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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전집 1 - 소크라테스의 변론 / 크리톤 / 파이돈 / 향연, 2017년 개정판 ㅣ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7년 4월
평점 :
<향연>은 소크라테스, 파이드로스, 파우사니아스, 에뤽시마코스, 아리스토파네스, 아가톤 간 이루어진 '에로스(Eros)'를 두고 이루어진 대화편이다. 논의가 끝난 후 술취한 알키비아데스가 잠시 등장한다.
모임에서 파이드로스가 '에로스'에 대한 각자의 찬가를 대화주제로 할 것을 제안한다.
'다른 신들에게는 시인들이 지어 바친 찬신가와 송가들이 있는데, 유서 깊고 그토록 강력하신 시인 에로스에게는 그토록 많았던 시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찬가 하나 지어 바치치 않았다는 것은 좀 심하지 않은가?'(177a)
파이드로스의 찬가
파이드로스는 에로스가 가장 오래되고 인간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신이라고 찬미한다.
'에로스는 가장 오래된 신들 가운데 한 분이기에 존경받는데, 에로스에게는 부모가 없으며, 산문에서도 운문에서도 그의 부모가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증거라네.(178b)... 그리고 에로스는 가장 오래되었기에 우리 인간들에게 가장 큰 은혜를 베푼다네.(178c)'
'게다가 오직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남들을 위해 기꺼이 죽으려 하네.(179b)... 그래서 내 주장인즉 에로스는 신들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가장 존경스러우며, 인간들이 생전에나 사후에 미덕과 행복을 얻는데 가장 도움이 되시는 분이라는 것이네.(180b)'
파우나시아스의 찬가
파우나시아스는 연인과 연동에게 서로 도움이 되는 에로스만이 찬미받을 자격이 있는 에로스라고 에로스를 구분한다.
'하지만 에로스는 사실은 한 분뿐이 아니며, 한분뿐이 아니라면 먼저 어떤 종류의 에로스를 찬양해야 할지 규정하는 것이 더 타당할 걸세. 아프로디테는 실은 두 분이니 에로스도 필연적으로 두 분일세... 두 번째 아프로디테와 협력하는 에로스는 당연히 만백성의 에로스라고 불려할 것이고, 다른 에로스는 우라노스의 에로스라고 불려야 할 것이네.(180d)'
'어떤 행위든지 행위 자체는 아름답지도 않고, 추하지도 않네. 오히려 행위가 행해지는 방법에 따라 그 성격이 결정되네.(181a).. 그런데 만백성의 아프로디테에게 속하는 에로스는 말 그대로 만백성의 것인지라 아무렇게나 닥치는 대로 일을 해치운다네... 그와는 달리 우라니아 아프로디테에게 속하는 에로스에게 영감을 받은 자들은 본성상 더 강하고 더 지성적인 것을 좋아하여 남성적인 것을 지향한다네.'(181c)
'연인은 연동이 더 지혜롭고 더 훌륭한 사람이 되게 도와줄 수 있고 연동은 배워서 지식을 증진하기를 열망할 때, 이처럼 두가지 원칙이 완전히 일치할 때에만 연동이 연인의 청을 들어주는 것이 아름다울 수 있고, 다른 경우에는 절대로 그럴 수 없네.'(184e)
에뤽시마코스의 찬가
의사인 에뤽시마코스는 에로스가 보편적인 현상이며, 좋은 에로스와 나쁜 에로스를 구분하고, 나쁜 에로스를 경계할 것을 이야기한다.
'에로스는 인간의 혼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만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훨씬 광범위한 현상이네.'(186a)
'절제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사랑이나 그런 사랑으로 더 절제 있게 될 수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사랑은 우라니아 무사(Mousa)에게 속하는 아름다운 천상의 에로스라네. 반면, 범속한 사랑은 폴륌니아 무사에게 속하는 사랑으로..(187e).. 모든 몸에는 이런 이중적인 에로스가 내재한다네.(186b).. 간단히 말해서, 의술이란, 몸을 채우거나 비우는 것과 관련하여 에로스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아는 학문이라네.(186d)..음악은 간단히 말해 조화와 리듬에 미치는 사랑의 영향에 관한 지식이라네.(187c)...예언술이 하는 일은 이들 두 에로스를 감시하고 치유하는 것이네.'(188d)
아리스토파네스의 찬가
아리스토파네스는 에로스가 원래 '남녀추니'였던 인간이 완전해지기 위해 반대편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인간들은 에로스가 얼마나 강력한지 아는데 완전히 실패한 것 같아.(189c).. 처음에 인간의 성(性)은 셋이었고, 지금처럼 남성과 여성 이렇게 두 성만 있었던 것은 아닐세. 이 두 성의 결합체인 세 번째 성도 있었는데, 지금은 이름만 남아있고 그 자체는 사라져버렸네.'(189e)
'이렇듯 우리 각자는 넙치처럼 잘려 하나가 둘이 된 만큼 온전했던 한 인간의 부절(符節)이며, 그래서 저마다 늘 자신의 부절을 찾는 것이라네.(191d)..우리는 본래 완전한 전체였기 때문에네. 그리고 사랑이란 완전한 전체가 되고 싶어 하는 우리의 욕구에 붙여진 이름이라네.'(192e)
아가톤의 찬가
아가톤은 에로스가 가장 외적으로 완벽하고, 내적으로도 정의, 절제, 용기, 지혜를 갖춘 최고의 신이라고 찬미한다.
