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발한다 - 해제ㅣ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의 양심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7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고발한다>는 1894년부터 1906년까지 진행된 '드레퓌스 사건' 관련 에밀 졸라의 편지를 묶은 글이다. 드레퓌스 사건은 1894년 10월 31일 유태계 프랑스 장교의 간첩사건이다. 당시 프랑스는 보불전쟁(1870년) 패배 이후 사회에 만연한 대독(對獨) 적대감과 반(反)유태주의가 팽배했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드레퓌스 사건은 군대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문제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그림1] 드레퓌스의 군적박탈식(출처: 위키피디아)



드레퓌스의 복권으로 해결되는 '드레퓌스 사건'의 역사적 의의를 책 해제의 내용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p223)


첫째, 드레퓌스 사건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벌어진 봉건 보수 세력과 공화 진보 세력의 마지막 대혈투라고 할 수 있으며, 둘째, 드레퓌스 사건은 유태인의 정체성 확립과 이스라엘 건국의 계기를 마련했고, 셋째, 이 사건은 언론을 통한 여론 조작이라는 현대적 양상을 보여주었으며, 넷째, 드레퓌스 사건이 보여준 또 하나의 현대적 양상은 지식인의 정체성 확립과 사회 참여 전통의 마련되었다는 것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를 통해 나타난 20세기 초반 프랑스를 통해 우리의 현재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1. 반(反)유태주의 : 종북몰이, 빨갱이


독일에게 패배한 프랑스는 독일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리게 되고 결국 1914년 제1차 세계대전(世界大戰)으로 실현된다. 이미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勃發) 20년 전 프랑스에 몰아치고 있던 극심한 극우(極右)주의는 '반유태주의'로 표출되었다. 


'프랑스여, 그대는 아직도 그대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는가? 그대는 바로 '교회'로 가고 있다. 그대는 과거, 가장 총명한 그대의 자식들이 피와 지성으로 물리친 바 있는 배척주의와 신정정치의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 오늘날 반유태주의의 책략은 간단하기 짝이 없다. 가톨릭 교회는 민중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노동자들을 묶어내고 성지 순례를 활성화하려 했지만 허사였고, 민중의 마음을 다시 얻고 민중을 제단 앞에 무릎 꿇리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그런데 상황이 민중에게 반유태주의적 광기를 불러일으켰고, 광신주의에 중독되게 했으며, 거리로 뛰쳐나가 이렇게 외치게 했다. "유태인을 타도하자! 유태인을 죽이자!"(p79) - 프랑스에게 보내는 편지 中 -'


2. 정신착란의 공범자 : 친일 기득권 세력(친군부, 유신 세력)


19세기말~ 20세기 초에 프랑스에 만연한 반유대주의에 대해 당시 기득권들은 이를 방치하고 오히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활용한다. '드레퓌스 사건'은 이러한 배경하에서 발생한 일종의 마녀 재판이었던 셈이다. 에밀 졸라는 사건 뒤에 숨어있는 이들을 지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프랑스여, 어떻게 그대의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 그대의 해방된 민중이 이 위기 속에서 자신을 휘감는 정신 착란이 무엇인지 모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들이 공범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기만당했을 뿐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배후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편 군사독재이며, 다른 한편 성직자들의 반동이다.(p84) - 프랑스에게 보내는 편지 中 -'


3. 언론의 여론 조작 : 종합편성채널(종편)


'당시 언론은 이미 여론의 전달자가 아니라 여론의 제조자가 되어 있었다.... 여기서 꼭 짚어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 반드레퓌스파 신문은 드레퓌스파 신문과는 달리 여론 조작을 위해 사실의 왜곡까지 서슴지 않았다는 사실 말이다. 그들에게서 군국주의와 반유태주의에 기반을 둔 파시즘적 선동 정치의 원형을 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p224) - 역자 해제 中 -'



[그림2] 로로드지 1면에 실린 에밀졸라의 격문 '나는 고발한다'(출처: 위키피디아)


4. 드레퓌스 사건의 결말과 에밀 졸라의 죽음


드레퓌스 사건과 현대 우리는1894년과 2016년이라는 100여년의 시간차이와 유럽-아시아라는 공간적 차이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드레퓌스 사건'은 현 시점의 우리에게도 의미있는 사건이라고 생각된다. 1894년 사건 발생 후 1906년 드레퓌스의 복권이 이루어지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에밀 졸라는 이 사건으로 생전에 재판 비용, 작품 판매 부수의 격감, 망명 생활, 집필 시간 등으로 고통받다가, 결국 의문의 가스사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기에 이러한 사건의 결말을 보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그가 생전에 남긴 글을 통해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을 찾아 볼 수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국 역사의 과업은 완수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증오의 결실이 아니라 우리가 씨를 뿌린 선의와 정의와 무한한 희망의 결실일 수밖에 없다. 그 결실은 계속 풍요로워져야 한다. 물론 오늘 우리는 그 결실의 풍요로움을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p141).... 이전에 프랑스가 세계에 자유를 주었듯, 이후에 프랑스가 세계에 정의를 주는 날, 철권을 휘두르는 절대 권력은 반드시 절대 몰락의 길을 걸으리라.(p142) - 정의 中 -'


'인간이란 요술처럼 하루 만에 국가를 다시 일으켜 세워 신성하게 만들 수는 없는 모양입니다. 그런 눈부신 승리는 단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숱한 노력과 고통을 통해서만 달성되는 모양입니다. 투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 걸음 전진할 때마다 하나의 고통이 따를 것입니다.(p191) - 공화국 대통령 에밀 루베씨에게 보내는 편지 中 -'


최근 프랑스가 2015년 1월 IS에 의해 샤를리 에브도 테러(Attentat contre Charlie Hebdo)가 발생하여 프랑스의 톨레랑스(tolerance)정신이 예전만 못해졌다는 말을 듣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자유, 평등, 박애를 추구하는 가치마저 빛을 잃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인류 보편의 가치를 얻기 위해 대혁명(大革命)과' '드레퓌스 사건' 과 같은 크고 작은 대가를 지불한 후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느끼게 된다. 


드레퓌스 사건은 발생부터 드레퓌스 복권까지 12여년의 시간동안 일어난 일련의 대사건이었다. 그동안 프랑스는 보수와 진보의 대결, 국가 폭력, 언론을 통한 여론 조작 등의 문제로 인해 극심한 좌우 대결이라는 혼란의 시기를 보냈다. 당시 이 시기를 보낸 이들은 잘 몰랐겠지만, 이러한 노력의 결과가 현재 프랑스를 만든 것은 아닐까.



[그림3] 프랑스 (출처 : http://m.igood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39076)



1898년 3월 <르 시에클 Le Siecle>이 에밀 졸라의 용기를 기리기 위해 만든 금메달에 새겨진 메달의 글귀를 마지막으로 이 글을 마친다.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아무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하리라."(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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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7-01-07 12: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음만 먹고 읽지 못 한 책이네요. 읽고 싶은 책들을 언제 다 읽을 수 있을지.

겨울호랑이 2017-01-07 12:43   좋아요 1 | URL
^^: 저도 1권 읽는 동안 5권을 사니 읽을 책만 쌓이네요 ㅜㅜ

2017-01-07 1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07 1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Dora 2017-01-07 18: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밀졸라는 누가 죽인 거죠? 요즘은 반정부주의가 종북빨갱이...

겨울호랑이 2017-01-07 18:40   좋아요 0 | URL
에밀졸라가 의문의 가스질식사로 세상을 떠났는데, 자살인지 타살인지 명확하지 않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