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3 - 통일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3
로타르 갈 외 지음, 오토 브루너 외 엮음, 라인하르트 코젤렉 외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 / 푸른역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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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작품의 통일은 예술작품을 결정하고 예술작품들과 함께 제공된다. 예술작품을 포괄하는 더 상위의 통일, 즉 한 나라 안에서 한 시대 안에서의 예술의 통일, 문학의 통일도 역시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현존하는 현상으로 확인된다. 동일한 것이 부분적으로 하나의 언어와 문화 공동체로서 한 민족의 통일에도 적용되고, 약간 더 작은 규모로 그것이 한 나라의 역사가 되었든(뫼저), 인류 전체의 역사가 되었든(헤겔), 역사의 통일에도 역시 적용된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3 : 통일>, P83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 ~ 2006)의 개념사 사전 23번째 주제는 통일(Einheit)이다. 나누어진 것을 하나로 통합한다는 의미에서 보여지듯, 단어의 전제는 서로 다른 개별자들로부터 보편자로 향하는 방향성이 단어 안에 들어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이러한 방향성은 두 개념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중세시대에 대립은 '교권-세속권'의 모습으로, 근세 이후에는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아 사상적으로는  '보수주의 - 자유주의'의 모습으로, 정치적으로는 '연방-중앙집권주의' '오스트리아 중심의 대(大)독일주의-프로이센 중심의 소(小)독일주의'의 대립으로 발전된다.


 "민족국가적" 독립의 주창자들이 최고 보편 권력을 요구했던 제국과 교황권에 대항해 투쟁할 때 자신들 주장의 근거를 끌어온 것도 바로 이 통일사상이었다. 유기체적으로 구상된 "기독교적 통일"이라는 개념은 언제나 교권 sacerdotium과 세속권 imperium의 대립에 의해 위협을 받았다. 13세기에 이러한 보편적 권력들의 붕괴와 더불어 유기체적인 통일이라는 이념은 이제 개별 국가의 차원으로 옮겨졌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3 : 통일>, P15


 중세가 끝나는 시점 이후로 통일 관념은 두 개의 방향으로 발전해갔다. 한편으로는 세속권력의 그리고 교황 절대주의의 이론가들에 의해 매우 엄격한 방식으로 형성된 중세 전성기의 통일 개념이 이제 막 등장하기 시작한 영방국가 - "단 하나의 그리고 분할될 수 없는 공화국 republique une te indivisible" - 에 전용되어 쓰였고, 다른 한 편으로는 연방적인 통일 이념이 계속 살아 있었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3 : 통일>, P23


 에드문트 외르크 Edmund Jorg는 1863년 다음과 같이 썼다. 오직 하나의 "대독일적 제국"안에서만 "진정한 권위"가 생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통일의 법칙 안에서의 진정한 자유"다. 외르크의 눈앞에 중앙집권주의라는 끔찍한 유령이 서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오직 독일의 연방적 체제에서만 자유가 보증될 것이라고 믿었다. 오스트리아가 주도하는 하나의 "대독일적 제국"의 이념은 하나의 "정치적 연방주의"를 찬성하는 그의 입장에 부응했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3 : 통일>, P76


 개념어 발전과정에서 중세시대의 '교권-세속권'의 관계가 극적으로 변화된 것은 '자유'라는 개념과 깊이 연관된다. 라틴어 중심의 보편적 질서에 대항하여 중세 말 이후 자국 언어로 쓰여진 작품들과 언어 안에 담긴 민족정서는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이것은 인간 이성(理性)과 자유(自由)에 대한 강조로 표현되고, 이러한 기조는 '통일'의 개념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통일은 동시에 자유에 입각한 자결 사상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바로 이 사상이 민족적 통일 안에서 체현된다는 것이고, 통일은 그 사상이 계속 전개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준다는 것이다. '통일'과 '자유'의 개념들은 무엇보다도 그 때문에 아주 밀접한 관계에 들어서는데, 왜냐하면 정치적 현실, 독일연방의 지배적 "체제"는 이 두 개념의 본질에 반대하는 쪽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3 : 통일>, P47


 18세기에 이('통일'이라는) 새로운 개념 안에 의식적으로 의미가 채워져 가는 이 과정은 외관상 당시 사람들이 관심을 두던 정치적-사회적 영역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문학과 예술 이론 분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개념은 여기서 '예술작품의 통일'로 연결되면서 일찍이 확고한 표어로 자리잡는다. 사람들은 문학과 예숙의 다양한 장르들에 이들 자신의 내적인 통일성 Einheitlichkeit에 대한 문제를 제시했고, 예술적 통일 안에서, 형식과 내용의 화합 안에서 하나의 예술작품의 가치 평가를 위한 결정적인 기준자를 발견했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3 : 통일>, P26