'나는 신들께서 모두 행복하지만 에로스야말로 가장 행복하다고 주장하는 바일세. 그분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훌륭하니까.'(195a)
'그분은 젊으며, 젊은 데다 부드럽기까지 하다네.(195d).. 누구나 인정하듯 우아함은 에로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일세.(196a)...에로스는 신이든 인간이든 어느 누구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어느 누구로부터도 불의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네.(196b)...에로스는 정의뿐 아니라 절제에도 누구보다 많이 관여한다네.(196c)...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자를 제압하는 에로스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분이네....에로스가 남까지 시인으로 만들 수 있을만큼 지혜로운 시인이라는 점을 지적해두겠네.'(196e)
소크라테스의 반론
소크라테스는 에로스에 대해 찬미하는 대신, 에로스가 아름답지 않다고 말한다. 무엇을 원한다는 것은 무엇이 결여된 상태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원하는 에로스는 아름답지 않다고 다른 이들을 논박한다.
'에로스가 어떤 것을 원하고 사랑한다면 자신이 원하고 사랑하는 것을 소유하고 있어서인가, 아니면 소유하고 있지 않아서인가?(200a) 반드시 원하는 주체는 자기에게 결여된 것을 원하고, 결여되지 않으면 원하지 않을 걸세.(200b)'
'그러니 갖고 있지 않는 것, 그 자신이 아닌 것, 결여되어 있는 것, 이런 것들이 욕망과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네.(200e)... 에로스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지, 추함에 대한 사랑이 아니겠지? 아름다움이 결여되어 있고 어떤 식으로든 아름다움을 갖고 있지 않는 것을 자네는 아름답다고 말할 텐가?'(201b)
만티네이아 여인 디오티마의 에로스
디오티마는 에로스가 아름답지 않을 뿐 아니라, 신(神)도 아니고, 정령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에로스는 중간적인 존재로서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을 통해 불멸을 꿈꾸는 혼의 노력으로 정의된다.
'그대는 지혜와 무지 사이에 무엇인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나요? 옳은 의견이야말로 그처럼 지혜와 무지 사이에 있는 것이라오... 마찬가지로 에로스도 아름답거나 좋지 못하다고 그대가 동의한다고 해서 그분이 추하고 나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것들 사이에 있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세요.(202b)'
'에로스는 위대한 정령(daimon)이에요.(202b). 방편이 없던 페니아[가난의 여신]가 포로스[방편의 신]의 아이를 갖기로 작정하고는 포로스 옆에 누워 에로스를 잉태했지요.'(203b)
'지혜가 가장 아름다운 것 가운데 하나이고 에로스가 아름다운 것에 관련된 사랑이라면, 에로스는 필연적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분이고 지혜를 사랑하는 분으로서 필연적으로 지혜로운 자와 무지한 자의 중간에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204b)
'사랑하는 자들이 대체 어떤 방법으로 어떤 행위를 통해 사랑을 추구하기에 그들의 열성과 노력이 사랑이라고 불릴 수 있는 거죠? 그러한 활동의 목적은 몸과 관련해서도, 혼과 관련해서도 아름다운 것 안에서 생식(生植)하는 것이라오.(206b).. 필멸의 존재는 본성상 가능한 한 죽지 않고 영원히 살기를 원한다는 원칙은 인간에게도 동물에게도 적용되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생식에 의해서만 가능한데, .. 이런 현상은 몸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혼에도 일어나요.'(207e)
'신들의 사랑을 받고 불사의 존재가 되는 일에는 인간의 본성에 에로스보다 더 훌륭한 조력자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려 한다네.'(212b)
소크라테스의 말 중에서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은 '무엇인가를 결여했을 때, 그것을 욕망한다'는 주장이다. 우리 주변에는 결여되지 않았음에도 욕망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가령, 우리집 딸아이의 경우 자신이 사탕을 10개 가지고 있더라도, 절대 아빠에게 사탕 1개 나누어 주지 않는다. 혼자 먹는다....이런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사회적으로도 그런 경우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끊임없이 이윤극대화를 추구하며, 수탈을 통해 확대재생산하려는 본능을 가진 거대자본의 경우만 보더라도, 반드시 '결핍'이 욕망의 전제조건은 아닌 듯하다.
욕망의 전제조건은 '결핍'보다는 '탐욕'과 '이기심'이라고 보는 편이 보다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이러한 잘못된 전제하에 논의된 소크라테스의 '에로스론'은 잔치집에 찬물붓는 느낌을 준다. 그 외에 마치 '깔대기'처럼 무슨 이야기로 시작을 해도, 나중에는 '지혜사랑'으로 끝나는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는 이제는 어느정도 뻔한 스토리가 되버린 것 같다. <향연>을 읽고나서, 소크라테스처럼 분위기를 깨는 사람은 되지 말자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