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 군도는 자기 혼자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흐름에 맞추어 발전했다. 국내에 실업자가 많았을 때는, 구태여 죄수들의 노동력을 이용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체포 목적은 노동력 동원이 아니라, 방해자를 제거하는 데 있었다.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 1918 ~ 2008)의 <수용소 군도 3>에서는 수용소의 성격 그리고 목적들이 표현된다. 작가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적군(독일군)의 포로 수용소로서 기능한 수용소 군도가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체제 반대 세력의 숙청 수단으로 활용되었음을 고발한다. 이와 함께, 비록 수용소의 성격은 바뀌었지만, 죄수들의 강제 노동이라는 기능은 바뀌지 않았음도 독자들은 확인한다.


 전쟁 중인 상태와 전쟁 후의 상태에서 부족한 것은 생산이다. 전시에는 군수물자가, 전후에는 생활용품과 사회기반시설(SOC)이 부족하다는 차이가 있지만, 국가 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는 안정되고 충분한 공급이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 지배계급에게 수용소 군도의 수감은 반체제 인사 제거와 노동력 공급이라는 두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반면, 이러한 사실은 수용소에 수감된 이들에게 사회로부터의 격리와 한계 상황으로 내몰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강요된 노동 속에 그들은 열렬한 의식적 창조의 최고 형태 중 하나를 찾아냈다. 스딸린에게는 '어딘가' 죄수들에 의한 대규모의 건설이 필요하고, 확실하게 다량의 노동력과 인명(꿀라끄 박멸 결과 발생한 잉여 인간)을 삼켜야하고, 살인용 독가스와 효과는 같으면서도 비용은 더 싸야 했다... 수용소 내의 경쟁과 돌격 작업 운동은 <보상의 모든 체계>와 결부되어, 그 보상이 돌격 작업 운동을 '촉진'하지 않으면 안된다. 경쟁의 중요 기반은 이윤 원리에 있다.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3>


 모든 것은 생산 지수에 의존하게 된다. 식사도! 주거도! 의복도! 속옷과 목욕하는 날도! 기한 전의 석방도! 휴식도! 면회도! 예를 들면 돌격 작업반원의 배지를 주는 것은 -순수한 사회주의적 형태의 권장이라 하겠다.... 균형 잡힌 질서가 확립되고, 이윽고 죄수들 자신도 그것을 유일하게 적합한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익숙해졌다. 그리고 우리도 이 책에서 그런 식으로 기술할 생각이다. - '재교육' 보다는 오히려 '노동'에 중점을 둔 질서를.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3>


 국가는 이렇게까지 잔인해서는 안 된다. 국민을 이렇게 위선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 죄수들은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한다. - 뚜흐따(속임수)와 암모날(폭약)이 없었더라면 운하도 건설되지 못했을 것이다 - 라고. 이 모든 것이 군도의 기반인 것이다.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3> 


 <수용소 군도>에서는 강제 수감된 이들의 처절한 생활과 한계 상황에 몰린 이들이 무너져 가는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극한 상황 속에서 정신은 붕괴되고, 자신의 연약한 몸 하나에 의지해 살아가는 죄수들의 모습은 독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들 죄수들을 동정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대신, 같은 아픔을 공감(共感)한다. 수용소를 국가 체제로 바꾸어 생각해보면 어떨까. 다소 지나친 감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수용소에 수감된 죄수들도 수용소를 원해서 간 것은 아니었고, 우리가 한 나라에서 태어난 것도 우리의 희망과는 무관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한 걸음 나가서 이들 사회 내의 질서를 본다면 이러한 생각은 더 굳어진다.


 수용소에서 이루어지는 육체적 가혹행위는 우리가 국가(또는 사회)에 반대되는 행위를 했을 때 행해지는 다른 징벌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라도 분명 같은 의도로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닐까. 또한,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사회, 가난과 배고픔으로 약자들을 억압하는 질서, 약자들을 분열시켜 지배층에 대항하지 못하게 하는 정치, 자본을 가진 이들의 예외 등은 수용소에서도 예외없이 적용되었다. 지금 우리 현재의 모습과 수용소의 모습이 이처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때, 과연 누가 누구를 동정할 수 있을까?


