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오늘날까지도 반복 인용되는 <평화의 경제적 결과>(1919년 출간)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좌절된 평화라는 개념을 통해 독일의 입장을 지지했다... 알자스 지방을 프랑스에 돌려주는 문제에 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고수해 프랑스 대표단을 충격에 빠뜨렸다. 클레망소 총리의 오른팔인 프랑스 외교관 앙드레 카르디외를 기준에서 보면, 협상에 임하는 케인스의 생각은 패전국의 입장에 가까웠다.(p1)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8월호> 中


 일반적으로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은 실패한 국제 조약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패전국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승전국의 요구가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을 불러왔다는 것이 조약의 대강 내용인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Le Monde Diplomatique> 2019년 8월호는 베르사유 조약 100주년에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1883 ~ 1946)의 <평화의 경제적 결과 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의 내용을 통해 베르사유 조약을 재평가한다. 베르사유 조약은 과연 기념할 수 없는 조약일까?


 케인스는 프로이센식의 군사적 계급주의, 제국주의적 야망에 취한 지식인 계급, 그리고 산업계가 이끄는 독일 경제에 매혹됐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케인스는 독일에 관대한 평화조약을 지지했다. 그는 유럽에 다시금 번영을 가져다줄 강국은 독일이 유일하다고 봤던 것이다. 반면 프랑스가 고수한 입장에 대해서는 적개심을 보였는데, 이는 그의 강력한 반(反) 프랑스적 정서에 기인한 것이었다. 영국은 1918년 1차 대전에서 승리를 거뒀음에도, 평화협정 시 독일을 상대로 '가혹한' 배상을 요구하는 데 반대했다. 이는 가혹한 평화협정이 이뤄질 경우 프랑스가 최강국이 될 것을 우려한 데 따른 것이었다.(p3)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8월호> 中


[사진] 케인즈 (출처 : https://fee.org/articles/three-times-keynes-was-not-a-keynesian/)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알랭 가리구, 장퐁 기샤르 명예교수는 베르사유 조약에 부정적인 케인즈의 입장은 공정하지 않다. 반(反) 프랑스주의, 반(反) 유대주의 성향을 가진 케인스가 전후 대륙의 강자로 프랑스가 떠오를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들 저자들의 해석이다. 이들에 따르면 케인즈는 개인의 질투와 편견에 사로잡혀 유럽정치를 그르친 어리석은 인물에 불과하다. 이러한 평가에 대해 케인즈는 동의할 것인가. 케인즈는 사망했기 때문에, 그의 반론은 <평화의 경제적 결과>를 통해 해당 내용을 확인할 수 밖에 없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평화 예산은 기존 정책의 대폭적인 수정 없이는 균형을 맞출 길도 없었고 또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이 나라들의 입장은 거의 절망적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이 나라들은 국가 파산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은 적국으로부터 받을 거액의 배상금에 대한 기대에 의해서만 숨겨질 수 있을 뿐이었다.(p146)... 클레망소의 목표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독일을 무력화시키고 파괴하는 것이었으며, 그는 배상에 대해서는 언제나 약간 경멸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그가 독일을 예전처럼 무역 활동을 거대하게 벌일 수 있는 상태로 남겨놓을 뜻을 전혀 품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p147) <평화의 경제적 결과> 中


  프랑스 정책의 솔직한 목적, 즉 독일 인구를 제한하고 독일 경제 체계를 악화시키는 것이 윌슨 대통령을 위해 자유와 국제적 평등이라는 장엄한 언어로 포장되었다.(p65) <평화의 경제적 결과> 中


 독일을 한 세대 동안 예속의 지위로 전락시키거나, 수백 만 명의 인간에게 모욕을 안기거나, 독일이라는 국가 전체의 행복을 몽땅 박탈하는 정책은 혐오스럽기도 하고 가증스럽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정책을 정의의 이름으로 설교한다. 인류 역사의 중대한 사건들 속에서, 그리고 국가들의 뒤엉킨 운명의 전개 속에서, 정의는 절대로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p206) <평화의 경제적 결과> 中


 케인즈는 <평화의 경제적 결과>에서 배상금을 통해 재정위기를 넘기려는 의도와 함께 독일경제를 무너뜨리려는 프랑스의 의도를 고발한다. 실제로 프랑스는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Deutsch-Franzosischer Krieg)의 상처 - 잃어버린 알사스-로렌( Alsace-Lorrain) 지방, 막대한 배상금 약 50억 프랑 - 를 잊지않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승리는 프랑스에게 반세기만에 찾아온 통쾌한 복수의 순간을 의미했고, 실제로 프랑스는 전후 배상금의 50%에 해당하는 청구권이 주어졌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케인즈의 이러한 지적은 일리가 있다.

