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에 갑자기 청일 전쟁(淸日戰爭)과 황해해전(黄海海戦)이 생각났다.
청일 전쟁(淸日戰爭)은 청나라와 일본 제국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까지 벌인 전쟁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갑오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중일갑오전쟁(중국어 간체: 中日甲午??, 정체: 中日甲午戰爭), 일본에서는 일청전쟁(日淸), 서양에서는 제1차 중일 전쟁(First Sino-Japanese War)이라고도 부른다. - 위키피디아 -
청일전쟁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전투는 황해해전이라 불리우는 전투다. 이 전투의 결과 청일전쟁에서 일본은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게 된다.
황해해전(黄海海戦)은 1894년 9월 17일 청일 전쟁 중기 일본해군 연합함대와 청나라 북양함대 사이에 벌어진 해전으로 압록강 해전(Battle of the Yalu River)으로도 불린다. 근대적인 장갑함이 실전에 투입된 최초의 전투로 알려져 있으며 이 해전의 결과, 청나라 해군은 큰 손실을 입고 제해권을 상실하여 무력화 된다. - 위키피디아 -
[그림1] 청일전쟁 당시 해전 모습
[그림2] 청 북양함대의 주력함 정원호(출처 : 나무위키)
당시 일본의 승리를 예상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음에도 일본은 어떻게 청나라를 이길 수 있었을까? 전문가의 말을 통해 원인을 분석해 보자.
북양대신 리훙장이 1888년 구축한 동양 최강 함대, 북양함대는 청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독일에서 가져온 정원호와 진원호 등 철갑선 9척과 함선 22척은 당대 맞설 전함이 없었다. 정원호가 일본 나가사키항에 친선 입항했을 때 일본은 엄청난 규모에 경악했다. 그러나 최강이었던 함대는 국가 명운을 걸고 총력전을 펼친 일본과 단 한 판 전투에서 괴멸됐다.
양적인 면에서 청나라에 뒤졌던 일본은 영국 등 서양 열강으로부터 군사기술을 착실히 배워 질적인 성장을 일궈냈다. 일본은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전쟁이 일어나기 16년 전에 오카와 마타지 대령을 청나라 베이징 주재 무관의 명목을 가지고, 스파이로써 보내어 청의 해군력을 샅샅이 조사하였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기 전 해에 그를 다시 보내 추가로 다시 조사하였다. 오카와 대령은 청나라 해군력이 독일에서 수입한 아시아 최대의 거함 한 척 외에는 고철덩이에 불과하다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는 그런 첩보를 바탕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이 시작되자 경기도 풍도 앞바다에서 함포전이 시작되었다. 일본 함대의 포탄을 맞은 청의 배들은 파괴되었으나, 청 함대의 포를 맞은 일본 전함들은 끄떡 없었다. 청의 함대에서 쏜 대포탄이 진흙덩이에 검은 칠을 한 가짜 폭탄이었기 때문이다. 부패 관리들이 대포탄을 만드는 쇠를 모두 횡령하였기 때문이다. -호서대 전가림 교수 -
당시, 청나라는 정원, 진원호라는 당대 독일에서 주문한 세계최대의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두 배의 배수량만으로도 당시 일본 해군 전체 배수량을 넘는 엄청난 배들이였다. 결국, 청나라는 전함(戰艦)이라는 하드웨어가 아닌 '부패한 조직'으로 무너진 것이다. 예전에는 이러한 부패한 청나라 군대와 관료조직을 보며, 그들의 부패함을 비웃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예전과는 달리 청나라 군대를 비웃을 수 없는 처지다.
[그림3] 1조원에 가까운 국내 방위사업 비리 (출처 : 2015년 7월 15일 한국일보 기사)
연이어 터지는 국방비리를 보면, 우리나라 군대는 청나라 말기 군대보다 크게 낫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국방 비리 뿐 아니라 여러가지 의혹과 부패들로 어지러운 요즘이다. 이러한 부패가 대국(大國) 청(淸)을 무너뜨렸다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웠는가?
역사(歷史)를 공부하는 또 다른 이유를 우리는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