 수용소에서는 약자를 잘 때린다. 작업 할당계들이나 반장들뿐만 아니라 일부 죄수들도 자기가 아직 약하지 않다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납득시키기 위하여 약자를 괴롭힌다. 인간이 타인한테 잔혹한 짓을 하지 않고서는 자기의 힘을 믿을 수 없는 동물이라면 하는 수 없지 않겠는가?... '기아' 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은 수백년 전에 발견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 '기아'에 대해, 굶주린 자는 배부른 놈에 대해 반드시 반란을 일으킨다는 '진보적 이론' 전체가 성립된다.) 인간 자신이 의식적으로 죽으려고 결단하지 않는 한, 기아는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을 지배하고 있다.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3> 


 수용소 군도는 과거에 얻은 습성 중에서 단 한 가지만은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무뢰한과 파렴치범들을 고무시키는 일이었다. 파렴치범에게는 수용소에서 전보다 더 높은 '지도적인 지위'가 부여되었다... (스딸린의) 은사를 받은 것은 형사범이나 경범죄 죄수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수용소를 떠나고 있기 때문에 생산의 배가에 호응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정치범들이었다.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3> 


 1백만 루블로 건강은 살 수 없겠지만, 자유는 살 수 있어, 권력도 살 수 있어. 인간도 살 수 있어. 그런 백만장자는 사회에 얼마든지 있어.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3> 


 <수용소 군도 3>을 통해 1940년대 소련의 강제 수용소를 읽지만, 동시에 2020년대 우리 사회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고, 공감하는 것. 수용소의 비극은 과거지만, 우리의 비극은 진행중이라는 점이 더 가슴아프게 다가온다. 어쩌면, <수용소 군도>는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 ~ 1950)의 <동물농장 Animal Farm>보다 더 직접적인 풍자 소설일지도 모르겠다. 차이가 있다면, <동물 농장>이 동물 농장을 통해 소련을 풍자했다면, <수용소 군도>는 소련을 통해 우리 사회를 풍자한 것이 아닐까를 생각해 보며, <수용소 군도 3>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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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1-29 10: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본주의 사회구조 자체도 나름의 착취구조를 가지고 있으니까 <권력>은 어떤 이데올로기에서든 약자를 핍박하고 착취하는것 같아요. 3권(저에겐 고비였어요;) 완독 수고하셨습니다.👍👍👍

겨울호랑이 2021-01-29 12:31   좋아요 2 | URL
<수용소 군도 3>에서 그려지는 수용소 내의 질서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우리 삶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이러한 모습이 공산주의 체제 내의 수용소였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을 갖는다기 보다는, 미미님 말씀처럼 체제와 관계없는 사회의 근본적인 질서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러한 생각이 발전하면 인간 사회 발전에 대한 회의로 갈 수도 있지 않을까도 생각해 보네요... 제겐 작가가 써내려간 수용소의 의의가 전체 내용의 중간 부분에 배치되어 적절했다고 보여집니다. 아직 갈 길이 머네요. 미미님 감사합니다.^^:)

scott 2021-01-29 10: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백만 루블로 건강은 살 수 없겠지만, 자유는 살 수 있어, 권력도 살 수 있어. 인간도 살 수 있어. 그런 백만장자는 사회에 얼마든지 있어]밑줄 쫘악~👍👍👍

겨울호랑이 2021-01-29 12:34   좋아요 2 | URL
해당 구절과 관련해서, 저는 페르낭 브로델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말한, 시장경제와 자본주의의 구분이 떠올랐습니다. 공산주의, 자본주의 등의 체제와 관계없이 부족한 물건을 상대에게 주고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얻는 교환 경제의 모습은 인류가 오랜 사회 생활을 통해 이뤄온 삶의 모습이기에, 그 사이에서 생겨난 힘의 불균형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는 어렵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scott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