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 게르망트 쪽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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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 게르망트 쪽 2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Le cote de Guermantes> 역시 다른 편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이야기가 펼쳐진다. 할머니의 죽음, 알베르틴의 방문, 생루와 친구들과의 만남, 게르망트 댁의 만찬으로 이어지는 장면 안에서 우리는 인상파 화가들의 이야기,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 1802 ~ 1885), 에밀 졸라(Emile Francois Zola, 1840 ~ 1902) 등의 작가 이야기,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 ~ 1883)의 오페라, 드레퓌스 사건(L'affaire Dreyfus, 1894 ~ 1906) 등 당대 사회상과 문화 등을 넘치게 맛볼 수 있다. 문제는 너무 맛봐서 무엇을 맛봤는지 모를 정도라는 것이다.


  리뷰를 쓰면서 느끼는 부분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생각했던 부분 모두를 여러가지 제약으로 다 쓰지 못하는 점은 언제나 아쉬운 부분이다. 특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이런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진다. 


[사진] Best types of fish in the sea(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CMb5u1ArtkQ)


 마치 푸른 바다에 커다란 수많은 물고기가 있지만, 그 물고기 하나하나가 너무 커서 그 중 한 마리밖에 잡을 수 없는 어린이와 같은 느낌이 이와 같을까. 그나마 리뷰를 쓰고나면 물고기는 없고, 내 손에는 물고기 비린내만 남아있는 것 같아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안의 다음 문장에서 우리는 사회문제를 지적하는 저자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요컨대 평등 사회에서의 예절은 철도의 발달과 비행기의 군사적 이용보다 더 큰 기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설령 예절이 사라진다 해도 그것이 불행이라는 증거는 아무 데도 없다. 끝으로 사회란 사실상 민주화되어 감에 따라 점점 더 은밀한 방식으로 서열화되어 가는 게 아닐까?(p239)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中


 자본주의 사회, 민주주의 사회의 문제를 지적한 위의 문장으로만 쫓아가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전혀 다른 색깔의 리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스완으로 대표되는 부르주아 계급과 게르망트로 표현되는 귀족 계급간의 미묘한 대립과 공존의 문제와 프랑스 대혁명을 묶어서 볼 수도 있을 것이고, 드레퓌스 사건을 중심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전에 유럽에 팽배했던 반(反)유대주의를 중심으로 오늘날의 시오니즘(Zionism) 문제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작품 안에서 이런 주제는 정말 넘쳐나기에 어디에 초점을 두어야할 지 고민을 하게 된다, 이번 리뷰에서는 다른 부분은 과감하게 버리고, 소박하게 '할머니 죽음'과 '알베르틴의 방문' 에만 초점을 맞추려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의 시작은 처음부터 강렬하게 할머니의 죽음으로부터 출발한다. 할머니가 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다가 결국은 죽음을 받아들이고 서서히 죽어가는 할머니의 모습은 비장(悲壯)함을 불러일으키며 독자들에게 죽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산소의 쉬익거리는 소리가 그쳤고, 의사는 침대에서 멀어졌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희끗희끗 세긴 했지만 그 머리칼은 지금까지 할머니 연세에 비해 젋어 보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머리칼에만 유일하게 늙음의 관이 씌워졌을 뿐,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의 고통으로 새겨진 주름살이나, 오그라지고 부풀어 오른 살, 팽팽하거나 늘어진 살로부터 해방된 얼굴은 이제 다시 젊음으로 돌아가 있었다... 할머니의 이목구비는 순수함과 순종으로 섬세하게 새겨져, 뺨에는 세월이 점차 파괴해 버린 순결한 희망과 행복에의 꿈, 결백한 즐거움마저 빛나고 있었다.(p60)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中


 죽음 이후 할머니의 모습 속에서 독자들은 죽음과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영(靈)과 육(肉)이 결합되어 생명(生命)이 만들어지고, 그 생명이 시간 속에서 겪는 경험이 삶이라 했을 때, 그 삶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는 것이 죽음이라면, 영과 육의 분리, 혼(魂)과 백(魄)의 분리가 우리에겐 진정한 해방인 것일까. 죽음 후에 다시 젊음을 찾은 할머니의 모습 안에서 할머니는 이미 '되찾은 시간'이나 행복함으로 돌아간 것은 아닐까. 삶이란 어쩌면 영과 육의 불완전한 결합에서 오는 고통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할머니를 잃은 '나'는 다시 알베르틴과 재회를 한다. 이미 알베르틴과 원치 않은 이별은 한 후 '나'의 마음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마도 다타고 남은 재와 같기에 알베르틴이 자리할 곳은 더이상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알베르틴은 나의 마음안에서 꺼져버린 불씨를 다시 살리게 되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그녀의 '언어'였다.


 이제 나는 그녀(알베르틴)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우정을 깨뜨릴까 봐 발베크에서처럼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p79)... 하지만 내가 결심을 굳힌 것은, 그녀가 최근에 사용하는 언어를 발견하면서부터였다... 무스메(mousme)만큼 소름이 돋는 말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알베르틴처럼 아름다운 소녀가 발음하자 무스메란 단어도 그렇게 불쾌하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그 말은 외적인 깨우침이 아니라면, 적어도 그녀의 어떤 내적인 발전을 보여 주는 듯했다.(p80)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中


 사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체를 통해 문학가를 지망하는 '나'에게 있어 언어는 중요한 문제다. 부르주아 또는 귀족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나에게 있어 문학적 재능은 다른 이들과 연결할 수 있는 '끈'이었으며, 자신 역시 문학적 재능(언어)를 활용하여 다른 이들과 교류한다. 나에게 '언어'는 세계를 살아가는 도구이자 이유다. 


