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색 세루 두루마기에 자줏빛 털목도리, 회색 털장갑, 그만하면 진주의 추위쯤, 든든한 차림인데 그러나 기화는 춥다. 몹시 춥다. 헐벗고 벌판을 거니는 것처럼. 그것은 추위라기보다 막막한 외로움이었는지 모른다.(p483)... 최초엔 길상을 잃었고, 다음엔 상현으로부터 버림받았고, 잃어버렸기 때문에 스스로를 버린 기화는 또 버림받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잃었고, 마지막 희망을 버렸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물에 대한 인식을 망각한 것이다. 도망은 상실과 망각에서 오는 일종의 충격일까. _ 박경리, <토지 11> , p484/670


 토지 독서 챌린지 22주차. 이번 주로서 3부 3권도 마무리되어간다. 그 사이 최참판댁 갈등의 시발점이라 할 김 환(구천)도, 용이네 집에 풍파를 일으키던 임이네도 떠나가면서 이제는 서희를 비롯한 2세대가 집 안의 어른이 되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이들1세대의 퇴장 외에 작품 속에 묘사되는 시대상속에서 급격한 변화를 체감한다. 동학 농민 혁명의 여파가 채 가시기 전이었던 작품 초반부와 <토지> 중반부에 묘사되는 1920년대는 분명 차이가 있다. 이런 변화는 작품 속에 묘사되는 기화(봉선)의 모습에서도 잘 드러난다. 


 사실, 기화의 진정한 변화는 사실 옷차림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자신과 희망을 잃어버리면서 결국 아편에까지 손을 대면서 기화는 걷잡을 수 없을만큼 무너져 내린다. 어린 시절 어머니 별당아씨를 잃어버린 서희를 옆에서 위로하던 봉선이었지만, 어른이 된 기화는 반대로 서희에게 몸을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도 자신을 '아편쟁이'라 단죄하는 기화는 자신의 딸마저도 버릴만큼 약해져 버렸고, 서희는 기화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현재 기화는 서희에게 큰 신세를 지고 있는 처지지만 세월은 그들 사이에 가로놓인 주종(主從)이라는 벽을 차츰차츰 허물어왔다. 그것은 기화보다 서희가 더 많이 느낀다. 극심한 사회적 변동이 원인이겠지만 가장 오래된 추억을 함께 간직한 두 사람의 처지 탓이며, 가시밭길을 걸어왔고 지금도 걷고 있다는 실감은 어쩔 수 없는 연민, 애정으로 변하게 마련이다. 애정은 권위를 무너뜨린다.(p439)... '불쌍한 것.' 다정다감했던 그 감성은 어디로 갔는가. 사무치게 깊었던 그 숱한 한은 어디로 갔는가. 너그럽게 이해하고 푼수를 알며 물러나 앉을 줄 알던 그 조신스러움은 어디 갔는가. 욕심 없고 거짓 없던 그 천성은, 아니 연연(軟娟)하고 그 풍정(風情)이 사내들 마음을 사로잡던 기생 기화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가. 그에게서는 양현을 향한 모성마저 없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이 여자를 이렇게 만들었나. 마약의 심연으로, 다정다감함이 유죄요, 다정다감함의 단죄(斷罪)인가. _ 박경리, <토지 11> , p446/662


 아편(鴉片). 이제는 고전적인 약물이 되고 말았지만, 페어뱅크(John King Fairbank, 1907~1991)의 <캠브리지 중국사>에 의하면 19세기 말에 중국 인구의 약 10%가 아편 중독 상태에 있었을 것으로 추산될 정도로 강력한 마약이었다. 물론, 청(淸)의 아편은 인도에서 재배되어 밀수의 형태로 청나라로 수출되고, 다시 인도 면화산업에 재투자되었다는 점에서 1920년대 당시 만주와 국내산 아편이 유통된 우리나라와 진행된 양상은 달랐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도 적지 않은 중독자가 있었음을 생각해본다면, 전체 인구의 약 10%가 중독되었다는 통계가 의미하는 바는 적지 않다. 청나라의 아편이 자본주의/제국주의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면, 우리나라의 아편은 시대의 절망에 빠진 이들의 안식처가 되었다는 점은 차이가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마약 문제의 심각성과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가움은 매한가지가 아니었을까.


 1836년 무렵에는 매년 대략 1,820톤의 아편이 중국으로 수입되고 있었다. 아편 중독자는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 것 같았다... 1836년 당시 서양의 통계로는 대략 1,250만 명의 흡연자가 있었다고 한다... 스펜스 Jonathan Spence는 꼼꼼한 연구를 통해 1880년 말경이면 10%의 인구가 아편을 흡연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결론을 내놓았다. 심각한 중독자가 대략 3~5%라고 한다면 1890년경에는 1,500만명의 중독자가 있었을 것이다. _ 존 K. 페어뱅크, <캠브리지 중국사 10 (상) >, p296


