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버트란드 러셀 지음 / 사회평론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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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는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 ~ 1970)의 종교(宗敎)관련 에세이(essay)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는 종교에 대한 러셀의 생각이 담긴 여러 글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제목인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 대한 주제와 연관된 글 두편을 이번 리뷰에서 살펴보자.


 [그림] 버트런트 러셀( 출처: http://bonlivre.tistory.com/474)


1.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The Existence of God


 우리는 러셀과 F.C코플스턴(Frederick Charles Copleston, 1907 ~ 1994) 예수회 신부간 이루어진 토론을 정리한 이 내용을 통해 기독교의 신 존재(存在)에 대한 한 내용을 확인하게 된다. 코플스턴 신부는 많은 존재(存在)들이 존재 이유를 스스로 갖지(內在) 못하여, 존재 이유를 밖에서 찾게 되고 이러한 존재는 반드시 실재하는 존재이어야 한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한다.


'코플스턴 : 무엇보다도 나는, 세상에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자체 속에 지니지 못한 존재들이 적어도 일부는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둘째로, 세상은 실제의 혹은 상상의 총체이거나 개별 대상들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는데 그 어느 것도 오로지 자신의 존재 이유만 지닌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대상이나 사건들이 존재하는 이상, 어떤 경험의 대상도 자체속에 존재 이유를 가지지 못하는 이상, 그 이유는 대상들의 총체는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이유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반드시 실재하는 존재이어야 합니다.'(p247)


코플스턴 신부의 이런 존재이유의 외재성(外在性)에 대해 러셀은 '실체를 포함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분석적 명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분석적 명제에서 '주어(主語)'가 실재한다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우리는 실재의 의미를 '술어(述語)'에서만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러셀의 기술 이론 (description theory)에서 지적한  '황금산 문제' 또는 '웨이틀리의 문제'가 여기서 다시 언급된다.


'러셀 : 신부님의 이론에 답하는 가장 적합한 출발점은 필연적 존재의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필연"이란 말은 명제에 붙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나는 주장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분석 명제 같은 것들 다시 말해 부정하면 자기 모순이 되는 그런 것에만 붙여야겠지요. 만일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면 자기 모순이 되는 존재가 있다고 하면 나로서도 필연적 존재를 인정할 수 있을 수 없겠지요. (p248)... 신부님이 지금까지 하신 얘기는, 제가 보기엔 우리를 존재론적 증명으로 되돌려 놓는 것 같습니다. "실재를 포함하는 존재가 있으며 따라서 그의 실재는 분석적이다."고 하는 증명 말입니다. 나로서는 그건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실재의 의미가 무엇이냐의 문제를 제기하는데 여기에 대해 나는, 이름 붙여진 주사(主辭: subject)가 실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으며 서술된 주사에 한해서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상 그 실재가 술어(術語 : predicate)가 아닌 것은 너무도 명백합니다.'(p251)


 기술이론의 내용을 신(하나님)의 실재 문제 측면에서 접근한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하나님'을 하나의 주어(명사)로 놓았을 때 '세상의 원인'과 '실재'는 각각 이를 설명하는 술어(동사/형용사)에 해당하고, 이들 술부들은 각각 주어를 설명할 뿐이지 이들간 관계를 맺어질 수 없다는 것이 러셀의 주장이다.


'"세상의 원인은 실재하는가?" 라는 질문은 분명 의미가 있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신부님이 "그렇다, 하나님은 세상의 원인이다."고 말한다면 그 경우 당신은 하나님을 고유 명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실재한다"는 것은 의미를 가지는 진술이 아닐 것이며, 내가 주장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 혹은 저것이 실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분석 명제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p252)


 러셀의 이러한 내용에 대해 코플스턴 신부는 동의하지 않으면서 토론은 이후 평행선을 달리게 된다. 코플스턴 신부의 주장 속에는 기독교의 원인론과 목적론에 대한 주장이 담겨 있는데 러셀은 이에 대해 매우 날카롭게 비판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내용 첫 단편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 자세히 담겨 있다.


