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노블 제1차 세계대전 1914 - 1918 Putain de Guerre!>과 <그것은 참호전이었다 1914 - 1918 C'etait la guerre des tranchees>는 제1차 세계대전을 병사의 시각에서 바라본 작품들이다. 자크 타르디(Jacques Tardi, 1946 ~ )는 이들 작품들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한다. 작품 안에서 프랑스군과 독일군 병사들은 증오감에 넘쳐 상대를 죽이는 이들이 아니라, 죽음 앞에선 나약한 인간의 모습 그 자체다.
희생을 강요당한 우리의 머릿속에는 과상망측한 생각이 깃들 수밖에. 이 살육장에서 도망칠 철두철미한 계획을 꾸미기도 했다. 펄펄 끓는 정어리 기름을 마시는 놈들도 있었다. 그러면 황달이 와서 며칠 동안 입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온갖 종류의 자해가 시도되었다. 그것은 팔 하나 혹은 다리 하나를 잃는 대가를 감수해서라도 이 지옥을 벗어나는 데 훨씬 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p31) <그래픽노블 제1차 세계대전 1914 - 1918> 中
독일 병사들은 '친구'를 외쳤다. 양 진영이 처음부터 그랬다면 윗분들이 계획한 살육을 피할 수 있었을텐데. 하지만 그들이 우리 손에 쥐여준 총은 써야 했고, 그 결과도 따라왔다.(p73) <그래픽노블 제1차 세계대전 1914 - 1918> 中
전쟁터에 끌려가기보다 작은 부상으로 전선을 이탈하는 이들을 부러워하는 병사들, 서로 상대를 죽이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병사들의 모습과는 달리 얼마나 전쟁은 참혹했는가. 참혹한 전쟁과 파괴로 이성(理性 reason)의 시대를 종식시킨 제1차 세계대전의 진정한 승리자는 영국, 프랑스, 미국이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새롭게 태어난 소비에트 연방(소련)도, 멀리 떨어진 연합국 일본도 아니었다. 진정한 승리자는 각국의 대자본(大資本)이었다.
독일군은 크루프사가 루르 공장에서 제조한 포로 공격하고, 우리 군은 프랑스 슈나이더사가 르크뢰조, 생테티엔, 생샤몽 공장에서 제조한 대포로 응수한다.(p8) <그것은 참호전이었다 1914 - 1918> 中
이것은 분명 '문명'을 구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당위성'의 전쟁도 아니었다. 슈나이더, 생 샤몽, 피아트, 크루프, 비커스, 르노, AEG, 포커, 호치키스 등 호주머니가 찢어질 정도로 가득 찬 군수업체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전쟁이다. 거기에는 얼마 전부터 비스코른도 포함되었다.(p69) <그래픽노블 제1차 세계대전 1914 - 1918> 中
전장은 대자본들이 생산한 신무기들의 테스트장으로 바뀌어갔으며, 병사들은 테스터로 전락해갔다. 그리고, 이로 인해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이 새로운 시장의 창출을 위해 파괴비용으로 사용되었다. 이들 대기업들은 전쟁 중에는 무기산업으로, 종전 후에는 전쟁복구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이미 예약한 상태였다.
