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는 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어서, 내 생각은, 많지도 행복하지도 못했던 내 과거의 연인들을 거쳐, 가장 열정적이었던 소년 시절의 정신적 사랑에 미치자, 하염없는 절망감으로 빠져들었어요. 나는 항시 사랑은 불변이어야 하는 것으로 알았으나, 내 연인들은 자신의 기름을 다 마시면 죽었지요 - 영원한 등불은 지금까지 없었어요. _ W.B. 예이츠, <환상록> , p44


 어김없이 주말마다 돌아오는 독서챌린지 미션. 이번 주 과제는 '4권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포함한 감상평 남기기'다. 작품 안에서 많은 일이 평사리 안과 밖에서 일어나지만, 그 중에서도 인상 깊은 장면이라면 환이와 길상의 환상(幻想, illusion)를 꼽을 수 있겠다. 나름 '진달래'와 '길'이라는 주제어도 붙여본다.


 생시 단 한 번 어머님이라 불러본 일이 없는 여인의 무덤 앞에 엎드린 환이 눈에서는 눈물 한 방을 떨어지지 않았다. 무념무상, 그리움도 원망도 없이 끝없는 갈대숲을 헤치고 가는 여인의 모습이 떠오르다가 사라질 뿐이다. 여인은 윤씨부인 같기도 했고 별당아씨 같기도 했다. 갈대숲은 때때로 진달래 숲으로 변하기도 한다. 혼미(昏迷), 끝없는 갈대숲을, 진달래 숲을  더듬고 가는 혼미, 혼미는 혼미를 부르고 허무가 하나의 정열로써 고개를 든다. _ 박경리, <토지 4>, p400/672


 환이는 어머니 윤씨 부인의 묘 앞에서 환상에 빠진다. 갈대밭에서 사라져간 어머니.  같은 벼과에 속하는 식물이지만, 벼가 초가을날 벌판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풍요로운 이미지라면, 갈대는 늦가을 겨울이 멀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쓸쓸한 이미지를 안겨준다. 벼와 갈대의 상반된 이미지 속에서 최치수와 김 환의 상반된 처지를 떠올리게 된다. 이는 같은 형제지만, 풍요롭게 자란 이복형 최치수의 그림자로서 갈대처럼 스산하게 자란 환이의 삶을 암시하는 것일까. 어쨌든 쓸쓸한 느낌을 주는 갈대밭을 지나 어머니 윤씨 부인은 피안(彼岸) 저편으로 사라져간다. 그리고 나타나는 진달래꽃. 진달래꽃은 별당아씨다. 사랑하는 이에게 진달래꽃을 가득 안겨주고 싶은 사랑하는 연인의 마음. 환이의 마음 속에서 가을날의 갈대는 봄날의 진달래로 바뀌어간다. 그렇지만, 김소월의 <진달래꽃>처럼, 환이의 진달래도 이별의 꽃이 되었다....


 '나 명년 봄까지 살 수 있을는지......' '......', '산에 진달래가 필 텐데 말예요.' '......'

 '그 꽃 따 화전을 만들어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당신께, 당신께, 싶어요, 싶어요, 싶어요, 싶어요.....'

여자의 목소리는 진달래꽃 이파리가 되고, 꽃송이가 되고 계속하여 울리면서 진달래의 구름이 되고 진달래의 안개가 되고 숲이 되고 무덤이 되고, 붉은 빗줄기, 붉은 눈송이, 붉은 구름 바다, 그 속을 자신이 걷고 있다는 환각 속에 환이는 쓰러졌다. 꿈 속에서 울었다. 꿈 속에서 가슴을 쳤다. 여자를 부르고 달려가고 울부짖고, 여자가 죽어 이별한 뒤 환이는 줄곧 꿈속에서만 울었다. _ 박경리, <토지 4>, p406/672


 덮어놓고 불쌍한 두리, 두리를 중얼거리며 죄악감에 가슴을 치고 싶다가도 어느덧 억제할 수 없는 흥분이 그것을 쫓아버리고 전신이 나른한 환각에 빠져든다. 야릇한 환각, 아찔아찔하게 손짓해오는 것, 버선목 위의 하얀 계집애 종아리다. 너울거리는 속곳 자락이다. 도드라진 젖가슴이다. 사지를 버둥거리는 얼굴이다. 두리 얼굴이다. 아니 봉순이 얼굴, 봉순이의 가는 허릿매다. _ 박경리, <토지 4>, p375/672


