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天理)의 길은 아주 넒어서 조금이라도 마음을 여기에 두면 가슴 속이 문득 커지고 밝아짐을 깨닫게 되나, 인욕(인욕)의 길은 매우 좁아서 조금이라도 여기에 발을 들이면 눈앞이 모두 가시덤불과 진흙탕이 되고 만다.(p248) <채근담, 수신과 성찰 修省 14 > 中


 손이 가는 대로 골라 잡은 <채근담 菜根譚>을 펼쳐들고 몇 구절을 읽다보니, 위 구절에서 눈이 멈추게 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음의 성경 구절이 대구(對句)로 연결된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고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고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 ~ 14>


 <채근담>과 <성경> 모두에서 추구해야할 가치를 말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조금 다르다. 넓은 길과 좁은 문. <채근담>에서는 하늘의 이치에 마음을 두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이를 넓은 길로 바라본 반면, <성경>에서는 소수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좁은 문으로 비유한다. 이들이 차이에는 '넓다'와 '좁다'라는 상태에 대한 차이 뿐 아니라, '이곳'과 '저곳'이라는 위치의 차이도 나타난다.


 <채근담>에서 하늘의 이치는 밖에 있지 않고 우리의 발 아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채근담>에서 하늘의 이치는 지금 이 순간 내가 걸어가는 길이기에 자연스럽고 편안할 것이다. 하늘의 이치가 지금 이순간 나와 함께 있는 것이다. 반면, <성경>에서 하늘의 이치는 미래에 내가 가야할 곳이며, 문을 열어야 들어갈 수 있는 현재의 나와 단절된 공간으로 느껴진다. 정리하면, <채근담>에서 인간은 하늘의 이치를 자신 안에 갖고 있는 존재이기에, 인욕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것으로 족한 반면, <성경>의 인간은 끊임없이 노력해야 겨우 하늘의 이치에 닿을 수 있는 존재로 보여진다. 


조금 더 나아가 성경의 위 구절을 유명하게 만든  앙드레 지드(Andre Gide, 1869 ~ 1951)의 <좁은 문> 을 생각해보자.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소설이지만, <좁은 문>에 대한 해석을 조금 옮겨본다.


 <좁은 문>에서 알리사는 사촌동생 제롬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도 지상적(地上的) 사랑을 눌러버리고 혼자 쓸쓸하게 집을 나가서 아무도 모르게 죽는다. 알리사의 이 행위는 불륜의 모친에 대한 괴로운 추억과 제롬을 남몰래 사랑하는 동생에 대한 따뜻한 애정 등 몇 가지 원인을 생각할 수 있으나 진짜 원인은 그녀의 신비적인 금욕주의에 있다... 지드는 이 작품에서 비인간적인 자기 희생의 허무함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고 할 수 있다...(츨처 : 두산동아대백과)


 이러한 이야기의 구조 속에서 우리는 두 가지 관점에서 알리사의 죽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쓸쓸한 알리사의 죽음을 볼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지드의 자기 희생 비판이 이같은 관점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알리사의 죽음은 안타까운 사건이 된다. 그렇지만, 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를 떠올려 본다면 그녀 죽음의 의미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소녀가 쓸쓸하게 죽어갈 때 본 할머니의 환상이 소녀에게 미소를 준 것처럼, 알리사가 죽음의 순간에 그녀가 그토록 원하던 신의 모습을 봤다면, 그녀의 죽음을 안타깝다 여길 문제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알리사가 제롬과 우리를 불쌍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얻었다면, 성냥팔이 소녀 미소의 의미를 주위 사람들이 몰랐던 것처럼 우리는 죽음의 의미를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생각할 것은 우리 자신을 넓은 길에 놓느냐, 좁은 문을 바라보며 살아갈 것인가 하는 삶의 태도를 결정하는 문제라 여겨진다. 그런데, 사실 두 문장을 잘 보면 서로 통하는 바를 발견할 수 있다.  <채근담>에서 언급된 넓은 길을 가는 이는 깨달은 자이며, 성령을 받은 자이고, 성인(聖人)이다. 반면, <성경>의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이는 아직 깨닫지 못한 자이고, 성령을 받지 못한 자이고, 범인(凡人)이라고 본다면, 지금 자신에 대한 긍정(肯定)과 부정(不定)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자기 자신을 어느 쪽에 놓고 살아갈 것인가하는 문제는 온전히 자신의 선택(Choice)일 것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구일신일일신우일신) - 진실로 날로 새로워져라! 날로 날로 새로워져라! - 는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묵묵하게 살아간다면 넓은 길을 통해 좁은 문으로 이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알리사 역시 신에 대한 사랑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사랑도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이번 페이퍼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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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8 0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08 0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oren 2019-02-08 11: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채근담』을 보니 그 책을 읽으면서 한자로 된 문장들을 일기장에 부지런히 옮겨 적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그 당시만 하더라도 한자를 거의 일상적으로 썼던 것 같은데, 지금 돌아보니 그게 벌써 37년 전의 일이네요. ㅠㅠ

겨울호랑이 2019-02-08 12:37   좋아요 1 | URL
oren님의 필사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었군요! 필사가 고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것을 oren님을 통해 새삼 느낍니다!^^:)

서니데이 2019-02-09 16: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전이 된 책들은 여러번 읽어도 다시 읽으면 새로울 때가 있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아직 한겨울인가봅니다. 날씨가 차갑습니다.
겨울호랑이님, 따뜻하고 좋은 주말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19-02-09 16:12   좋아요 1 | URL
네 그렇습니다. 매번 읽을 때마다 다르게 다가오는 것이 고전이 주는 매력이라 생각됩니다. 서니데이님께서도 행복한 주말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