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 - 린드그렌 탄생 110주년 기념 개정판 시공주니어 문고 2단계 15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잉리드 방 니만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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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린 시절, 흑백 TV에서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주근깨 가득한 얼굴을 한 소녀 '삐삐'를 주인공으로 했던 드라마가 있었다. 마치 얌체볼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말괄량이면서도, 나쁜 어른들을 보면 혼내주는 삐삐에 열광했던 추억이 있어서일까, 애엄마가 아이에게 읽어주는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의 내용이 지난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지만, 그때는 나쁜 어른들에 맞서는 어린이 영웅으로 생각되었던 삐삐가 이제는 현자(賢者)처럼 다가온다.

"생각해 보렴. 네가 어른이 됐을 때 누가 포르투갈의 수도가 어디냐고 물어봤는데 대답을 못하면 기분이 어떻겠니?"
삐삐가 대꾸했다. "그런 것쯤은 대답하고도 남죠. 이렇게 대답하면 되잖아요.
'정 그렇게 포르투갈의 수도를 알고 싶으시면 포르투갈의 수도를 알고 싶으시면 포르투갈에 직접 편지로 물어보세요.'라고요."
"그래. 하지만 네가 포르투갈의 수도도 모른다는 시실이 부끄럽지 않겠니?"
삐삐가 말했다."그럴 수도 있겠죠. 그럼 난 틀림없이 밤에 잠도 못자고 누워서
'도대체 포르투갈의 수도가 어디지?' 하고 궁금해 할 거예요. 하지만 사람이 항상 즐겁게만 살 수는 없잖아요."
삐삐는 장난삼아 몸을 구부리더니, 물구나무서기를 했다.
"그리고 말이죠, 난 우리 아빠랑 같이 리스본에도 갔었어요."
삐삐는 여전히 물구나무서기를 한 채 조잘댔다. 그때 한 경찰이 삐삐한테 호통을 쳤다. "그만해! 네 멋대로 할 생각은 하지 마. 넌 반드시 어린이집에 가야 해. 그것도 지금 당장!" _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 , p48

리스본에 가지 못했기에 알 수도 없는 많은 이들은 당연히 리스본에 대한 생생한 경험이 없다. 그렇기에 이들이 가질 수 있는 것은 포르투갈의 수도, 항해왕자 엔리케와 마젤란, 리스본 조약 등 단편적인 사실이 담긴 단어만을 끈처럼 실체와 연결시킬 뿐이다. 그리고, 이처럼 많은 끈들을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저장하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었다는 것을 경찰의 말 속에서 깨닫게 된다.

그렇지만, 정작 삐삐에게는 이러한 끈이 필요없다. 사랑하는 아빠와 이미 리스본에서 가진 경험은 삐삐에게 경험으로 일부가 되었으니까. 그럼에도, 경찰은 삐삐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기존 체계로의 편입을 강제한다. 삐삐의 리스본에서의 경험이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어느 누구보다 리스본을 잘 체험하고 있는데도 이를 인정받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는 지식을 배운다는 것에 열중한 나머지 현인이 가진 지혜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닐런지.

이와 관련해서 어린 시절 같은 경험을 했던 기억도 함께 소환된다. 학교 급식이 없던 시기 어머니께서 싸 주신 반찬 중 '게맛살'이 있었다. 명태로 만들어진, 게살을 먹는 느낌을 주는 게맛살은 소세지와 함께 좋아하는 반찬이었는데, 어느 날 진짜 '게살'을 먹을 기회가 있었다. 그때 들었던 생각. '와, 이거 게맛살과 맛이 같네.'... ㅜㅜ 흑역사지만, 삐삐를 읽으며 우리는 익숙한 것을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만 익숙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옮겨본다.

이와 함께, 삐삐와 선생님과의 대화도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교육의 목적이 크게 인간을 긍정하고,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면, 삐삐가 버릇이 없어 학교에 올 수 없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것을 선생님의 문제로만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기본이 안 되어 있다'는 이유로 부당한 처우를 합리화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로 받아들여야 할까.

선생님과 단둘이 남게 되자 삐삐는 선생님 책상 앞으로 갔다.
"저, 선생님. 학교가 어떤 곳인가 하고 와 봤는데, 참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이제 학교에 다니고 싶지 않아요. 겨울 방학이 있든 없든 상관없어요. 학교에선 사과니 고슴도치니 뱀이니 하는 얘기만 잔뜩 하잖아요. 정말 머리가 팽팽 돌 지경이라고요. 하지만 제가 학교를 안 다닌다고 섬섭해하지는 마세요."
선생님은 정말로 섭섭하다고 하면서, 삐삐가 얌전하게 굴지 않은 것이 가장 섭섭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삐삐같이 버릇없는 아이는 학교에 다니고 싶어 해도 받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_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 , p71

시간이 흘러 요즘 아이들에게도 삐삐는 나쁜 어른들을 혼내주는 어린이들의 영웅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렇지만, 예전 그런 삐삐를 동경의 눈으로 바라봤던 세대들은 이제 삐삐가 더는 외롭게 편견과 싸우지 않도록 이제는 그의 곁에 있어줘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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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지 2022-11-20 2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처없이 방랑 생활을 하며 세상을 탐험하고 싶다고- 아이가 어렸을 때 이 작가 소설만 읽으면 졸랐어요.
같이 좀 떠나줄걸, 지금와서 생각하네요:-)

겨울호랑이 2022-11-20 23:43   좋아요 1 | URL
시간이 흘러 우리를 기다려주지 못하는 것은 부모님 뿐이 아닌 듯 합니다. 심지어 우리 자신들조차도 시간 속에서 변하는 것을 생각해보면서 부족하나마, 현재의 모습에 충실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닌가를 갱지님의 글을 읽으며 깨닫게 됩니다... 갱지님 편한 밤 되세요!

渼沙_常水 2022-11-21 06: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엉뚱하면서도 당당했던 말괄량이 삐삐. 알반적으로 소신은 주머니에서 나온다고 하듯이 삐삐에게는 무시무시한 힘이 삐삐의 영혼을 자유롭게 해주었던것 같습니다
꾸밈없는 순수한 동심의, 50년 전쯤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네요

겨울호랑이 2022-11-21 10:05   좋아요 0 | URL
네, 渼沙_常水님 말씀처럼 삐삐의 힘이 삐삐에 자유를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함께 삐삐의 자유로움이 삐삐의 힘을 무한하게 키우지 않았을까도 함께 생각해 봅니다. 미사_상수님, 즐거운 한 주의 시작되세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