 

 심각한 문제로 제기된 것이 배상 문제였다. 배상의 원칙은 독일이 윌슨 14개 항목을 수락함으로써 성립되었고 전쟁의 책임이 독일에 있다는 베르사유 조약 제231조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파리 회의에서는 구체적인 배상금의 확정에 관해서는 결정을 보지 못하였다.(p626)... 1920년 7월 스파spa 회의에서 배상금을 받는 비율을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즉 프랑스 52%, 영국 22%, 이탈리아 10%, 벨기에 8%, 그리스/루마니아/유고슬라비아가 합해서 6.5% , 그리고 일본/포르투갈이 각각 0.75%였다....  1921년 4월 파리 회의에서 독일이 지불해야 할 배상금 총액을 1,320억 금 마르크로 결정하였다. 또 이 회의에서는 매년 20억 금 마르크의 지불과 독일 수출액의 26%를 징수키로 결정하였다.(p641) <세계외교사> 中


 그렇지만, <디플로마티크>에서는 베르사유 체제가 패전국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것이었다는 주장에 대해 반론을 편다. 전후 세계대공황은 미국에서 유래한 것이었으며, 독일은 1939년 배상금 지불 중지 이전 재무장을 할 수 있었기에 베르사유 조약이 제2차 세계대전을 가져왔다는 주장은 무리하다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베르사유 체제와 무관하게 독일은 이미 다음 전쟁을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베르사유 조약이 케인즈의 뜻대로 실행됐다면 나치즘의 급부상을 피할 수 있었을까? 조약 협정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결국 배상금 지불을 중단했으며 이전의 경제적 번영을 되찾았다.(p5)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8월> 中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다분히 프랑스의 입장에서 베르사유 조약을 바라본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장(戰場)이 되고 전체 프랑스 청년의 1/3이 부상 또는 사망한 막대한 피해를 입은 프랑스 입장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이 불평등 조약이라는 사실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분명 패전국에게 가혹한 면이 있다. 때문에, 베르사유 체제는 제2차 세계대전을 가져온 주요 원인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전국 독일에 대해 관대한 조치를 주장한 케인즈의 <평화의 경제적 결과>에 대해서도 선뜻 동의하기 어려워지는데, 이는 우리가 패전국에 대한 관대한 조치가 반드시 평화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교훈을 일본을 통해서 배웠기 때문이다.


  독일을 돕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가 서부 유럽의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 채택되고 거기에 미국의 재정적 지원이 더해진다면, 하늘은 유럽인 모두를 도울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서유럽의 민주주의 국가들이 교묘하게 중부 유럽을 빈곤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잡는다면, 감히 예견하건대, 머지않아 복수전이 펼쳐질 것이다.(p246) <평화의 경제적 결과> 中


  영국과 미국을 대변하고자 집필된 <평화의 경제적 결과>는 미국 상원에서 베르사유 조약의 비준 거부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조약이 조인된 후에도 케인스는 자신이 반대했던 조항들이 실행되는 것이 끝없이 압력을 가했다.(p3)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8월> 中


 케인즈의 주장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 일본에 대한 조치는 매우 관대했다. 여기에 독일과는 달리 분단되지 않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점령국이었던 한국과 베트남에서 일어난 전쟁특수를 통해 경제부흥을 일구어낼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일본은 진정한 <평화의 경제적 결과>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보여줄 사명이 있는 국가다.