 훗날 나는 게르망트네 사람들이 사실 나를 다른 인종으로 생각했으며, 나 자신은 몰랐지만 그들에게서 유일하게 중요하다고 공공연히 말해 왔던 재능이란 걸 가졌다고 여겨 그들의 부러움을 자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p21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中


나는 충격으로 얼이 빠져 꼼짝할 수 없었다. 발밑에는 받은 명함과 봉투가 마치 총포가 발사된 후의 탄피처럼 떨어져 있었다. 나는 편지를 주워 문장을 분석했다. "그녀는 불로뉴 숲의 섬에서 나와 함께 식사할 수 없다고 했어.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라면 함께 식사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거야. 그녀(스테르마리아 부인)를 찾으러 가는 것 같은 무례한 짓은 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이해할 수 있어."(p13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中


 제가 부인(게르망트 공작부인)께 이 구절을 말씀드리는 것도 스무 번이나 '언어학자들'에게 물어본 후에야 겨우 짜 맞출 수 있었던 덕분이죠.(p33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中


 이런 화자가 이미 죽어버린 자신의 감정(알베르틴에 대한 사랑)을 언어를 통해 부활시켰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흑백사진과 같은 과거에서 언제나 '소리'나 '맛'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감정으로 표현되었다. 언어를 시각적인 '글'과 청각적인 '말(소리글)'로 나눈다고 했을 때, 알베르틴의 소리로 다시 사랑이 살아난다는 것은 <요한 복음>에서 육화된 Logos의 부활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사람에 대해 지적이라고 평하며 '인텔리전트(intelligent)'란 단어에서 두 l자의 발음을 강조하는 걸 보고 놀라 드디어 여인이 됐구나하며 주목한다. 하지만 이는 그들이 변했다는 표시로, 내게는 알베르틴이 사용하는 새로운 어휘와 내가 알았던 어휘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p78)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中


 알베르틴의 발음이 너무나 관능적이고 감미로워서 말소리만 들어도 키스를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은총이었으며, 그녀와의 대화는 상대방을 온통 입맞춤으로 뒤덮였다. 그렇지만 나에게 이 초대는 무척 상쾌했다.(p86)... 내 눈은 보기를 멈추었고, 그러자 이번에는 납작해진 코가 어떤 냄새도 맡지 못했으며, 그렇다고 욕망하던 장미꽃의 맛을 더 많이 느끼지도 못했는데, 나는 이 가증스러운 기호들 앞에서 내가 알베르틴의 뺨에 키스하고 있음을 깨달았다.(p9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中


 <잃어버린 시간을 찾어서 6> 안에서 할머니의 죽음은 '영'과 '육'의 분리를 가져온다. 반면, 알베르틴의 목소리는 화자의 '영'이 변화시키고, 이는 알베르틴과의 키스를 통해 '육'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죽음을 통한 '영 - 육'의 분리와 언어를 통한 '영- 육'의 결합이라는 대칭 구조.할머니의 죽음이 되찾은 시간을 가져온 것처럼, 알베르틴과의 재회가 반드시 행복을 의미하는 작가의 복선이 여기에 깔린 것은 아닐까 추측해본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구조를 통해서 로고스(Logos)를 통해 '말씀'이 '사람'이 된다는 요한 복음의 내용을 연상하게 된다. 프루스트가 유대인임을 고려한다면,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겠지만, 그럼에도 작품 속에 있는 다음의 구절을 통해 허튼 생각만은 아니라는 위안을 삼아본다. 


 그들은 개별적인 데서 보편적인 데로 이르지 못하고, 늘 과거에 전례가 없는 경험하고만 마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기서 어떤 교훈도 꺼내지 못한다.(p180)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中


 비록, 작품에 담긴 보편적인 프루스트의 의도에는 터무니없이 미치지 못하지만, 적어도 작품이 내게 가져다 준 개별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봤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이번 리뷰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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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8-26 07: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루스트의 소설을 여러 번 읽었어도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기 힘들 것 같아요. 어쩌면 아예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프루스트의 소설은 읽을 때마다 내용의 의미가 달라지고 새로운 해석이 가능한 풍부한 텍스트예요. 하지만 텍스트의 다채로움을 느끼기에 분량이 너무 많아요. 프루스트의 소설 완독을 두 번 이상 성공한 독자는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프루스트 준전문가예요.. ^^

겨울호랑이 2019-08-26 07:25   좋아요 0 | URL
^^;) cyrus님께서 말씀하신 뜻이 깊숙하게 느껴집니다. 그만큼 양과 질 면에서 풍부한 작품임이 분명합니다. 아직 부족함이 많지만, 이 작품을 프랑스어로 읽는다면 감동의 크기가 몇 배로 다가올 것 같습니다.

페크(pek0501) 2019-08-26 1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의도보다 자신이 느낀 의미가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요즘 작가가 주려는 메시지보다 제가 느낀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거기에 초점을 두고 글을 쓸 때가 있어요.
잘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8-26 12:48   좋아요 1 | URL
페크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프루스트가 표현한 것이 너무도 많아 아쉬움이 크지만, 한 술에 배부르기보다 꾸준히 여러 차례 읽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페크님,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