 1831년 봄베이 식민정부는 남부 마흐라타 Mahratta에 원면 구입 대행사를 개설했다. 1839년에는 기반시설과 시범농장에 대한 추가 투자와 아편 생산에서 얻은 자본을 면화에 투입하는 방안이 동인도회사 내에서 논의되었다... 인도의 면화 수출을 늘리고 개선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노력했다... 그리하여 엄청난 추가 공급선이 열렸다. 그 공급선을 통해 면직물 제조산업의 주요 부문에서 느꼈던 원료 부족 문제를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_ 스벤 베커트, <면화의 제국>, p153/688


 어느 사회나 마약중독자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은 좋을리 없다. 치유할 수 없는 정신병으로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은 <토지>의 기화 역시 마찬가지로 느꼈을 것이고, 기화는 버림받아 상처받은 마음에 아편을 했다는 자책감을 더하며 서서히 무너져 간다. 무너지는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더 강한 자극을 찾으면서. 중독에서 죽음에 이르는 마약중독에 관해 오후의 <우리는 모른다>는 두 실험을 소개하며 우리에게 메세지를 전달한다.


 마약의 중독성을 보여주는 유명한 실험이 있습니다. 좁은 공간에 갇혀 있는 수컷 쥐에게 '순수한 물(이하 물)'과 '모르핀을 섞은 물(이하 마약음료)'을 제시합니다. 쥐는 물 대신 마약음료를 선택하고, 결국 중독이 됐다가 어느 순간 죽어버리죠. 방법이 조금 다를 뿐 이런 식의 실험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쥐에게 관을 삽입해 약물을 투여하기도 하고, 원숭이에게 코카인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결과는 늘 중독, 그리고 죽음이죠. _ 오후,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 p396/412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에 소개된 하나의 실험은 마약에 중독되어 죽어가는 쥐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고, 다른 하나의 실험은 마약을 제공하되 보다 쾌적한 환경과 다른 대체물들을 쥐들에게 제공한 실험이다. 첫 번째 실험이 마약의 위험성을 알려주는 전형적인 실험이었다면, 두 번째 실험에서는 쾌적한 환경의 쥐들이 보다 높은 비율로 마약의 유혹에서 벗어남을 보여주면서 환경의 중요성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렇다면, 이들의 실험이 기화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알렉산더 박사는 자신의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자신있게 이야기합니다.

 '우리에게 좋은 환경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어떤 중동성이 강한 마약이라도 거부할 수 있다. 금단현상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강하지 않다. 부정적인 주변 환경이 우리가 금단현상을 거부할 수 없는 것으로 느끼게 만들 뿐이다.' _ 오후,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 p398/412


 다시 <토지>로 돌아와 보자. 만약, 기화가 길상과 상현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더라도 주변에 누군가 기화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혼자 양현을 키우는 어려움에 공감할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뒤늦게 서희와 만나게 되지만, 이미 너무 늦은 뒤가 되고 말았다. 이제 머지 않아 기화 역시 <토지>의 장에서 월선처럼 사라질 것이다. 참 어려운 삶을 살았지만 월선의 죽음이 애잔함을 남겼다면, 봉선의 무너져 내림은 안타까움을 전달한다.... 


 개인은 자신보다 오래되고, 자신보다 영속하며, 모든 면에서 자신을 감싸는 집단적 존재와의 유대를 더욱 강하게 느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행동의 유일한 목표로 자신만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자신보다 더 중요한 목적의 수단으로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중요성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삶 본래의 목적과 지향성을 회복했기 때문에 삶의 의미가 되살아날 것이다. _ 에밀 뒤르켐, <자살론>, p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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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1-12-12 01:0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중국 인구의 10%가 아편을 했다면 제국주의자들이 한 나라를 말살하고자 한 집요함이 얼마나 악날했는지 알수 있을것 같아요~~
마약에 대한 실험의 결과에 공감합니다. 결국 모든 것이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거네요.
그렇기에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잘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하는데 현실이 그렇지 않아 너무 안타까워요.
아편이란 단어는 왜이리 슬픈지 모르겠어요^^
겨울호랑이님께서 토지를 읽으신지 벌써 22주차시네요.
완독을 응원합니다^^

겨울호랑이 2021-12-12 10:41   좋아요 3 | URL
마약 통계가 정확하기 어려운 부분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나라 말기의 마약 문제는 정말 심각했던 것 같아요.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도 그런 부분이 다루어지지만, 서양의 자본주의로부터 크게 당했기에 오늘날 중국에서는 마약 범죄에 유난히 민감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처벌 보다 필요한 것이 주변의 사랑과 관심임을 생각해 본다면, 처벌보다는 예방에 보다 중점을 둬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함께 해봅니다. 「토지」는 지난 7월부터 시작해 이제 막 반환점을 돌았네요. 페넬로페님 격려에 힘내어 완독에 가까이 다가갑네요. 감사합니다. 행복한 일요일 보내세요! ^^:)

mini74 2021-12-12 23: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제강점기 우리나라도 중독자가 꽤 많았다고 봤어요 또 일본이 도망가면서 아편도 엄청 풀었다고 하더라고요 ㅠㅠ 겨울호랑이님 토지 읽으면 새록 새록 예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

겨울호랑이 2021-12-13 06:14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어떤 이들은 일제 시기를 통해 근대화가 이루어졌다 말하지만, 이로 인해 우리가 입은 손해가 정신적, 물질적으로 더 많았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미니님 오늘도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