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정원은 하나부터 아홉까지 인공으로 조성되었다. 중국과 일본의 정원 역시 그 점에서 크게 예외가 아니다. 규모뿐 아니라 그 숫자도 결코 적지 않다. 이들에 비추어 우리 전통정원은 인위의 흔적이 뚜렷하지 않으며 그 수도 그리 많지 않다.(p10)... 유럽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정원과 함께 잘 알려지지 않은 정원들이 무수히 많다. 특히 영국 같은 경우에 세계적인 명원으로 꼽힐 대규모의 풍경식 정원이 전국에 널려 있다. 독일은 크고 작은 도시들마다 최소한 하나씩 정원이 있다.(p12) <한국 정원 답사수첩> 中
<한국 정원 답사 수첩>에서 말하고 있는 외국의 정원과 뚜렷이 구별되는 우리나라 정원(庭園)의 특징은 '자연과의 조화'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회화에서 말하는 '여백의 미'처럼 전통의 아름다움과 특징을 막연하게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번 페이퍼에서는 전통 정원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헤르만.F. 폰 퓌클러무스카우(Hermann Furst von Puckler-Muskau, 1785 ~ 1871)의 <풍경식 정원 Andeutungen uber Landschaftsgartnere>속에 그려진 서양 정원(Park, Garten)에서 추구하는 아름다움과 함께 살펴보면서 이를 찾아보고자 한다.
1. 계절에 따른 정원의 아름다움 : 조화 VS 설계
<한국 정원 답사수첩> 속에서는 계절에 따라 다른 아름다움을 선보이는 정원의 예로 창덕궁 부용정(昌德宮 芙蓉亭)을 말하고 있다. 전통 정원 아름다움의 근원으로 인간이 만든 건축물(정자)와 이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자연과의 조화를 말한다. 반면, <풍경식 정원>의 저자는 자연과의 조화보다는 철저한 조경 설계가 중요함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자연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는 여러 곳에서 나타나게 된다.
[사진] 부용정 (출처 : http://www.koya-culture.com/news/article.html?no=100961)
원도방지 圓島方地의 정형성과 부용정 芙蓉亭의 아름다운 자태를 중심으로 형성된 부용지원은 한국정원의 백미라 할 수 있다.(p54)... 부용정은 어느 철에 가도 좋다. 봄철에 가면 주변 언덕 이곳저곳에 연분홍빛 진달래가 꽃봉오리를 터트린다. 여름철의 부용정 지원은 싱싱한 아름다움이 있어서 좋다. 부용정 지원의 단풍은 그 맛이 특별하다... 이 곳의 단풍은 사람의 숨결과 잘 조화되는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다. 겨울, 눈 오는 날, 하얗게 물든 온 천지에는 적막만이 가득하다.(p57)... 부용지는 네모난 형태의 못으로 못 속에는 원형의 섬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났다는 천원지방의 음양오행사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원도방지인 것이다.(p58) <한국 정원 답사수첩> 中
자연을 끌어들이고, 자연으로 나가고, 자연과 어울려 합일되는 인간과 자연의 상생성은 소쇄원 瀟灑園이나 독락당 獨樂堂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원리는 단지 소쇄원이나 독락당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별서정원에서 공통적으로 나는 것이다.(p320) <한국 정원 답사수첩> 中
잘 계획된 풍경식 정원에는 별다른 색상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적절히 구성된 형상만으로 사계절 항시 경관의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자연의 조화도기대할 수 없는 겨울이라 하더라도 나무와 잔디 그리고 수면이 어우러진 한아름의 경관을 이룰 뿐 아니라 이들이 함께 일구어낸 물가의 산책로며 호안선이 만들어 놓은 수변경관 역시 흥미로운 장면을 연출해 준다.(p38) <풍경식 정원> 中
2. 정원에 담긴 주제 의식 : 철학적 의미 VS 시각적 의미
<한국 정원 답사 수첩> 속에서는 정원에 담긴 의미가 강조된다. 사찰 정원에 담긴 불교 사상, 민간 정원에 담긴 선비 정신등이 표현된 전통 정원은 거의 같은 구도를 가지고 있다. 배산임수(背山臨水), 좌청룡 우백호(左靑龍 右白虎)등의 풍수(風水)사상이 그것이다. 반면, <풍경식 정원>에서는 정원이 가지는 독창성과 차별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면에서 철학적 의미를 강조한 우리 전통 정원과 차이를 보인다.
