


 '오레스테스의 복수는 아폴론의 명령을 따른 것이지만 모친을 살해한 복수라서 복수의 여신들의 추격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오레스테스의 복수에는 아폴론과 복수의 여신들 간의 갈등이 숨어 있는 것이다.'(p132)


[그림] 어머니 클뤼타이메스트라를 살해하는 오레스테스(출처 : https://es.pinterest.com/pin/373728469061639590/)


 '뤼타이메스트라 살해는 한편으로 아버지를 위한 복수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모친 살해라는 반인륜적인 범되이다. 오레스테스가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를 죽여 복수하면 복수의 여신들에게 고통받게 될 것이다.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924행), 반면 아버지를 위해 복수하지 않고 어머니를 살려주면 아버지가 보내는 복수의 여신들에게 고통받게 될 것이다.(925행) 정말로 오레스테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 상황에 처해 있는 셈이다. "어찌해야 하지?"(899행)하며 오레스테스가 외친 말은 "오레스테이아 삼부작" 전체를 관통하는 대사라 하겠다.'(p121)


  새로운 질서를 상징하는 '아폴론'과 전통적인 질서를 상징하는 '복수의 여신' 들 사이에서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하는 고민이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의 다른 하나의 주제라고 책에서 말하고 있지만 여기서 다른 생각도 덧붙여 해본다. 


 비록 오레스테이아 3부작의 마지막인 <자비로운 여신들> 속에서는 화해로 마무리되지만, 인류의 장기적인 선택은 '신의 죽음'이 아니었을까. '다신 多神'의 서로 다른 명령 속에서 갈등하기 보다는 인간이 선택한 '신 神'을 앞세워서 신의 수를 차츰 줄여나가는 것이 인간의 역사가 아니었는지. (우리는 신의 이름으로 행한 여러 종교 전쟁을 역사와 현실 속에서 확인하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 1900)에 와서는 남은 유일신마저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없애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명령을 내린 신(神)을 모두 없앴다면, 신의 존재를 대신하는 것이 다음 수순인가하는 생각도 짧게 해본다. (호모 데우스Homo Deus ?) 이 부분은 보다 깊은 공부가 필요할 것같아 이정도로 마무리를 짓고 다음 과제로 넘기자.


3. <오레스테이아> 3 부작의 플롯과 주제 그리고 결과 


  다시 작품으로 돌아와서, 작가가 <신화에서 비극으로>에서 말하고 있는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자식으로 복수하는 분노'라는 플롯 속에서 '고통을 통한 배움'이라는 주제로 요약될 수 있다. 지금도 주말 드라마에서 반복되는 구조와 주제를 생각해보면 그리스 비극 안에 담겨진 보편성은 시대와 공간을 넘어선 감정임을 느끼게 된다.


 '"자식으로 복수하는 teknopoinos 분노"라는 말은 "오레스테이아 삼부작" 전체를 관통하는 플롯, 다시 말해 세대를 거쳐서 이루어지는 복수의 역사를 잘 암시한다.(p55)... '"고통을 통한 배움"은 그리스어로 pather mathos인데, 인간이 행위하고 나서 그 결과로 고통을 겪으며 배움에 이르게 된다는 말이다...이 "고통을 통한 배움"은  "오레스테이아 삼부작"'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인데, 이는 오레스테이아의 줄거리를 생각해보면 잘 알 수 있다.'(p61)


4. 그리스 비극의 정치 드라마 특성


 그렇지만, 그리스 비극에는 이러한 보편적인 감정만 담겨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 비극이 가진 정치적인 면 때문인데, 저자는 그리스 비극의 정치적인 면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극의 결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첫째, 도시국가가 비극 공연을 조직하고 재정적 지원을 관리한다... 둘째, 대(大)디오뉘시아 축제의 개막식 생사에서 도시국가의 이데올로기가 강조되었다... 셋째, 축제에서 공연된 비극 작품은 도시국가 체제의 수호와 그 질서를 메세지를 전달하는 경향이 있다.'(p23)


 '"오레스테이아 삼부작"의 실제 결과는 무엇일까? 외교와 정치와 종교의 위대한 기원을 밝히는 것이다. 첫째, 외교적으로는 아르고스와 아테나이의 동맹 관계를 확인했다. 둘째, 혈족간의 살인을 재판하는 아레오파고스가 창설되었다. 셋째, 자비로운 여신들, 즉 존엄한 여신들의 제의가 만들어졌다.'(p159)


 아테나이를 관장하는 여신 아테나(Athena)가 아르고스(Agros)의 새로운 지배자인 오레스테스 재판 시 한 표(標)를 줘서 그에게 무죄를 주었다는 것을 통해 '아르고스-아테나이'의 동맹관계를 재확인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부분은 당대 그리스의 정치적 배경을 통해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지도]뮈케나이(Mycenaean) 문명의 중심지 아르고스(출처 : http://m.blog.daum.net/kjs4311/8519546)