 환이의 환상이 어머니 무덤에서 시작되었다면, 길상의 환상은 두리의 불행에서 시작된다. 삼수에게 겁탈당한 두리의 아픔 속에서 길상은 자신에게 마음을 고백해 온 봉순을 떠올린다. 남매처럼 자란 봉순이 여자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길상의 의식이라면, 아씨 서희에 대한 숨겨진 마음이 길상의 무의식이 아니었을까. 길상의 환상 속에서 봉순은 여인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상의 의식세계에서 봉순은 여인이 아닌 여동생으로 억압되었다면, 서희 때문일 것이다. 정작 길상 본인은 차라리 절에 들어간다고 펄펄 뛰며 부인하지만.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길상의 이런 마음을 안 봉순은 다른 길을 선택하고 떠나간다. 이런 면에서 길상의 환상은 '길'이다. 그것도 엇갈린 길.


 모두 시름을 놓고 부산으로 갈 행구를 챙기는 것이었으나 길상은 혼자 우울했다. 과연 봉순이는 진주로 갔을 것인가. 갔다고 생각하며 잊으려 했으나 잠시였다. 가지 않았을 것을 길상은 확신할 수 있었다... 드디어 그날 봉순이는 저녁때 무심하게 집을 나가 가마를 타고 구례 쪽을 향했고 그날 새벽녘에 길상과 월선에 의해 서희는 육로로 읍내 이부사댁에까지 이러렀다. 결국 길상은 마지막까지 봉순을 대하지 못했다. 여하튼 일은 무사히 끝이 났다. _ 박경리, <토지 4>, p503/522


 평생을 비단옷에 분단장하고 노래부르며 마음대로 사는 세상, 봉순이 마음은 그곳으로 끌려간다. _ 박경리, <토지 4>, p350/672


  환이와 길상의 환상의 주제는 모두 사랑(eros)이다. 그리고, 이들의 사랑은 모두 엇갈린 갈림길에 놓여있다. 삶과 죽음, 그리고 이별. 남매와 같았던 길상과 봉순의 사랑은 다음 세대인 윤국과 양현에게서 재현되는 것을 보면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1865 ~ 1939)의 <환상록 A Vision>에서 나오듯 사랑은 소용돌이 치는 인생 속의 모순일지도 모르겠다. 이데아(Idea)의 세계로 이끄는 이성(理性)으로서 에로스가 아닌 어둔 밤 속을 헤매는 고통 속에서 어렴풋이 발견하는 실낱같은 희망이 현실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사랑의 모습이 아닐런지를 <토지 4>속 두 인물의 '환상'을 통해 생각하게 된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환상속의 그대>보다는 김윤아의 <길>이 더 어울리는 듯하여 이 음악을 마지막으로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이것으로 이번 주 미션 끝. 


 사랑은 모든 칸트적 모순을 내포하지만, 사랑은 우리 인생을 중독되게 하는 첫 번째 모순이지요. 정, 시작이 없다. 반, 시작이 있다. 반, 끝이 없다. 사랑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외침에 지쳐서, 나의 사랑은 끝난다. 그 외침이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욕망일 따름이다. 즉, 욕망은 끝이 없다는 것이지요. 탄생과 죽음의 고통은 동시에 외치지요. 인생이란 신비주의자들이 상상하는 것과 같은 신성한 이성적 소산물은 아니지요, 그것은 비이성적 쓰라림이지 단계적이고 질서정연한 하강도 아니지요. 그리고 폭포가 아니라, 여울이거나 소용돌이지요.  _ W.B. 예이츠, <환상록> , p44