송광사의 계담 溪潭은 우리나라 전통사찰에 조성된 몇 안 되는 계담 가운데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수면에 비치는 건물의 그림자가 아름다운 곳이다. 특히 우화각 넘어가는 다리의 홍예가 물에 비쳐 원상을 이루게 되면 그야말로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의 진리를 단박에 깨우치도록 만들어 준다. 이 계담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계원 溪園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위한 심미적 장소가 아니라 불교적 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든 특별한 신앙공간이다.(p190) <한국 정원 답사수첩> 中
[사진] 임대정 원림( 출처 : http://hcs.cha.go.kr/korea/heritage/search)
임대정 臨對亭 정원은 사평천의 동쪽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언덕 위에 지어놓은 임대정이 정원의 중심이 된다. 임대정을 특별히 서북향으로 앉혀 놓은 것은 사평천의 물길이 좌청룡쪽에서부터 우백호 쪽으로 흘러드는 서출동류 西出東流의 형식을 취할 수 있었던 뜻인가 싶다.(p210) <한국 정원 답사수첩> 中
한 폭의 그림과 같은 풍경이라 하더라도 어디서나 똑같은 모습으로 반복되다보면 결국 천편일률적인 인상을 줄 뿐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광경을 제공하고 다른 어떤 것도 능가할만한 다양한 매력요소를 제공하며 웅장한 면과의 조화를 별 무리 없이 확보하려면 풍경식 정원의 규모는 충분히 큰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자연이 주는 세세한 아름다움도 간과할 수는 없지만,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무래도 넓게 확장시켜 놓은 광활한 것이 작은 것 보다 나을 수 있다.(p32) <풍경식 정원> 中
3. 정원 안의 건축물 : 정자(개방성) VS 저택(폐쇄성)
우리 나라 정원에서 빠지지 않는 건축물은 '정자(亭子)'다. 정원에서도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해서 전체적으로 관조할 수 있는 정자는 개방적인 건물이다. 반면, 풍경식 정원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은 '저택(邸宅)'이다. 정원의 주인이 거주하는 이 공간은 생활공간이기 때문에 외부에 대해 폐쇄적이라는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우리나라 건축은 자연과 잘 어울리고 자연에 녹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배경에 비해 특별히 건물이 노출되어 음과 양의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정자는 다르다. 정자는 사방으로 시계가 열려 있어야 하기 때문에 돌출된 장소에 자리를 잡게 된다. 초간정 草澗亭 역시 바위 위에 올라앉아 있어 쉽게 눈에 띈다. 조금 도드라지게 보이기는 하지만 자연에 순응해 자기 자신을 낮추고 있을 뿐이다.(p415) <한국 정원 답사수첩> 中
[사진] 초간정(출처 : http://www.k-heritage.tv/brd/board/275/L/menu/254?brdType=R&bbIdx=5432)
건축물은 언제나 경관과 함께 하면서 서로 밀접하게 엮여간다는 사실은 정말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정원의 건축이라 해서 자연과 잘 어우러지거나, 보다 쾌적한 환경이나 전원적인 아름다움이 요구되는 등 별도로 정해진 어떤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p42)... 아름다운 조화를 논의하는 것은 그 모습으로부터 건축의 용도를 짐작할 수 있는 목적성과 합치되도록 형태를 갖추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p43)... 정원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은 물론 저택이다.(p45) <풍경식 정원> 中
4. 정원의 나무들 : 개체와 전체
우리 나라에는 이미 많은 나무들이 자생(自生)하고 있기에 몇 그루의 나무만으로도 훌륭하게 경관을 꾸밀 수 있는 반면, 기본적으로 잔디를 배경으로 한 풍경식 정원에서는 나무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중요하다. 때문에, 전체와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에는 옮겨심거나 심한 경우 베어지기도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두 책의 내용으로 볼 때 전통 정원에서 나무는 같이 가는 동반자라면, 풍경식 정원에서는 하나의 도구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집 주위로 소나무, 느티나무, 참나무 등 많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어 집안에 나무를 많이 심지 않아도 식생경관을 얻는 데 부족함이 없다. 특히 대문 밖 문간마당에 자라고 있는 오래된 은행나무 한 그루는 입구성을 부여해주는 훌륭한 상징물이 되고 있다. 은행나무와 회화나무는 오래전부터 학자수로 완상할만한 가치가 있다.(p522) <한국 정원 답사수첩> 中
지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나무 개체로는 아름다운 경우라 하더라도 전체 녹지의 조화와 목적에 대립되는 경우라면 희생시켜야 할 수도 있다... 다른 나무들을 대담하게 제거함으로써 많은 이점을 얻을 수 있음과 동시에 큰 아름다움을 취할 수도 있으며, 손실을 감수함으로써 얻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이 크다는 사실로 스스로 위로할 수밖에 없다.(p66) <풍경식 정원> 中
5. 정원의 물 : 계류 VS 호수
전통 정원에서 물은 자연스럽게 흐르는 존재다. 인공폭포를 조성하는 경우에도 그들이 꿈꾸던 이상향(理想鄕)의 모습을 그 안에 담으려 했던 반면, 서양의 풍경식 정원에서 물은 그렇지 않다. 자연스러운 늪보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낫다는 <풍경식 정원>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우리나라 전통의 연지(蓮池)는 아름다운 못이 아닐 것이다.
