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그 자체로서 이미 권력의 실체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라는 점은 그 이후에도 한국 언론의 독특한 성격으로 규정된다._민주언론시민연합, <보도지침 1986 그리고 2016>, p31

 

  뉴스타파에서 제작한 <족벌, 두 신문 이야기>는 언론 권력의 두 핵심인 <동아일보 東亞日報>와 <조선일보 朝鮮日報>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 영화는 1988년 5공 청산 청문회에 출석한 두 언론 사주(社主)들의 증언의 진실을 찾는 구성을 갖는데, 그 과정에서 이른바 '민족정간지'라 주장하는 이들의 허위가 낱낱이 벗겨진다. 일본언론보다 더 일왕을 추종한 두 언론들. 일왕 생일 때마다 일장기를 게재한 이들 신문의 경쟁적 행태를 보노라면 과연 1936년도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살을 했던 동아일보가 맞는지 의심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한결같이 일장기를 신문 1면에 올린 조선일보는 신뢰성은 없지만, 황국신민일보로서 일관성은 있다 하겠다...  이와 관련하여 다소 내용이 길지만, <친일인명사전>에 실린 두 신문 사주들의 친일 행적을 옮겨 본다.


김성수(金性洙, 1891 ~ 1955) 보성전문학교 교장, 동아일보 사장.


 1891년 10월 11일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났다. 호는 인촌(仁村)이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10월 조선총독부로부터 경성방직 설립 인가를 받았고, 동아일보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20년 7월부터 동아일보 사장으로 일했다... 1937년 7월에 일어난 중일전쟁의 의미를 널리 확산시키기 위해 마련된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시국강좌를 7월 30일과 8월 2일 이틀동안 담당했다. 같은 해 8월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다... 조선에서 징병제 실시가 결정되자 1943년 8월 5일자 <매일신보>에 "문약(文弱)의 고질(痼疾)을 버리고 상무기풍을 조장하라"는 징병격려문을 기고했다. 이 글에서 징병제 실시로 비로소 조선인이 명실상부한 황국신민이 되었다면서 지난 오백년 동안 문약했던 조선의 분위기를 일신할 기회를 얻었다고 주장했다... _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p426


 방응모(方應謨, 1884 ~ ?) 조광 발행인. 조선일보 사장.


 1884년 1월 3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호는 춘해(春海)이며,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 1922년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한 뒤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지국장에 임명되었다... 금광개발에 뛰어들어 1924년 평안북도 삭주의 교동광업소를 인수하고 경영을 확대하여 굴지의 광산업자로 성장했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가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했다. 같은 달 조선군사령부 애국부에 고사기관총(제16호) 구입비로 1,000원을 헌납했다. 같은 해 7월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해 1940년 8월 폐간 때까지 재직했다... 1936년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가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정간과 강제휴간을 당하자, 경쟁관계에 있던 <조선일보>는 전국적으로 발전자축회를 개최하는 등 이를 사세 확장의 기회로 이용했다... 1937년 2월 원산의 순회 강연에서는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 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는 망언을 서슴지 않아 참석자들에게 봉변을 당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증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 씨' 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원의 손해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3.1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 이후 <조선일보> 지면은 '국민적 입장'으로 변했다는 조선총독부의 평가를 받았고, <조선일보> 안팎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편집방침은 바뀌지 않았다. <조선일보>의 지면 변화와 함께 방응모도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활동에 나섰다._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p173


  <족벌, 두 신문 이야기>에서는 1940년에 이루어진 강제 폐간 마저도 저항이 아닌 비즈니스 였음을 밝히고 있지만, 더 이상의 상세 내용 소개는 영화를 보는 이들의 즐거움을 빼앗는 것이기에 이만 줄인다. 해방 이후 슬그머니 복간한 두 신문들은 미군정(美軍政)하에서, 박정희(朴正熙, 1917 ~ 1979)의 군사정부 하에서 사실상 기관지 역할을 하면서 권력화되었다. 해방 전후 이들 신문들의 행적은 <보도 지침>에서 옮겨본다.


 제도 언론을 대표하는 <동아일보> 나 <조선일보>는 유난히 민족지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다. 이것은 그러나 그들이 해방 전부터 줄곧 권력의 토양 한가운데 뿌리박고, 언론이기 때문에 언론이라는 수단을 통해 철저하게 자신을 위장해서 민중 위에 군림해 온 증거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한다. 일제하 한국 언론은 일제의 이른바 문화통치의 소산으로 태어나 식민지 백성과 침략자 사이를 제도적으로나 사실상으로나 완충시키고 일본식 식민통치 방식의 일부로 기능하면서 자기를 유지해왔다. 해방 후 그들은 미군의 '우호 점령'이라는 우호적 상황 아래서 사실상 유일한 토착 실질 권력으로 인정받아 그 물적, 인적 영향력을 십분 활용하여 이니셔티브를 잡았다. 언론이 좌익세력과 민족세력을 배제하는 한편,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을 끌어들여 그들의 반민족적 본질을 다시 은폐하고, 그들이 만든 체제 안에서 <동아일보>를 주축으로 그 왼편에 자리 잡은 것이다. _민주언론시민연합, <보도지침 1986 그리고 2016>, p31


 언론 매체와 언론인. 두 족벌 언론들은 1971년 언론자유수호운동(言論自由守護運動)을 통해 참다운 언론의 역할을 수행하려는 언론인들에게 해직으로 응답하는 대신, 그들이 벌인 투쟁의 명예는 자신들이 가져가며 다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언론이라고 자부해왔음도 우리는 영화에서 지켜보게 된다. 정의와 진리 대신 비즈니스를 추구하는 이들이 1980년대 군사정권의 보도지침을 충실하게 따랐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태는 계속 진행형이다. 


