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 디쾨터(Frank Dikotter, 1961 ~ )의 인민 3부작은 <문화 대혁명 : 중국 인민의 역사 1962 ~ 1976 The Cultural Revolution : A People's History 1962 ~ 1976>으로 마무리된다. 일반에게 홍위병(紅衛兵)으로 대표되는 문화 대혁명(文化大革命)의 시작은 스탈린(Joseph Vissarionovich Stalin, 1879 ~ 1953) 사후 흐루쇼프(Nikita Sergeevich Khrushchyov, 1894 ~ 1971)에 의한 스탈린 비판과 이를 지켜본 마오쩌둥의 불안감에서 시작된다.

 

 마오쩌둥의 집중적인 집산화 프로그램은 1956년 거대한 역화에 직면했다. 제20차 소련 공산당 대회의 마지막 날인 2월 25일,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 정권하에서 재판도 없이 행해진 무자비한 숙청과 대규모 추방, 처형을 비판했다... 몇 개월 뒤 총리인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일단의 인물들이 국영 농장을 비판한 흐루쇼프를 인용하며 집산화 속도를 견제하고 나섰다. 바야흐로 마오쩌둥이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듯 보였다.(p39)  <문화대혁명> 中


 권력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마오쩌둥은 자신을 향한 비판의 칼날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생겼다. 특히, 그에게는 대약진 운동의 실패라는 아픈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관심 전환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였다. 그리고, 그는 젊은이들과 문화, 예술부문에 대해 주목하게 되었다.


 더 이상 대기근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마오쩌둥이 취한 첫 번째 행보는 기근의 책임을 계급의 적에게 돌리는 것이었다.(p53)... 대약진 운동 이후로 힘을 얻어 온 반동적인 이데올로기에 대응하려면 탄압만으로 부족했다. 마오 주석은 혁명의 계승자인 젊은이들을 교육하는데 특히 관심을 기울였다.(p79)  <문화대혁명> 中


 중앙 문화 혁명 소조에는 장칭과 캉성, 야오원위안과 장춘차오를 비롯한 주석의 몇몇 심복들이 포함되었다. 세력 균형이 바뀔 때마다 그 구성원은 달라지겠지만 문화 대혁명이 지속되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중앙 문화 혁명 소조는 계속해서 태풍의 눈으로 남을 터였다... 국제 어린이날이기도 한 6월 1일에 중앙 문화 혁명 소조가 첫 번째 폭탄을 투하했다.(p114)... 노동자를 속이고 기만하고 멍청하게 만들려는 부르주아의 대변자들을 척결하라는 외침과 함께 문화 대혁명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p115) <문화대혁명> 中


 그렇지만, 마오쩌둥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직접 몸을 일으켜 움직이는 대신 측근들과 인민을 이용한다. 먼저, 자신의 측근들에게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면서 공작대를 만들어 냈다. 공작대에 의해 일련의 사람들이 반동, 반프롤레타리아로 몰리게 되자, 이번에는 마오쩌둥은 반대편에 서면서 공작대 해산을 지시하게 된다. 마오쩌둥에 의해 혐의를 벗게 된 이들은 마오쩌둥의 열렬한 추종자로 변신하게 되는데, 이들이 후에 홍위병의 중추가 된다. 마치 <삼국지 三國志>에서 조조(曹操, AD 155 ~ 220)에게 황건적을 토벌하면서 얻게 된 30만 청주병(靑州兵)이 하북(河北) 제패의 기반이 된 것처럼, 이들 홍위병들은 문화대혁명 기간 중 마오쩌둥에게 큰 힘이 되었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당이 늘 하던 대로 나아가기로 했다. 요컨대 공작대를 파견해서 문화 대혁명을 이끌게 한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주석의 동의가 필요했고 그래서 항저우로 날아갔다. 주석은 계속 애매한 태도를 보이면서 명확한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주석은 편안히 앉아서 중국이 혼돈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지켜볼 참이었다. (p120) <문화대혁명> 中


 당에 반대하는 중등학교나 대학교의 시위를 그대로 묵인할 경우 반혁명 세력이 미쳐 날뛰도록 방치한다고 마오쩌둥이 자신을 책망할 수 있었다. 반대로 가장 노골적인 비평가들에게 재갈을 물릴 경우에도 이번에는 주석이 태도를 바꾸어서 '대중을 억압한다'라고 비난할 수 있었다.(p133) <문화대혁명> 中