찬란히 빛나는 제1차 세계대전! 35개국아 직간접적으로 이 전쟁에 참전했다. 사망자가 1000만명이다. 얼마나 많은 생명이 진흙 속에 파묻혔는가. 얼마나 많은 부상자, 과부가 생겨났는가. 순무를 키워야 할 좋은 땅에는 십자가들만 솟아 있다. 사망한 프랑스군인들을 혁명기념일에 4열행대로 행군하게 한다면, 마지막 군인이 지나갈 때까지 5박 6일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비용은? 대포, 포탄, 그 밖에 다른 무기들은? 모두 2조 5000억 금본위 프랑이다! 그 돈이면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의 모든 주민들이 방 네 개짜리 집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숫자는 숫자일 뿐.(p112) <그것은 참호전이었다 1914 - 1918> 中
<그래픽노블 제1차 세계대전>과 <그것은 참호전이었다>는 작품 전체를 통해 전쟁의 비참함을 잘 표현한다. 그렇지만, 이처럼 비참한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시선을 돌려 1914년 사라예보 사건 직후의 유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개전(開戰) 초기 민족주의에 도취한 유럽인들은 전쟁을 피하기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평범한 시민들인 군중은 비통해하기는커녕 서로를 증오했다. 그들은 기쁨과 증오를 공유했다. 손쉽게 무찌를 독일과 독일인에 대한 증오를.(p36) <그것은 참호전이었다 1914 - 1918> 中
한 카페의 악대가 「라 마르세예즈」를 연주한다. 애국심에 불타오른 손님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국가를 제창한다. 한 노인만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다... 그 일요일, 나는 카페테라스에서 군중의 살기에 동조하지 않으면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 알게 되었다.(p37) <그것은 참호전이었다 1914 - 1918> 中
전쟁 초기 낭만주의에 물든 이들에 의해 제1차 세계대전은 걷잡을 수 없이 극단으로 치닫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들은 모두 피해자임과 동시에 가해자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 ~ 1975)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Eichmann in Jerusalem: Ein Bericht von der Banalitat des Bosen>에서 말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떠올리게 된다.
수많은 독일인들과 많은 나치스, 아마도 엄청난 수의 그들은 살인을 하지 않으려는, 도둑질하지 않으려는, 그들의 이웃이 죽음의 길로 가지 않도록 하려는, 그리고 그들로부터 이익을 취함으로써 이 모든 범죄의 공범자가 되지 않으려는 유혹을 분명히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맙소사, 그들은 그러한 유혹에 어떻게 저항하는지를 배워버렸다.(p227)...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을.(p349)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中
비록, 세계대전의 진정한 수혜자가 전쟁에 나서지 않는 권력자, 지배층, 자본들이라 할지라도, 이를 방관하게 만드는 것은 '악의 보편성'이며, 이는 우리들의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로부터 대파멸을 불러올 수 있음을 한나 아렌트는 경고한다. 악(惡)은 결코 악마처럼 기괴한 존재이거나, 하이드씨 처럼 분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악을 인정했을 때, 우리는 파멸을 막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제는 정리해보자.
악의 보편성을 의식하게 되면 악을 또 다른 차원으로 이해하게 된다. 악은 보편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경험 속 어디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악의 모든 장소, 모든 시간, 그리고 모든 분별 있는 개개인의 삶에 간여해왔다. 악이 보편적임을 이해한다.(p19)... 그러므로 악마란 기묘하고 한물간 존재가 아니라 인간 정신 안에, 또는 인간 정신을 압도하는, 거대하고 영원한 힘이 표출된 것이다.(p38) <데블 The Devil> 中
세계대전의 파멸적 결과와 이의 원인을 생각해 보면서 우리는 최근 우리 사회의 모습과 연관지어 볼 수 있다. 거의 2달 가까이 벌어진 언론과 검찰의 무도한 모습을 우리 모두를 대파멸로 이끌고 있다. 여기에 올라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는 더이상 침묵해서는 안된다. 침묵과 방관은 대파멸로 가는 것을 '순전한 무사유'로 암묵적 동의를 표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 안에 아이히만이 모습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이제는 우리가 검찰과 언론 그리고 자한당과 바미당을 견제하고 이들이 딴짓을 못하도록 준엄하게 심판하는 것. 이것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시대의 과제가 아닐까.
PS. 오늘 읽은 <좌우파 사전>에서 재밌게 읽은 퀴즈가 있어 옮겨본다.
Q :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소득에 따른 법칙금 차등화를 주장한 대통령은 누구일까요?(힌트 : 4지선다형에서 모르면 *번을 찍으시오.)
1. 김영삼 2. 김대중 3. 이명박 4. 노무현
정답 : https://www.hankyung.com/news/article/2011022362341
같은 주장을 해도 조국이 하면 안되는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다... 이와 더불어, 이분이 사회주의자라는 사실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