 비극이 씌여진 당시 아테나이는 스파르타와 그리스 패권을 두고 대립관계에 놓여 있었고, 전통적으로 스파르타와 대립관계에 있었던 아르고스와의 동맹은 아테나이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스퀼로스는 비극을 통해 아테나이와 아르고스가 전통적인 동맹국임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다분히 '프로파간다 propaganda'적인 면이 포함됨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더 들어가 기원전 1600년부터 1100년까지 에게 해 문명의 중심지였던 '아르고스'는 고대 중국에 있어 '주 周'나라와 같은 위치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고대 춘추시대(春秋時代)에 패자(覇者)를 자처하던 이들이 주나라 왕실을 등에 엎고 전하를 호령했던 것처럼, 페르시아 전쟁 후 새로운 제국(帝國)을 지향하던 아테나이 역시 뮈케나이 문명의 중심지 아르고스를 뒤에 엎고 패도(覇道)를 구현하고자 했던 것은 아닌지 추측해본다. 


 이처럼 그리스 비극에는 인류의 보편적인 면과 당대의 현실이 같이 녹아져 있음을 <신화에서 비극으로>를 통해 알게 된다. 또한, 고대 그리스 신화와 비극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또한 의식하게 된다. 이처럼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작품 속에서 느끼지 못했던 부분을 한 걸음 떨어져 살펴볼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는 면에서 <신화에서 비극>으로는 아이스퀼로스 비극 <오레스테이아 3부작>에 대한 좋은 해설서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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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7-08-22 0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펠롭스 가문의 저주‘로 시작되는 ‘아가멤논의 비극‘이 오랫동안 ‘신화‘나 ‘고대 그리스 비극‘ 속의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언젠가부터 점점 더 ‘실존했던 역사‘로 바뀐 듯합니다. ‘아가멤논‘에 관한 ‘유적과 유물‘을 보면 이건 도저히 ‘신화 속 이야기‘로만 볼 수 없겠다 싶더군요. http://blog.aladin.co.kr/oren/6839528

겨울호랑이 2017-08-22 15:4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oren님 말씀처럼 이런 비극적인 이야기가 허구가 아닌 현실이었다면, 우리가 상상하듯 옛날이 그리 좋은 시절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oren님 좋은 글 알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AgalmA 2017-08-25 03: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원죄는 아가멤논에게 있었죠. 신탁이 분명 부조리함에도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고 카산드라를 전리품으로 데리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오니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얼마나 빡치겠음요.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부정한 관계를 내세워 아가멤논을 살해하는 교활한 여자처럼 묘사하는 글도 종종 보는데(그림들도 대개 그걸 강조하죠. 본문에 제시된 그림도 그렇고요. 정부가 그녀 뒤에 있고 아가멤논은 무고하게 묘사되고 있죠.) 딸 이피게네이아의 죽음이 가장 직접적인 원인였죠. 결국 아버지가 살해되자 또다른 딸 엘렉트라가 어머니를 미워하고 오레스테스가 어머니를 죽이는 원죄의 소용돌이....이 스토리는 문학에서도 현실 속 사건에서도 여전히 다양한 변주로 볼 수 있죠. 신화는 인간의 감정과 행동심리학을 정말 잘 보여준다니까요. 모두가 고통 속... 아아)) 사주한 신들을 빼도 여전하니 사람 삶이라는 것은 얼마나 질긴 고리 속이란 말입니까.

겨울호랑이 2017-08-25 07:11   좋아요 1 | URL
네.. AgalmA님 말씀처럼 인간의 hybris 때문에 발생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곳곳에 나오지요... 오이디푸스 신화도
그런 악순환 중 하나라 생각됩니다. 그래서일까요. 신화에서는 인간의 hybris에 대해 심판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지요... 그런데 신화에 나오는 ‘신의 hybris‘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네요... 이것을 사회적이면서 구조적인 면으로 파악해야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다른 한 편으로 ‘신의 hybris‘에 대한 이러한 관용이 중세 이후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많은 범죄에게 면죄부를 준 것은 아닌가도 생각하게 됩니다..^^:

sb 2018-11-09 1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인간이 행위하고 나서 그 결과로 고통을 겪으며 배움에 이르게 된다‘ 라는 것이 오레스테이아 삼부작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라고 했는데 삼부작을 읽어보면 아가멤논, 오레스테스 둘다 선택으로 인해 고통을 얻지만 그 고통으로 인해 얻는 배움에 대해선 나오지 않는 것 같은데 여기서 말하는 배움이란 무엇인가요?

겨울호랑이 2018-11-09 14:01   좋아요 0 | URL
오레스테이아 삼부작의 마지막 편인 <자비로운 여신들>편에서 오레스테스는 아테나를 부르면서 고통을 통해 자신이 정화의 방법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자비로운 여신들> (276 ~285) ‘세월이 지나면 모든 것이 정화되기 마련이니까요‘라는 그의 말 속에서 인위적인 복수 대신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것이 더 나은 방법임을 알게된 것이 오레스테스의 배움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sb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