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 1930 ~ 2004와 질 들뢰즈 Gilles Deleuze, 1925 ~ 1995를 '차이'의 철학자라고 부르는 데는 아무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데리다의 철학을 말할 때 해체주의라는 수식어를 빼고 말할 수 없고, 해체주의는 '차이'의 데리다식 버전인 '차연 差延'이라는 단어를 빼고 설명하기 힘들다. 들뢰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들뢰즈의 철학을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단어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것은 마땅히 '차이'가 될 것이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18


  데리다와 들뢰즈 철학 입문서인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는 두 철학자들의 공통된 주제인 '차이'로부터 이들 철학의 전반을 살피는 방향으로 나간다. 두 철학자 모두 '차이'를 다루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지만, 데리다는 보다 '기호 - 대상' 이라는 언어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들뢰즈는 '전체 - 부분'이라는 관점에서 체계 측면에 중점을 둔다는 면에서는 이들 사상에 차이가 있다.

 

 데리다는 우리의 가장 일반적인 표상 체계인 '언어'가 이러한 목소리를 어떻게 억압해왔는가를 밝힘으로써 지금까지 왜곡된 서구의 사상을 거침없이 비판한다. 한편 들뢰즈는 표상주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표상주의에 의해 억압된 존재들의 다양하고 차별적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철학의 방법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31 


 들뢰즈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실상은 존재의 모든 것을 담고 있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개념 이라는 것은 널리 받아들여진 도식에 맞는 부분만을 설명하는 것으로, 아직까지 설명되지 못한 부분 또한 분명 있기에 기존 개념은 한계를 지닌다. 무엇보다도 개별 존재는 각자가 가지는 고유한 특성인 '차이 자체'가 있다고 바라본다. 


 들뢰즈는 이렇듯 개념으로 드러날 수 없는 그 자체의 차이를 개념적으로 드러나는 차이와 달리 '차이 자체 la difference en elle-meme'라고 표현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차이 자체'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p48)... 들뢰즈가 보기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차이 자체'를 지니고 있으며, 그 차이는 틀에 박힌 개념이나 표상의 틀에서 깨어날 때 드러난다. 그때야 비로소 세상은 개념이 만들어낸 진부한, 너무나도 진부한 동일성의 틀로부터 깨어날 수 있다는 것이 들뢰즈의 생각이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49


 들뢰즈가 칸트의 도식으로부터 착안한 것은 상상력은 인식 활동에 종속될 경우에는 그저 개념을 위한 도식을 만들 뿐이다. 하지만 상상력이 개념으로부터 벗어날 경우 거꾸로 기존의 인식 활동이나 개념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도식을 만들 수 있다... 개념으로부터 새로운 개념이 나올 수는 없다. 새로운 개념이 나오기 위해서는 기존의 개념이 파괴되어야 한다. 기존의 개념을 파괴하고 새로움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은 개념이나 인식 활동이 아니라 개념의 밑바닥에 있는 도식이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43

 

 들뢰즈는 베르그송 Henri Bergson, 1859 ~ 1941의 물질 개념의 설명을 수용하고, 개념으로 표상되는 물(物)이 단일한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의 총합이라고 해석한다. 그렇지만, 개념은 이러한 물의 다양성 중 일부만을 선택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한계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으로 들뢰즈는 '기계'로 대표되는 물질문명이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보았다. 한 걸음 나아가 들뢰즈는 세상에 모든 것들을 '기계'의 관점에서 파악한다. 


 들뢰즈는 '기계론적 mecanique'인 것과 '기계적 machinique'인 것을 구분한다. 기계론적인 것이 미리 설계된 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형성된 체계라면, 기계적인 것은 그러한 엄밀한 체계를 벗어난다. 들뢰즈에게 기계적이라는 표현은 서로 이질적인 것들이 섞여 있어 언제나 변형될 수 있는, 잠정적이고 우연적인 배치의 상태와 관련이 있다.(p112)... 들뢰즈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기계로 간주했다. 그 이유는 어떠한 존재이든 나름대로의 체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113


 들뢰즈의 기계 개념은 '절단 coupure'과 '연결'이 의미로 해석된다. 이는  정신분석학의 의식과 무의식, 욕망과 충동과 연관지어 볼 수 있다. 다만, 들뢰즈는 이러한 분석을 인간 심리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정치철학의 체계와도 연결시키며 분석대상을 넓혀간다. <안티 오이디푸스 L’Anti-Œdipe: Capitalisme et schizophrenie > <천개의 고원 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enie>은 이러한 관점에서 들뢰즈를 바라볼 수 있는 책으로 생각된다. 


 들뢰즈는 기계론적이고 개념적인 체계를 '수목 樹木적인 것'이라고 부르고, 기계적이고 이념적인 체계를 '리좀 rhizome적인 것'이라고 부른다.(p125)...  수목은 수직적이며 위계적인 구조를 상징하며 통일성과 동질성을 특성으로 한다. 반면, 땅속에서 수없이 줄기와 뿌리가 무한 증식하는 땅속줄기 식물들을 보자. 리좀은 수평적이고 탈중심적이며, 무한한 생산성과 다양성, 개방성이 특징이다.(p126)...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구분을 파시즘과 전체주의는 구분에도 적용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파시즘은 리좀적인 데 반해 전체주의는 수목적이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129


 들뢰즈가 개념이라는 동일성의 원리에 억압되지 않는 '차이 자체'를 내세웠다면, 데리다는 차이라는 말 대신에 '차연'이라는 말을 사용한다.(p50)... 데리다는 굳이 차이가 아닌 '차연 differance'이라는 말을 고집한다. 세간에 너무 굳어져버린 차이라는 단어만으로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차이의 의미를 드러낼 수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51