 이데아 혹은 형상을 향해 신적인 사랑 및 신심(pietas)이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 떨어져 있고 다수로 분산되어 있을지라도, 그때에는 사랑하는 가운데 우리의 이데아와 하나가 되어, 온전한 인간이 될 것입니다. 그때엔 우리가 신을 사물들 안에서 으뜸으로 섬겼던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_ 마르실리오 피치노, <사랑에 관하여 - 플라톤의 <향연> 주해>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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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먼댓글] ‘칸트적 모순‘에 대하여
    from 연의에게 들려주는 책 이야기 2021-08-28 11:12 
    페이퍼의 시작 사랑은 모든 칸트적 모순을 내포하지만, 사랑은 우리 인생을 중독되게 하는 첫 번째 모순이지요.(Love contains all Kant's antinomies, but it is the frist that posions our lives.) 정, 시작이 없다. 반, 시작이 있다. 반, 끝이 없다. 사랑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외침에 지쳐서, 나의 사랑은 끝난다. 그 외침이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욕망일 따름이다. 즉, 욕망은
 
 
북다이제스터 2021-08-27 14: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칸트적 모순이 무엇인지 급 궁금해집니다. ^^

겨울호랑이 2021-08-27 16:42   좋아요 2 | URL
제 생각에는 문맥상 칸트적 모순이 ‘논리적 대립‘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한편이 참 이면 다른 편은 거짓으로, 한 편이 거짓이면 다른 편이 참인 판단의 대립을 ‘칸트적 모순‘으로 표현한 듯 싶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21-08-27 15:42   좋아요 2 | URL
답변 감사합니다.^^
그런데요, 말씀해주신 것은 일반적인 모든 모순에 해당할 수 있을거 같습니다.
전 ‘칸트적’에 뭔가 특별한 모순이 있을 것 같아 기대했습니다.
어제 칸트 책 새로 주문했는데요, ‘칸트적 모순’이 무엇인지 알아보면서 읽는 것도 새로운 재미와 의미가 될 것 같습니다. ㅎ
감사합니다. ^^

겨울호랑이 2021-08-28 06:57   좋아요 2 | URL
저는 해당 부분을 문맥상 순수이성이 갖는 이율배반(또는 자기모순)으로 생각했습니다만, ‘칸트적 모순‘이라는 표현만 별개로 본다면 다른 해석도 가능할 듯 싶어요... 예를 들어 ‘칸트적 모순‘의 문제를 초월적이념으로서 순수이성과 실천이성 사이에서 발생하는 ‘간극‘ 으로 볼 수도 있을 듯 합니다.같은 이성 내에 존재하는 다른 정의가 모순을 불러일으킨다면, <환상록>에 언급된 것처럼 ‘정-‘반‘의 구조에서 ‘합‘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차이만 확인하는 것이 아닌지. 이처럼 헤겔의 변증법 구조와 연관시킨다면 칸트 체계의 한계로 논의가 나갈 수도 있을 듯 합니다만. 제가 <환상록>에서 가져온 일부 인용문이 이것과 연관되지는 않는 것 같아서 논의에서 제외했습니다... 짧은 제 생각이라 그냥 듣고 넘기셔도 좋을 듯 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21-08-27 15:58   좋아요 2 | URL
제가 보기에는요, 예이츠가 독자를 배려하지 않은 듯 합니다. 그냥 “칸트적 모순”이라고 하면 모든 독자가 자신 뜻을 100퍼 알 것이라고 생각한 듯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모순된 사상이 많이 지적되는 철학자를 언급하면서, 특히 더요. ^^ 예이츠가 잘 못 한 것 같습니다. ㅎㅎ

겨울호랑이 2021-08-27 16:41   좋아요 1 | URL
아마도 예이츠가 독자들을 공부시킨 것은 아닐까요 ㅋㅋ 분명히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처럼 예이츠는 친절한 작가는 아닌듯 합니다만, 인용한 책 「환상록」자체가 엄청 모호해서 본문을 읽다보면 ‘칸트적 모순‘ 은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 ㅋㅋ

2021-08-28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21-08-27 18: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플라톤의 향연을 읽고 글을 이렇게 쓸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신선해 했었어요.

겨울호랑이 2021-08-27 19:14   좋아요 1 | URL
저도 제가 가지고 있던 ‘뜨거운 가슴의 사랑‘의 이미지 대신 ‘차가운 머리의 사랑‘을 「향연」을 통해 배운 것 같아요. 진정한 플라토닉 러브의 의미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