 주석은 공작대를 해체하라고 요구했다. 공작대는 사과 성명을 내고 해산했다. 반역자로 몰렸던 학생들은 혐의를 벗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마오쩌둥을 그들의 해방자로 여겼다. 1966년 7월 29일 인민대회당에서 공식 발표가 이루어졌다. 이제 그곳에는 중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참가한 1만여 명의 학생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p131)... 여름 동안 '우경 세력'과 '반동분자'로 고발되었던 사람들이 이제 주석을 중심으로 뭉쳤다. 공작대의 손에 명예가 훼손되고 감금을 당했던 사람들은 한때의 가해자들을 향해 복수에 나섰다.(p135) <문화대혁명> 中


  복수심에 불타는 홍위병은 과거로부터 이어온 모든 것을 인습(因習)으로 규정하고,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문화 대혁명의 수많은 파괴가 이때 발생하게 되었다.  짧은 기간 이루어진 파괴였지만, 문화 혁명이 끼친 영향은 컸다. 오랜 역사 전통과 단절된 중국이 죽(竹)의 장막을 걷고 세계와 교류하기 위해서는 수십 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사진] 문화 대혁명(출처 : 한계레)


  홍위병이 진정한 조직으로 행동에 나선 것은 구(舊) 사회의 유물을 파괴하려는 운동을 통해서였다. 8월 18일에 마오 주석과 나란히 연단에 모습을 드러낸 린뱌오는 학생들에게 '착취 계급의 모든 낡은 사고와 낡은 문화, 낡은 전통, 낡은 관습'을 타파하며 앞으로 나아가라고 촉구했다... 전통이란 산 사람에게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과거의 죽은 손이었고 완전히 박살 내야 할 어떤 것이었다.(p150) <문화대혁명> 中


 낡은 세상을 파괴하려는 폭력 사태는 이삼 주 남짓하게 지속되었지만 그 파장은 오래갔다...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검소한 옷차림을 선호했으며 파란색이나 회색 면으로 된 군복과 검은색 헝겊신을 주로 선택했다.(p169)... 예술과 공예, 산업 부문이 완전히 전멸했다... 문화 대혁명은 산업 분야 곳곳에서 파장을 일으켰다. 장난감이나 원단, 화장품, 가정용품부터 도자기까지 모든 제품은 상표와 포장, 내용에서 봉건적인 과거의 흔적을 지울 필요가 있었다.(p170) <문화대혁명> 中


 <문화대혁명>에서는 홍위병에 의한 파괴 이후에도 문화 대혁명 시기의 여러 사건들이 서술되어 있다. 홍위병의 세력이 위축된 이후 군대의 등장과 소련과의 국경 분쟁, 대오 정화 운동, 상산하향 운동을 통해 문화대혁명이 중국 전체로 퍼져나간 과정과 사회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외국과의 분쟁이 <문화 대혁명>에서 펼쳐진다.


  이처럼 <문화 대혁명>에서 저자는 문화 대혁명 전후 상황에 대해 독자에게 알려 준다. 저자인 프랑크 디쾨터는 흐루쇼프의 수정주의 등장으로 스탈린주의자였던 마오저뚱이 느꼈을 불안감과 국면 전환의 필요성, 마오저뚱의 모호한 태도, 인민들의 복수가 한데 얽혀져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문화 대혁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3부작의 다른 저작과 마찬가지로 문화 대혁명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비판적임을 책 전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인민 3부작은 문화 대혁명이 중국에 미친 영향을 마지막으로 마무리된다.

  

 문화 대혁명 말기에 농촌에서 널리 퍼졌던 은밀한 관행들이 이제는 완전히 활성화되었고 농민들은 가족농으로 회귀하거나, 환금 작물을 재배하거나, 개인 소유의 상점을 운영하거나,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도시로 향했다. 결과적으로 농촌의 탈집산화는 보다 많은 농촌 인력을 해방시켰고 향진 기업 붐을 촉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p492) <문화대혁명> 中


 현재 중국에서 농촌을 떠나 도시에서 일하는 하급 이주 노동자인 농민공(農民工) 문제가 큰 사회 불안 요인 중 하나이지만, 이들 농민공의 저렴한 노동력 제공이 현대 중국 성장 밑거름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최근 중국 경제 성장 역시 문화 대혁명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게 된다. 그런 면에서 개인적으로 많은 부정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문화 대혁명을 절대적으로 실패한 정책으로 볼 것인가하는 의문점을 던지게 된다. (긍정적인 면도 약간 있다는 뜻이지, 문화 대혁명 전체를 미화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 농민공 실직자 문제(출처 : 아시아 투데이)


 이제 프랑크 디쾨터의 인민 3부작을 마무리 하자. 