 들뢰즈가 '개념'의 한계성에 보다 더 주목한다면, 데리다는 언어가 담지 못하는 한계성에 보다 더 주목한다. 음성 언어인 말과 문자 언어인 글이 가지는 서로 다른 특징은 온전하게 의미를 담아내지 못하고 이 과정에서 소실되는 의미가 생겨나게 된다.


 difference와 differance은 프랑스어에서 둘 다 '디페랑스'로 발음된다. 3음절의 모음 e와 a에 의해 표기로는 구분되지만 말로 구현될 때 두 단어의 차이는 소멸되고 만다. 분명히 문자로는 차이가 나지만 말소리로 따지면 차이가 없는 것이다. 데리다에게는 이러한 사실이 무척이나 의미심장한 철학적 맥락을 지닌다.(p52)... 한마디로 a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존재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즉 , "알파벳의 차이는 눈으로 볼 수 있고 글로 쓰일 수도 있지만, 발음이 같기 때문에 그 차이는 소리로 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a는 죽음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죽음은 '음성 언어'라는 폭군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다. 데리다가 e가 아닌 a를 붙인 이유는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차이가 어떠한 경우에도 고정되고 결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진행되는 과정에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61


 그렇다면, 과연 존재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데리다에 의하면 존재의 의미가 명확하게 어느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계 자체이다. 의식 - 무의식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텍스트라는 체계이며, 의미이기 때문에, 이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데리다의 입장이다. 이러한 부분은 들뢰즈의 다양체가 가진 '다양성'과도 통할 수 있다. 들뢰즈의 '다양성' 개념은 모든 물질이 무한한 이미지의 총합이라는 면에서 데리다의 이중인상과도 연결되지만, 이로부터 이들 사상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만약 예술작품의 의미가 텍스트 내부에 있는 것도 아니고 텍스트 외부에 있는 것도 아니라면 당연히 그것들이 얽히는 중간에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예술작품 자체는 텍스트의 안과 밖의 구분 자체가 허물어진 경계 자체일 뿐이다. 이 경우 예술작품의 의미는 텍스트 속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얼마든지 가변적일 수 있다. 말하자면 텍스트를 구성하는 어떠한 고정된 의미라도 쉽사리 '해체'될 수 있는 것이다. 데리다가 본 예술작품의 의미란 바로 이것이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96


 무의미의 존재를 인정하는가 하지 않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삼는가 삼지 않는가의 문제가 헤겔과 데리다의 결정적인 차이를 드러낸다.(p147)... 데리다에게 의미란 무의미와 대립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의미란 항상 그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의미와 무의미가 서로 중첩되어 의미가 무의미이기도 하며 무의미가 의미이기도 한 사태를 데리다는 이중인상 surimpression이라고 부른다.(p148) ... 데리다는 무의미와 의미의 얽힘 혹은 이중인상으로 이루어진 차연의 논리를 주장한다. 데리다의 텍스트 개념은 바로 이러한 차연의 논리에 의해 만들어진 잠정적인 체계에 불과하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150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들뢰즈가 '차이 자체'를 인정하며 개념의 한계를 지적하고, 이로부터 새로운 연결관계 형성에 대해 분석한다면, 데리다는 존재의 차이가 발생하는 원인에 집중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그리마톨로지 Grammatologie> <마르크스의 유령들 Spectres de Marx> <법의 힘 Force de Loi> 등을 보면 그의 사상 자체가 여러 주제의 중첩임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개별 리뷰로 정리하도록 하고,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라는 입문서 수준에서는 이 정도로 거칠게나마 윤곽을 잡도록 하자...


 데리다와 들뢰즈가 개념을 폄하하는 것은 세상을 개념으로 파악할 경우 세상의 다양성이 사라져버린다는 우려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철학이 개념에 저항한다는 것은 곧 현실의 풍부함을 되찾겠다는 노력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철학에는 개념을 최고의 가치로 숭상하면서 이 세상을 개념과 동등한 것으로 취급하려는 기존 철학자들의 사상을 극복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24 


PS. 들뢰즈의 책이 데리다의 책보다 더 접하기 쉬운데, 이는 들뢰즈 철학을 여러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들뢰즈의 창' 시리즈도 한 몫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20-09-27 1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들을 보니 열공하고 싶은 마음이 팍팍 드네요.
독서 계획표를 짜야겠어요. 스피노자, 칸트, 들뢰즈, 니체 등
책을 읽다 보면 많이 거론되는 분들이네요.

겨울호랑이 2020-09-27 21:41   좋아요 0 | URL
‘들뢰즈의 창‘ 시리즈는 들뢰즈의 시각에서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철학자들의 사상을 잘 정리한 책들이라 여겨집니다. 페크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

바람돌이 2020-09-27 1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해설을 읽으면 무슨 말인지 감이 잡힐것 같은데 막상 저들의 오리지널 책을 들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구요. ㅎㅎ 무슨 새로운 개념들이 그리 많은지..... 전 겨울호랑이님 해설로 만족하겠습니다. 페크님도 겨울호랑이님도 화이팅하셔서 무지한 저에게 기쁨을주세요. ^^

겨울호랑이 2020-09-27 21:45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님 뿐 아니라 저를 포함한 대다수의 독자들이 철학자들의 사상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대강의 의미를 이해하고 세상을 조금 다르게 볼 수 있다면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독자들로서는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처음에는 낯설어도 자주 접하다보면 글의 의미를 터득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책을 펼쳐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