2.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 담긴 신 존재에 대한 러셀의 물음


 러셀은 가톨릭 교회는 하나님의 존재는 순수 이성에 의해 입각될 수 있다는 교리에 물음을 던진다. 코플스턴 신부와의 대담은 이러한 가정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 많은 분량을 기독교의 신 존재에 관한 주요 원인인 제1원인론, 자연 법칙론, 목적론, 신성을 위한 도덕론, 불의 치유론 등에 대해 물음을 제시하는 것에 할애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C.)의 철학을 바탕으로 성립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25 ~ 1274)로 대표되는 스콜라 철학(Schola 哲學)에 대한 러셀의 물음은 다음과 같다.


가. '제1원인론'에 대한 물음


 '아마도 가장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운 이론은 제1원인론일 것이다 (이 이론에서는 우리가 보는 이 세상 만물에는 모두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의 사슬을 따라 점점 깊이 들어가다보면 최초의 원인에 도달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그 제일 마지막의 원인에 하나님이란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누가 날 만들었는가?] 하는 물음에는 해답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즉시 [누가 하나님을 만들었는가?] 라는 보다 깊은 물음이 제기되기 때문이다."'(p22)


나. '자연 법칙론'에 대한 물음


'"그러나 자연 법칙은 사물들이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기술하는 것으로서 사물의 실제 움직임을 기술하는데 지나지 않으므로 사물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움직이도록 명령하는 자가 반드시 있다고 말할 순 없다. 왜냐하면 그런 존재가 있다고 가정하는 순간 곧 다음의 의문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왜 그러한 자연 법칙들만 만들고 다른 법칙들은 만들지 않았는가?" 만약에 하나님 자신의 기분에 따라 그렇게 된 것일 뿐 다른 이유가 없다고 한다면 결국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들도 있다는 뜻도 되고 그렇게 되면 자연 법칙의 일관성은 깨어지고 마는 것이다.'(p25)


다. '목적론'에 대한 물음


'세상 만물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에 꼭 맞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만에 하나 이 상태에서 조금만 달라진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으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목적론이다... 다윈 이후로 우리는 생물이 각자의 주위 환경에 적합하게 된 이유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즉, 환경이 생물에 맞추어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생물이 환경에 맞추어 변해왔기 때문이며 이것이 바로 적응의 기본 원리이다. 거기에 목적의 증거 따위는 전혀 없다.'(p28)


라. '신성을 위한 도덕론'에 대한 물음


'칸트의 도덕론에는 온갖 종류의 형태가 있는데 그중 하나에서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옳고 그름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나의 관심사는 옳고 그름에 차이가 있다고 확신하게 되면 곧바로 다음과 같은 의문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점이다. "그럼 그 차이는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생기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만일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생기는 거라면  하나님 자신에게는 옳고 그름이 아무 차이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하나님에게는 선(善)이라는 말 자체가 벌써 아무 차이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p29)


마. '불의 치유론'에 대한 물음 


'하나님의 존재는 이 세상에 정의를 가져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 이 한편에는 너무도 큰 불의(不義)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주 전체에 정의가 존재한다고 믿기 위해서는 이 지구상 삶의 불균형을 바로잡아주는 내세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긴 안목에서 결국 정의가 존재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있어야 하며 천국과 지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만일 여러분이 이 문제를 과학적 견지에서 본다면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결국 나는 확률에만 입각해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이 세상이 우주 전체의 평균적 표본일 것이고 그러니 여기에 불의가 존재한다면 다른 곳들에도 역시 불의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다시 말해, '여기 이 세상에서 우리는 엄청난 불의를 본다. 그렇다고 한다면 정의가 세계를 다스리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p30)


3. 종교란 무엇인가와 우리의 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물음을 제시한 러셀은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들의 두려움 때문이고, 이러한 두려움으로부터 잔인함이 파생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두려움, 큰 공포가 사람들을 잔인하게 만든다는 것을 우리는 여러 현상을 통해 확인한다. 두려움으로부터 잔인함이 나온다면, 종교의 기반을 두려움이라고 했을 때, 종교가 잔인함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러셀의 주장이 된다. 


