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당평전 1 (양장) - 일세를 풍미하는 완당바람, 학고재신서 31
유홍준 지음 / 학고재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완당(阮堂)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 1786 ~ 1856)의 또 다른 호(號)다. 이 중에서 '완(阮)'은 청(淸)나라 완원(阮元 ; 1764 ~ 1849)으로부터 받은 호이며, 중년기까지 '완당'이라는 호를 '추사'보다 더 즐겨 사용할 정도로 그들과 많은 교류를 쌓았다. 그는 당대 청나라 문인들과 많은 교류를 통해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지식인이었고, <완당평전1>에서는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나 해외 유학파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며, 갑작스럽게 몰락한 완당(阮堂)의 모습이 그려진다.

 

<완당평전1>에서는 김정희의 생애 중 출생(1786)에서 제주도 유배 초기인 1844년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다. 김정희는 경주 김씨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1805)가 12촌 대고모이며, 증조할아버지 김한신(金漢藎 ; 1720 ~ 1758)이 영조의 둘째딸인 화순옹주(和順翁主)와 결혼할 정도로 명문가였기에 남부럽지 않게 공부할 여건을 갖출 수 있었다. 이러한 집안 배경으로 그는 1809년 마침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임명된 아버지 김노경(金魯敬)를 따라 연경으로 가게 된다. 약 2개월동안 연경(燕京)에서 머물면서 그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완원, 옹방강(翁方綱 ; 1733 ~ 1818)과 같은 당대 문인들을 알게 되면서 쌓은 네트워크(network)는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 주었지만, 지나친 자부심은 동시에 많은 적(敵)도 함께 만들게 되었다.

 

<완당평전1> 중반부에서는 이처럼 기고만장한 김정희의 모습이 그려진다. 저자인 유홍준 교수는 김정희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며, 김정희의 자부심은 실력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변명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책을 읽는 동안 끊임없이 중국을 동경하는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에 물든 김정희의 모습이 불편함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특히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 1705 ~ 1777)의 글을 비판하였는데, 그 이유를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북비남첩론에 입각하여 북파를 지향하는 완당으로서는 남파에 뿌리를 둔 원교를 비판할 수밖에 없었으며, 원교의 시각이 조선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해, 국제적 시각에서 글씨를 논하고 예술을 펼치고 있던 완당이 보기에 못마땅했던 것이다.(p324)'

 

당대 강대국이었던 청(淸)나라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안목을 높였기에, 우리나라에서 발전한 문화를 얕보는 그의 사대(事大)사상은 지금도 우리사회에 그대로 이어지는 것 같아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저자는 <완당평전1>에서는 대둔사 '대웅보전' 현판을 쓴 원교 이광사의 글과 '무량수각' 현판을 쓴 완당 김정희 글을 비교하면서 독자들에게 김정희를 평가할 기회를 제공한다.

 


[그림] 대둔사 <대웅보전> 현판 (출처 : http://blog.daum.net/seokkim21/84)

 

대둔사 <대웅보전> 현판 : 원교 이광사가 신지도에 유배되어 있을 때 써준 그의 대표적인 현판 글씨로 유려한 필획의 멋과 힘있는 운필이 동시에 느껴진다. 그러나 완당은 글씨에 속기가 있다고 생각하여 초의에게 떼어내게 했다. (p338)

 

 

[그림] 대둔사 <무량수각> 현판 (출처 : http://blog.daum.net/seokkim21/84)

 

대둔사 <무량수각> 현판 : 대둔사 대웅보전 오른쪽에 있는 선방 건물로, 이 현판은 완당이 제주도로 유배가면서 써 준것이다. 예서체에 멋을 한껏 넣었는데 획이 대단히 기름지고 윤기가 난다. (p339)

 

글을 잘 볼 줄 모르지만, 이 두 글은 서로 다른 멋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석가탑과 다보탑처럼 서로 다른 미(美)를 갖춘 두 글에 대해 쉽게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김정희는 자신은 당대 선진국인 청나라에서도 인정받았기에 당대 최고라는 자부심을 스스로 가지고 있었고 이는 극단적인 '원교' 비판으로 이어졌다. <완당평전1>에서는 이러한 김정희의 모습을 글과 그림을 통해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기회를 통해 지금도 우리 사회에 팽배한 '문화사대주의(文化事大主義)'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김정희의 모습이 바뀌게 되는 계기가 바로 '제주도 유배'시기였다.

<완당평전1>에서는 제주도 유배 초기 김정희가 겪은 어려움을 마지막으로 그리고 있다. 그가 이 어려움을 통해서 무엇을 느꼈는지가 잘 나타난 그림이 유명한 <세한도(歲寒圖) ; 1844)>다.

 

[그림] 세한도( 출처 : http://blog.daum.net/yjm88/17954437)

 

<세한도>는 제주도 유배중에도 지속적으로 책을 보내주었던 제자 이상적에게 고마움과 자신의 뜻을 담아 보낸 그림이다. 이 그림과 함께 '날이 차가워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松柏)가 여전히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자신의 뜻을 담아 이상적에게 보냈다.'(p395)

 

<세한도>에 담긴 글을 통해서 '제주도 유배'는 김정희에게 '서리가 내리는' 충격을 주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서리는 김정희가 청(淸)의 깊은 영향을 받은 인간 '완당(阮堂)'에서 독자적인 '추사(秋史)'로 변모하게 한 계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다산과 완당의 귀양살이를 비교하면서 다산은 귀양살이를 통해 현실을 발견했는데 완당은 그렇지 못하다고 말하고 한다. 그러나 완당은 귀양살이에서 자아를 재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다. (p332)'

 


[그림] 추사체 (출처 : http://blog.daum.net/yjm88/17954437)

 

'추사체는 대단히 개성적인 글씨다. 일반적인 아름다움, 평범하고 교과서적인 미감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추사의 글씨에서 차라리 괴이함과 당혹감을 느끼는 것이 정상이다.' (p12)

 

<완당평전1>에서는 인간 김정희의 삶과 함께 시기별 글과 그림등을 폭넓게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인간 삶의 평면적인 모습이 아니라 예술가로서 시기별로 변모하는 작품 해설은 예술가로서 김정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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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14 19: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완당 평전》을 읽어보지 않지만, 별점 세 개를 주고 싶습니다. 김정희 평전을 유 교수가 최초로 썼다는 점, 그리고 방대한 분량을 정리한 노력을 높히 평가받아야 하지만, 문제점은 책의 오류가 많습니다. 김정희가 그린 것인지 확실치 않은 그림을 김정희 작품으로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평전의 오류를 지적한 분이 박철상 씨입니다.

유 교수가 세 권짜리 평전을 절판시켰고, 한 권으로 정리한 개정판을 펴냈습니다.

유 교수가 개정판을 사모님께 보여드렸답니다. 사모님의 한줄평(?)이 압권입니다.

˝이렇게 줄일 거면 왜 세 권짜리로 펴냈수?˝

*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432611

정보의 양이 많다고 해서 그 책이 잘 썼다거나 내용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겨울호랑이 2017-01-14 20:10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주말을 맞아 본가에 머물면서「완당평전」1,2권이 있어 읽고있습니다. ㅋ 어쩐지 절판서적이 되었더군요.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cyrus님 새로운 사실을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yureka01 2017-01-15 0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700년대와 1800년대 초기에 많은 학자들이 유럽을 갔었더라면 또 어땠을까요..ㅎㅎㅎㅎ

겨울호랑이 2017-01-15 07:26   좋아요 0 | URL
^^: 어려운 가정입니다만 만일 그럴 수 있었다면, 일본보다 앞서 서구화를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드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