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벌써 민족정신으로 구성된 유기체이다. 단순한 혈족(血族)으로 전해 내려온 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 혼잡한 각 종족으로 결집된 국가일지라도 반드시 그 가운데 항상 주동력을 가진 특별한 종족이 있어야만 이에 그 국가가 국가답게 될 것이다... 역사를 쓰는 자는 반드시 그 나라의 주인되는 한 종족을 먼저 드러내어, 이것으로 주제를 삼은 후에 그 정치는 어떻게 흥하고 쇠하였으며, 그 산업은 어떻게 번창하고 몰락하였으며, 그 무공(武功)은 어떻게 나아가고 물러났으며, 그 생활관습과 풍속은 어떻게 별하여 왔으며, 그 밖으로부터 들어온 각각의 종족을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그 다른 지역의 나라들과 어떻게 교섭하였는가를 서술하여야 이것을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_ 신채호, <독사신론> 中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1880 ~ 1936)의 <독사신론 讀史新論>은 단재의 역사관(歷史觀)이 잘 표현된, 잘 요약된 역사서다. 오랜 역사가 흐르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취가 어지럽게 남겨진 공간 속에서 역사가는 어떻게 사건을 의미를 부여하는 가를 우리 고대사를 소재로 잘 보여주는 책이 <독사신론>이다. 저자는 <독사신론>에서 역사가는 먼저 오늘의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기원을 찾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주인이 되는 종족을 먼저 드러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아(我)'를 찾는 작업이다.
역사(歷史)란 무엇인가. 인류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발전하고 공간적으로 확대되는 심적(心的) 활동(活動)의 상태에 관한 기록이다. 세계사(世界史)란 세계의 인류가 그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朝鮮史)란 조선민족이 그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다. 무엇을 '아(我)'라 하고 무엇을 '비아(非我)'라 하는가? 한마디로 쉽게 말하자면, 무릇 주관적(主觀的) 위치에 선 자를 '아(我)'라 하고 그 외에는 모두 '비아(非我)'라 한다._신채호, <조선상고사>, p24
역사 속에서 '아'를 규명한다면, '아'를 제외한 외부가 '비아'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는 이들의 투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역사 속에서 '아'가 '비아'를 물리치고 주체(主體)가 되어 오늘날 우리 자신으로 올바르게 선다는 의미라 생각된다. <환단고기>에서처럼 중원(中原)을 놓고 일대 격전을 벌이는 동이(東夷)-화하(華夏)의 대립 구도가 아닌, 우리 자신/민족의 주류(主流)가 되기 위해 벌이는 아(我)-비아(非我)의 투쟁. 이것이 바로 <조선상고사>가 <환단고기 桓檀古記>와 갈리는 결정적인 지점이라 생각되며, 유명한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는 단재 역사관의 참뜻은 이러한 의미라 여겨진다. 이러한 면에서 <독사신론>과 <조선상고사>는 마치 춘추전국시대의 전설적인 보검 간장-막야(干將-莫耶)와 같은 단재 사상의 음양검(陰陽劍)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섯 종족(부여족, 선비족, 지나족, 말갈족, 여진족, 토족) 가운데 모습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다른 다섯 종족을 정복하고 흡수하여 우리 민족의 역대 주인이 된 종족은 실로 부여족 한 종족에 지나지 않으니, 대개 4천년 우리 역사는 부여족의 흥망성쇠의 역사다... 나는 우리 부여족이 발달한 실제 자취로 우리나라 역사의 주요 골자로 삼고 기타 각 민족은 비록 우리나라 땅을 차지하고 주권을 다툰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두 적국의 외침의 한 예로서 보겠다. 내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부여족의 나라가 되는 것은 정신적으로 볼 때는 단군시대에 이미 시작되었고 실질적으로 얘기한다면 삼국 초기에 비로소 명백히 되었다고 할 수 있다... _ 신채호, <독사신론> 中
PS. 개인적으로 <환단고기>가 비판을 받아야 하는 주된 이유는 그 안에 깊이 자리한 내선일체(內鮮一體)사상때문이라 생각한다. 1930년대 발견된 것으로 알려진 이 책에서 몽골, 만주, 조선, 일본은 대동이(大東夷) 로 같은 민족으로서 '화하'족과 전쟁에 단결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불어넣는데 한 몫한다. 결국 일본의 대륙 침략의 명분을 준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와는 반대로, 거의 같은 시기에 나온 푸쓰넨(傅斯年)의 <이하동서설 夷夏東西說>은 정반대의 입장에서 같은 목적으로 씌여진 책이라 여겨진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리뷰에서 여러 차례 다루었기에 이만 줄이도록 하자...
역사를 쓰는 자는 반드시 그 나라의 주인되는 한 종족을 먼저 드러내어, 이것으로 주제를 삼은 후에 그 정치는 어떻게 흥하고 쇠하였으며, 그 산업은 어떻게 번창하고 몰락하였으며, 그 무공(武功)은 어떻게 나아가고 물러났으며, 그 생활관습과 풍속은 어떻게 별하여 왔으며, 그 밖으로부터 들어온 각각의 종족을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그 다른 지역의 나라들과 어떻게 교섭하였는가를 서술하여야 이것을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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