 결과적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 기준은 점차 역사와 인류로 확대되면서 '미학(美學)'은 단순한 미적 취미에 대한 담론이 아닌 판단의 기준이 되었으며, 이러한 판단의 심판대 위에 19세기 독일 통일이라는 시대적 과제가 올라서면서, 오스트리아 중심의 대(大)독일주의와 프로이센 중심의 소(小)독일주의가 충돌하게 되었음을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 애국적인 제국 법률가들은 영방국가적 주권사상과 그것의 통일 모델을 강하게 거부하면서 "독일 제국의 통일"을, 제국헌법의 시의 적절하게 개혁된 기본법들과 제도들의 토대위에서의 "다양성 속의 통일"로, 다양한 정치적 힘들의 "합일"로 이해했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3 : 통일>, P35


 독일의 정치적 통일 관념들에 전형적인 현상으로서 '연방'과 '통일' 개념의 결합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발견된다... 슈타인메츠는 "독일에서의 통일"이 오직 하나의 "프로이센-독일적 연방"을 통해 보증될 수 있다고 보았다. '통일'과 '연방'이라는 두 개념은 그에 의해 하나로 명명되었다. 독일의 통일이 하나의 연방이라는 국가적 형태 안에서 실현되는 것은 여기서 곧 자명하고 논라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전제되었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3 : 통일>, P40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3 : 통일>을 읽으며, 미학(aesthetics)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통일'의 개념어 과정에서 드러나듯 미학의 판단 기준이 확장되어 하나의 시대 흐름을 만들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미학을 그 자체로 볼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인식틀로 봐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낭만주의 사조에 드러나는 자연에 대한 경외(敬畏)의 감정 그 자체도 중요하겠지만, 경외라는 감정이 표현되는 전후 관계가 바로 사상가들의 시대에 대한 인식과 밀접하게 연관지을 수 있겠다. 이러한 이유로 칸트, 헤겔, 니체 등 철학자들의 미적 판단이 '아름다움(美)'을 넘어선 '진리(眞)'와 '선함(善)'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임을 '통일'이라는 개념어를 통해 다시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두 독일인의 서신 교환>에는 헤르더의, 다음으로는 괴테에 의해 계속 전개된 민족의 문화적 통일에 대한 사상이, 언어와 문학에서의 "공통의" 정신적 유산을 통해 하나로 통합시켜 묶고 있는 "하나의 공통의 공중"에 대한 사상이, 동시에 이 사상 안에 담겨 있는 정치적 동기가 매우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3 : 통일>, P45


"노동자들의 합일"은 그들을 "계급"으로 보이도록 만들었다. 마르크스의 계급 개념은 프롤레타리아의 통일을 암시했고, 프롤레타리아의 "정당"으로의 법제화를 표현했다. 프롤레타리아가 하나의 사회적 단위로 연합된다는 것은 마르크스에게 역사의 필연적인 과정이었고, 그렇지만 동시에 거대한 체제전복적 변혁의 과정에서 하나의 단계이기도 했다. - P69

정치적 발전의 과정은 그래서 자유주의의 관념세계에서 원래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던 ‘통일‘과 ‘자유‘라는 두 개념을 쪼개버렸고, 자유를 통일 뒤로 물러나도록 했거나 아니면 자유가 통일로부터 나오도록 만들었다(p72)... 그와 더불어 전선이 명확히 그어졌다. 민족통일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모든 상황에서 정치적 진보를, 자유주의적 헌법 형식을 향한 발전을 포함하는 원리를 의미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유가 없는 통일은 수용될 수 없는 것이었다. - P74

연방주의적-보수주의적 통일 개념과 중앙집권적-민주주의적 통일 개념은 따라서 독일 통일의 문제에 관한 논의에서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적대적이었다. 1871년의 제국은 이 두 개념들에게 공격 목표를 제공해 주었다. 왜냐하면 이 제국의 헌법구조가 통일을 지향하는 요소들뿐만 아니라 연방적인 요소들도 포함하고 있었고, 또 그 안에는 보수주의적인 경향들과 자유주의적인 경향들이 한데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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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12-30 21: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호랑이님 이제 토끼해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ㅎㅎㅎ 어려운 책들 잘 풀어내주시고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말 가족분들과 행복하게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2-12-30 23:44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저 역시 미니님의 좋은 영상과 글들로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 감사드립니다. 내년 한 해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거리의화가 2022-12-31 20: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한해동안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매번 댓글을 남기질 못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늘 잘 보고 있습니다. 내년에도 좋은 글 계속 부탁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겨울호랑이 2022-12-31 23:23   좋아요 1 | URL
거리의화가님 감사합니다. 저 역시 거리의화가님 좋은 글과 말씀 그리고 격려 덕분에 많이 배웠던 지난 한 해였습니다. 저 역시 댓글을 남기지 못하는 편이라 죄송합니다.. ㅜ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년에도 역사와 관련한 거리의화가님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