 '종교의 일차적이고도 주요한 기반은 두려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앞서 말한 것처럼, 여러분이 온갖 곤경이나 반목에 처했을 때 여러분 편이 되어줄 큰형님이 있다고 느끼고 싶은 갈망이기도 하다.... 두려움은 잔인함의 어버이다. 따라서 잔인함과 종교가 나란히 손잡고 간다고 해서 놀랄 것은 전혀 없다.'(p40)


 러셀은 이러한 종교의 문제에서 벗어나 결국 우리가 두려움 없는 직시와 자유로운 지성을 통해  훌륭한 삶을 추구할 수 있다고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통해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의 선한 구석, 악한 구석, 아름다운 것들과 추한 것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되 두려워하지는 말자. 세상에서 오는 공포감에 비굴하게 굴복하고 말 것이 아니라 지성으로 세상을 정복하자. 신에 대한 모든 관념은 동양의 고대적 전제주의에서 나왔다. 자유인들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개념인 것이다... 두려움 없는 직시와 자유로운 지성이 요구된다. 죽어버린 과거만 돌아보고 있을 게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이 필요하다.'(p41)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 제기된 신 존재에 대한 러셀의 물음은 과학적이고 치밀하다. 러셀의 물음에 대해 대답이 명확하지 못한 이유는 '신 존재 증명'이 명사적인 의미의 신(神)을 지시하는 선에서 멈췄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기존 교단의 논리에 대해 철학적 비판을 가한 후 러셀은 다음과 같은 말로 사람이 지향해야할 삶을 제시한다.


"The good life is one inspired by love and guided by knowledge." - 러셀 - 

'훌륭한 삶이란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이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 제시된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훌륭한 삶을 지향하는 러셀의 철학은 우리에게 많은 통찰을 제시한다. 종교가 가져온 폐해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의 지향점을 찾자는 러셀의 철학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면, 러셀의 논리를 우리는 비판없이 수용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러셀은 '신에 대한 모든 관념은 동양의 고대적 전제주의에서 나왔다'고 책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종교의 모든 폐해가 서양의 전통이 아니라, 동양에서 흘러든 이른바 적폐(積弊)로 규정하는 러셀의 글 속에서 '기독교의 폐해'를 동양으로 넘기고 베이컨(Francis Bacon, 1561 ~1626)이래 서양에서 강조된 과학적 탐구자세를 강조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현재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생겨난 기독교가 유럽으로 전파된 이후 많은 공과(功過)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후 중세(中世) 천 년을 지내면서 신(God)을 강조한 기독교는 유럽에 많은 영향을 미치면서 유럽 전통(傳統)의 주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신에 대한 관념을 동양적인 사상으로만 몰아갈 수 있을까. 또한, 러셀이 말하는 훌륭한 삶에서 '사랑'이라는 개념 역시 세계 문명에 공통된 황금률(黃金律)에 기반했다는 사실과 함께 서양의 많은 '지식'이 '신의 시대'라 불리는 중세(中世) 1,000년의 시간적 영향하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가 지향하는 '훌륭한 삶'이 과연 서구의 과학적인 전통만의 산물인가하는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이러한 러셀 인식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앞선 러셀의 통찰과 그가 지적한 문제가 현재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에서 기독교 신앙의 유무와 관계없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는 유익한 책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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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4-23 17: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내용이 제가 생각한 것과 다르게 어려워 보이는군요... ^^;;

겨울호랑이 2017-04-23 17:50   좋아요 0 | URL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는 전체 15편의 짧은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는데,2개 장(1장과 13장)을 제외한 다른 13개 장의 내용은 편하게 읽으실 수 있을 것 같아요. 1장과 13장의 2개 장은 ‘존재론‘, ‘인식론‘ 관련한 내용이라 정리가 필요할 거 같아 이번 리뷰를 썼어요..^^; 주제는 반복되는 부분이 많아 다른 장을 통해서도 종교에 관한 러셀의 생각을 충분히 맛보실 수 있을 것 같네요....

AgalmA 2017-04-24 16: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양 탓으로 돌려 버리다니 하이데거가 반유대주의로 빠지는 것처럼 황당하네요 ㄷㄷ

겨울호랑이 2017-04-24 16:35   좋아요 1 | URL
^^: 그러게요. 러셀 형님을 그리 안 봤는데, ‘저엉말~ 실망입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