 독일과는 달리 일본에 대한 전쟁은 주로 미국이 단독으로 담당하였고 따라서 전후 미국이 일본을 단독으로 점령하게 되어 일본은 분단을 모면할 수 있게 되었다. 1945년 4월 루스벨트 사망 이후에는 일본에게 어느 정도 온건한 입장을 취하는 견해가 우세하게 되었고 이것이 9월 6일 '항복 후에 있어서 미국의 초기 대(對)일정책'이란 선언에 구현되었다. 이 선언은 비무장화, 비군사화, 민주적 개혁을 핵심 내용으로 하고 민주적 개혁의 기본 방향으로 정치적 자유의 회복, 전범의 처벌, 재벌 해체 등을 정하였다.(p854) <세계외교사> 中


 미국 국내에서는 강화조약을 엄격히 할 것인지 아니면 관대히 할 것인지 끊임없는 논의가 되풀이되었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엄격이나 관대냐 하는 데 있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낡고 위험한 침략적 성격의 틀을 타파하고 새로운 목표를 세우는 데 꼭 알맞은 엄격함을 구사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어떤 수단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해당 국민의 성격 및 해당 나라의 전통적 사회질서에 따라 정해진다.(p387)... 프로이센적 강권주의가 일반인의 가정생활 및 일상적인 시민생활에 깊이 뿌리내린 독일에는 거기에 알맞은 강화 조건이 필요하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독일과는 다른 조건이 요구된다. 그것이 현명한 평화 정책이다.(p388).... 일본이 평화국가로 출발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참된 장점은 어떤 행동 방침에 대해 '실패로 끝났다'고 인정한 뒤부터는 다른 방향을 향해 노력한다는 점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인은 양자택일적 윤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p389) <국화와 칼> 中


<국화와 칼 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의 저자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 1887 ~ 1948)는 책에서 일본인들은 실패를 받아들인 후 자신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성향이 있음을 말하면서 전후 일본에서 평화 정책을 펼것을 주장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일본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면을 보여왔다. 베네딕트가 말한 양자택일적 윤리는 이러한 점에서는 맞지만, 1,400회의 수요 집회가 있는 동안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해 반성없는 일본의 모습을 보면 케인즈가 말한 관용(寬容)이 평화를 보장하는가에 대해 우리는 분명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형제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주소서! 노동과 생업의 결실을 강탈해가는 강도를 증오하듯이, 영혼에 가해지는 폭압을 증오하게 해주소서. 전쟁이라는 재앙은 피할 수 없다고 해도, 평화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서로 미워하지 않고 서로 괴롭히지 않게 해주소서. 그리고 시암에서 캘리포니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언어로, 우리에게 이 삶을 주신 당신의 은혜를 찬양하면서 이 찰나 같은 삶을 살게 해주소서.(p165) <관용론> 中


 일찌기 볼테르(Francois-Marie Arouet, 1694 ~ 1778)는<관용론 Traite Sur La Tolerance>에서 관용을 통해 전쟁 없는 세상과 평화로운 세상을 기도했지만, 아직 그런 세상은 되지 않은 듯하다. 2019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일이자, 광복절(光復節)을 맞아 일본이 저승에 있는 케인즈와 베네딕트를 더는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라면서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사진] 1,400회 수요집회(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8/14/2019081401643.html)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19-08-14 2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랑스로서는 1871년 보불전쟁에서 패전한
뒤, 절치부심해서 드디어 복수의 시간이 왔
는데 패전국에게 양보할 생각이 조금도 없
었을 겁니다. 프로이센이 그전에 자신들에게
받아간 엄청난 전쟁 배상금과 영토할양이라
는 치욕을 잊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케인즈와의 영국이 추구한 합리적 사고가
프랑스에게는 먹히지 않았다는 점이 더 큰
전쟁의 도래를 초래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전후 일본에서는 총독 맥아더의 천황제
용인과 명확한 전쟁 책임의 소재를 명시하
지 않은 것이 작금의 역사 분쟁의 단초가
되지 않았나 뭐 그런 생각해 봅니다.

겨울호랑이 2019-08-14 22:35   좋아요 0 | URL
베르사유 조약 자체가 패전국에게 가혹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승전국에게도 전후 안정적인 재정상황을 보장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모두에게 만족스럽지 못한 체제였다 생각합니다. 1차 세계대전 승전국 이탈리아에서 파시스트가 출현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베르사유 체제 자체보다는 대공황을 극복할 수 있는 식민지(시장)의 보유여부가 중요했기에 제국주의가 존재하는 한, 세계대전의 불씨 또한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의 연장에서 일본의 천황제가 남아있다는 자체가 제국주의의 유산이기에 레삭매냐님 말씀처럼 전후 청산이 되지 않은 하나의 상징이라 여겨집니다. 가라타니 고진 등 일본의 여러 학자들도 레삭 매냐님과 같은 의견으로 알고 있습니다.^^:)

2019-08-15 08: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5 0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9 1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9 14:1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