[사진] 강진 백련당(출처 : http://hankukmail.com/newshome/print_paper.php?number=21604)
계류 溪流는 인공적으로 조성한 못과는 달리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경관미를 연출하고 있다.(p393)... 영벽지 影碧池 주변은 자연 암벽들로 이루어져 있어 원생적인 자연의 분위기를 맛볼 수 있는데, 시에서 읊은 것처럼 물이 흘러들어오는 북쪽 암반의 층단에 수로를 파고 물길을 모아 인공폭포를 조성했다... 아마도 이 공간에서 신선의 세계를 연출하고자 했던 모양이다.(p512) <한국 정원 답사수첩> 中
풍부한 식생만큼 필수적이지는 않지만 강이나 호수의 신선하고 맑은 물과 함께 하게 되면 경관의 아름다움은 무한히 상승되고 눈과 귀는 더욱 즐거워질 수 있다.... 나는 어설픈 모방이라면 오히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조언한다. 물 없이도 아름다운 자연은 있어 주지만 악취 나는 늪은 온 지역을 오염시킨다.(p105)... 하지만 어떤 무엇을 취하려는 간에 인공의 수경관(水景觀)에 자연스로운 모습을 갖추어 주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p106) <풍경식 정원> 中
<한국 정원 답사 수첩>과 <풍경식 정원>에서 말하고 있는 정원의 구성 요소는 이처럼 거의 유사하다. 건축물과 주변의 나무들, 그리고 주변을 흐르는 물 등. 그렇지만, 이러한 같은 요소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같은 쪽을 향해 있지만 서로 다른 것을 바라보는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자연이 만들어낸 형상을 모델 삼아 중간적인 방안을 모색해 볼 수는 있겠다. 예를 들어 거센 물살이나 계곡의 물에 의해 충적된 돌무더기 형태로라면 적어도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저절로 바위와 비슷한 형태를 갖추거나 최소한 그림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다. 이런 방식으로 쉽게 자연을 모방할 수 있다.(p115) <풍경식 정원> 中
정원에 자연을 담고자 했던 전통 정원과 마찬가지로 <풍경식 정원>에서도 자연의 모방을 말하고 있지만, 자연을 모방(模倣)하는 태도는 양자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장파(張法, 1954~ )교수는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 에서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중국 미학의 '마음으로 조화 본받기'에서 '본받는' 방식은 서구인의 모방과는 다르다. 그것은 '조화'의 성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국 문화의 조화는 주로 산수 자연에서 구현되어 있다.(p374)... 서구에서 산수의 본질은 우주와 마찬가지로 형식(형상과 색채)과 거기에 내포된 의미에 의해 규정된다. 풍경을 마주하고 그림을 그려야만, 비율/색채/의미 내포를 가장 정확히 반영해 낼 수 있고 우주의 본질을 가장 전형적으로 반영해 낼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의 우주는 실체적이지도 형식적이지도 않다. 중국 화가는 언제나 "실컷 돌아다니면서 한껏 보고 나서, 그것이 가슴속에 역력하게 새겨지는" 경지를 추구했다.(p375)... 큰 것으로 작은 것을 살피는 방식이란 화가가 많은 경험을 하고 충분히 유람하며 충실히 수양을 쌓아 아름다운 산과 강이 "가슴속에 역력해지면", 그것을 우주적 차원에서 그려내는 것이다.(p376)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 中
물론,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에서 동양미학은 대부분 중국을 말하고 있기에, 한국의 정원에 중국 미학 사상을 찾는다는 것에 대해 조금은 주저하게 된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한국의 정원에도 이러한 중국 미학의 태도를 대입하더라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되기도 한다. <한국 정원 답사 수첩>에 소개된 고산 윤선도(尹善道, 1587 ~ 1671)가 병자호란 이듬해 보길도에 조성한 원림,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 ~ 1553)이 파직 후 고향에 돌아와 지은 독락당(獨樂堂) 등 많은 정원이 인생의 풍파를 겪은 후 만들어진 것임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다. 세월의 풍파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깨달은 이들이 추구한 아름다움이 주변과 어우러지는 조화(調和 harmony)로 흘러갔던 것은 낙수(落水)만큼이나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니었을까.
<한국 정원 답사 수첩> 과 <풍경식 정원>에 소개된 동서양 정원의 다른 모습 안에 담겨진 아름다움(美)의 다른 의미를 되새기며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