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드려야 제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어머니 어쩌면 오늘 죽을 지 모릅니다. 쌍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 소년병 이우근의 일기(포항여중 앞에서 전사) _ 윤태호, <인천상륙작전 5>, p68
<인천상륙작전 4>에서 시작된 한국전쟁은 무섭게 남북측 모두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이들의 삶을 송두리째 비극으로 던져 넣는다. 한국 민중의 삶을 대변하는 주인공 두 형제와 이들의 가족들 또한 이로 인해 가슴아픈 일을 겪으며 작품은 마무리된다.
(1950년 부산 임시정부) 당시부산의 풍경은 두 가지였다. 하루 한끼를 겨우겨우 해결하는 극빈층의 삶과 전쟁 중에도 방종한 생활을 하는 사회 지도층 또는 유지층의 삶이 그것이었다. 한국 유엔대표단이 외교적으로 어떤 수고를 감내하고 있는지, 이제 겨우 제 나라를 찾은 약소국의 외교관이 머나먼 타지에서 어떤 고초를 겪으며 국제원조를 끌어내려 노력했는지 댄스홀의 그들은 알 턱이 없었을 것이다._ 윤태호, <인천상륙작전 5>, p55
<인천상륙작전>에서는 두 세계가 교차된다. 일반 민중의 삶과 지배층의 삶. 두 형제의 모습으로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일반 민중의 삶은 고되지만, 짧은 서술로 표현되는 당시 국내외 정세와 지배층의 모습은 오늘날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작가가 설정한 이러한 구도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결정사항이 실제의 삶을 좌우하는 모습을 연상시켜, 이데올로기 전쟁이었던 한국 전쟁의 비극을 더 잘 전달한다.
인천 앞바다에 떠다니는 배들 본 적 있어요? 돛대에 빨간 천 매달고 다니잖소. 그게 다 우린 빨갱이 편이오~라는 표식이오. 근데 그중에 진짜 빨갱이가 몇이나 되겠소? 솔직히 고기 잡는 것밖에 모르던 우리가 뭘 알아서 누구 편을 들겠냐고?_ 윤태호, <인천상륙작전 5>, p84
영화 <남부군>을 보면 과거 1940년대 말 지리산 일대에는 아침에는 국군이, 밤에는 빨치산이 점령하면서 그 사이에 놓인 힘없는 이들이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많은 피해를 보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나오는 보도연맹 학살 사건과 같은 비극은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이들이 엮은 비극이 잘 표현된다. <남부군>의 문제가 <태극기 휘날리며>에서처럼 전국으로 확대된 것이 한국전쟁의 어두운 면이자 최대의 비극임을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다시 생각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천상륙작전 1>에서 작가가 제기한 물음을 떠올리게 된다. 과연 우리는 해방을 했는가? 또는 해방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 ~ 2006)의 개념사 중 9번 째 주제인 '해방'을 바그너(Richard Wagner)의 정의에 따라 생각해보자.
'해방'은 운동이자 목표의 개념이며, 결국에는 성취의 개념이 되었다. 그래서 이 개념은 [우선] 그것의 의미가 펼쳐진 두 가지 의미 축을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과거와의 단절과 해방이 강조되거나, 아니면 미래 지향성과 목표, 즉 자유에 집중했다... 둘째로 이 개념은 항시 해방을 실행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 위상을 지녔다. 말하자면 해방은 승인되거나, 쟁취될 수 있었다. _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9 : 해방> , p44
해방이 일본의 직접 통치로부터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면 1945년 일제의 정치적 지배로부터 우리는 해방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과연 우리가 1940년대의 문제로부터 자유롭게 우리의 미래를 생각할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면 그때에도 우리가 해방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이와 같이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의 해방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PS. <인천상륙작전 6>에는 노래 <단장의 미아리 고개>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한 가정의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죽은 딸과 죽어가는 아내를 바라보는 참혹한 심정을 어떻게 노래에 다 담아낼 수 있을까. 그럼에도 참 마음이 아프다...
미아리 고개의 원래 이름은 '되너미 고개'. 병자호란 때 되놈들이 넘어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 공동묘지가 생기며 사람이 죽으면 이 고개를 넘으니 이별을 상징한 고개가 되었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창자를 끊는 듯한 생이별의 고통을 받아야 하는 통곡의 고개가 되었다. 1956년 반야월은 <단장의 미아리 고개>라는 곡을 발표한다. 홀로 피난길을 떠났다가 돌아와 보니 아내는 영양실조로 누워 있고 네 살 난 딸은 죽어 있었다. _ 윤태호, <인천상륙작전 6>, p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