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월 26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선 유진산이 유진오의 뒤를 이어 새 당수로 뽑혔다. 그러나 그것이 곳 1971년 대선후보의 보장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40대 기수들'의 도전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1970년에 김영삼은 42세, 김대중은 44세, 이철승은 47세였다._강준만, <한국 현대사산책 1970년대편 1 :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 p95/350
제1야당 국민의힘 당대표에 30대 이준석 대표가 선출되었다는 뉴스가 화제다. 헌정 사상 30대 당대표는 처음이라며 모든 뉴스를 블랙홀처럼 흡수해버리는 바람에, 대통령이 G7 회담에 초청되어 출국했다는 뉴스나 미 FDA에서 얀센 백신의 유효기간을 1.5개월 연장했다는 뉴스는 구석에서도 찾기 힘들었던 하루였다. 이른바 '이준석 현상'을 보면서 과거 1970년대 '40대 기수론'을 다시 보는 듯한 기시감(旣視感)이 느껴지는데, 이러한 감정이 나만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당시 53세였던 박정희는 이른바 '40대 기수들'의 도전에 대해 '어린애들과의 싸움'이라며 폄하하면서, 타협적인 유진산이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되기를 원했다... 유진산도 박정희처럼 '40대 기수들'을 '정치적 미성년자', '구상유취(口尙乳臭)'라는 표현을 쓰면서 경멸감을 내비쳤지만, '40대 기수들'의 바람은 결코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었다. '40대 기수들'의 유진산 비판은 큰 호응을 얻어 유진산은 전당대회를 2주일 앞둔 9월 21일 후보 경쟁에 나서는 걸 포기하고 말았다. 박정희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중앙정보부의 무능을 질타했고, "내가 김영삼이 같은 애송이와 어떻게 싸우라는 말이냐"라고 호통을 쳤다._강준만, <한국 현대사산책 1970년대편 1 :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 p96/350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1970년대 당시 유행했던 '40대 기수론'이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들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언론에서 열을 올리며 보도하 듯 30대 당대표의 선출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다만, 개인적으로 이준석과 그가 속한 정당을 지지하지 않지만, 이로 인한 파장이 정치계에 긍정적인 영향이 미쳤으면 하는 마음이다. 새로 대표가 된 그가 그동안 선거에서 연거푸 패배해 온 국민의 힘에게 자마전투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 BC 235 ~ BC183)처럼 승리를 안겨다 줄지, 황산대첩의 왜장(倭將) 아지발도(阿只拔都, 1365~1380)처럼 패배를 안겨다 줄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과거 '40대 기수론'에 대항했던 박정희와 그로부터 50년이 지나 '30대 당대표'인 이준석이 박정희의 딸 박근혜의 키즈라는 연관성은 이런 기시감을 더하게 하는 요인이라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