 재직 당시 본인(신홍범)은 기자로서의 직업적 사명을 충실하게 해내기 위해 양심에 따라 훌륭한 신문을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던 평범한 기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평범한 기자들은 그 후 수많은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언론에 대한 권력의 압력과 탄압에 맞부딪히게 된 것이다. 기관원들이 거의 상주하다시피 신문사에 출입하면서 언론을 통제하는가 하면 보도기사와 관련하여 기자들과 신문사의 간부들이 연행되는 일이 잦아지게 되었다. 숨 막힐 것만 같은 억압적인 공포 분위기가 신문사의 편집국을 지배하게 되었다.(p421)... 국민 앞에 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자책 속에서 드디어 기자들은 언론자유운동을 벌이게 되었고 그러고는 마침내 무참하게 대량해직되었다. 이같이 언론자유를 외치는 기자들을 언론기업주라는 사람이 언론 현장으로부터 내몰았던 것이다. 그들은 그 피 묻은 손으로 권력과 손을 잡고 1975년 3월 이후부터 이 땅에 제도언론을 만들어 내게 되었던 것이다._민주언론시민연합, <보도지침 1986 그리고 2016>, p422 


  <족벌, 두 신문 이야기> 속에서 여러 생각을 해본다. 이른바 정론지라고 하는 언론사들의 부끄러운 민낯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닌 역사의 문제라는 사실, 그리고 창간 100주년을 앞두고 있는 두 신문사들의 오랜 역사 동안 우리가 알지 못한 진정한 언론인들의 숨은 노력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진실 속에서 짙은 배신감과 희망 또한 발견한다. 이 땅에 썩은 언론 매체는 분명 있지만, 또한 진정한 언론인들도 있다는 사실. 기업으로서 언론 매체와 진실을 좇는 언론인을 우리는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를 또한 생각한다. 그 어느 때보다 언론개혁의 목소리가 높은 지금 <족벌, 두 신문 이야기>는 우리에게 분명 많은 것을 말해주는 영화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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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1-25 09: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느 분석기사를 보니,
일등 신문이라고 떠드는 신문사 매출
의 70%가 광고매출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언론은 철저하게 기업이 주
는 단물, 광고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시스템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업의 뜻대로 움직이는 기관지라고
해도 무방할 듯 합니다. 자고로 물주
에게 저항하는 언론은 없었으니 말이죠.

겨울호랑이 2021-01-25 19:29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족벌, 두 신문 이야기>에서도 그들의 기사형 광고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낚시형 광고를 통해 기업의 상품에는 신뢰성을 부여하고 대가로 돈을 받아 챙기는 그들의 관행을 지켜보노라면, 얼마전 유튜버들의 뒷광고 논란은 오히려 귀여운 수준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레삭매냐님 말씀처럼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공공재에 관한 문제는 분명 우리가 깊이 고민할 문제라 여겨집니다. ^^:)

samadhi(眞我) 2021-02-08 15: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제는 민족정론지가 ˝굿모닝 충청˝으로 바뀌었지요. ㅋㅋ

겨울호랑이 2021-02-08 16:06   좋아요 0 | URL
보편적인 상식과 객관적인 진실을 전하는 언론 매체를 자본주의 사회에서 찾기란 참 힘든 것 같습니다. 자본이 없으면 기반이 약해서 오래 뿌리내리지 못하고, 생존을 위해 자본을 따라가면 변질되는 것을 보면서 자본주의 세계에서 바르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긴 합니다만....

samadhi(眞我) 2021-02-08 16:10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도 자본에 굴하기 쉬운데 하물며 큰 권력(?)은 오죽할까요. 그 돈 없으면 망하는 단체, 조직들이 돈 앞에 권력 앞에 당당하기란 쉽지 않겠지만. 숱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책임은 어쩌려는지. 갈수록 이게 아닌데 하고 생각이 드는 현상들이 일어나고 우린 그걸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마는 듯합니다.

겨울호랑이 2021-02-08 16:16   좋아요 1 | URL
어쩌면 어렸을 때 배워왔던 것처럼 큰 사람이 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사는 작은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어렵고 행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대가 바뀐 것인지, 개인의 가치가 바뀐 것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samadhi(眞我) 2021-02-08 16:19   좋아요 1 | URL
맞아요. 저도 요즘 들어 아무것도 되지 말자. 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러고나니 마음이 편해지더라구요. 그냥 삶을 살아가며 한없이 열린 상태로 깨어나자고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