 

1부인 <해방의 비극 1945 ~ 1957>에서는 마오쩌둥이 중국 대륙을 석권한 후 국민당 정부의 잔재를 지우기 위한 숙청이 주로 다뤄진다. 2부인 <마오의 대기근 1958 ~ 1962>에서는  빠른 시간 내 자본주의 국가를 따라잡기 위한 대약진 운동과 이의 실패가 그려지며, 마지막 3부에서는 <문화 대혁명 1962 ~ 1976>에서는 대약진 운동의 실패 원인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일어난 내전(內戰)인 문화 대혁명과 마오쩌둥의 사망을 서술한다. 


 인민 3부작의 특징은 개별 사건의 상세한 제시가 될 것이다. 비교적 최근 공개된 사례를 시기별로 서술하는 방식으로 책이 진행되기 때문에 독자들은 보다 생생한 체험을 경험하게 된다. 인민 3부작에서 다루는 사례를 대부분이 비참하다. 이 때문에 책을 읽다 보면, '인간이 무엇이며, 이념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절로 던지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다른 곳에 있다고 여겨진다. 


 오히려 책이 끝난 지점으로부터 우리는 다시 되짚을 필요가 있다. 인민 3부작에서는 1989년 천안문 사태를 마지막으로 끝나지만, 이후 오늘날 미국과 G2를 이루는 강대국으로 서는 시간까지 연결고리를 우리는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책의 행간 속에서 연결고리를 발견할 수 있다. 


 피비린내 나는 숙청과 무모한 정책 수행 과정에서 많은 희생이 발생하지만, 그 속에서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이들은 정치가들이다. 정작 비참한 현실에 직면한 인민들은 오히려 이러한 현실에 담담히 대응하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우리는 역사의 기록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오쩌둥의 죽음 소식을 들은 한 사람의 인터뷰 내용 속에서 우리는 묵묵하게 시대를 살아가는 인민의 모습을 찾게 된다.


 사람들은 사적인 자리에서 그다지 회한을 드러내지 않았다. 윈난 성의 성도 쿤밍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가게마다 술이 매진되었다. 한 젊은 여성은 자신의 아버지가 가장 절친한 친구를 초대한 다음 문을 걸어 잠그고 집에 있던 유일한 포도주를 개봉했다고 회상했다. 다음 날이 되자 그들은 공공 추도식에 참여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너무나 슬프게 통곡했다. (아직 어렸던 나는 어른들의 표정 변화에 어리둥절했다. 전날 밤 그렇게 행복해했던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너무나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p483) <문화 대혁명> 中 


 우리는 인민 3부작을 통해 1945년 ~ 1976년의 비참한 시대를 살았던 중국 민중들의 고통을 확인하게 된다. 동시에 어려웠던 이념과 배고픔의 시기를 살아낸 이들의 축적된 힘이 오늘날 중국을 만들었음도 함께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프랑크 디쾨터의 <인민 3부작>은 중국 현대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보여주면서도, 인간의 삶 또한 잘 묘사하기 때문에 일독(一讀)할 가치가 있는 책이라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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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6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6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7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7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mGiKim 2018-08-11 1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안읽어 봤지만, 너무 부정적으로만 서술했습니다. 이 책 빠는 수꿜이 있는거 보고 좀 읽기 싫어졌던 기억이.ㅋ 마오와 현대 중국을 알기 위해선 이 책보단 마오쩌둥 평전이 나았던 것 같네요.

겨울호랑이 2018-08-11 20:02   좋아요 2 | URL
말씀하신대로 저자가 중국공산당 통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에 거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서 보다 객관적인 판단을 위해서는 이와 관련한 다른 관점의 책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문화혁명 역시 장점과 단점이 공존하겠지요. 다만, 누구에게 장점이었는지, 그 주체는 누구인지에 대한 독자의 기준은 스스로 세워야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NamGiKim 2018-08-11 20:06   좋아요 1 | URL
저 또한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을 비판하는 쪽입니다. 네 여러 책을 보며 해석해야 한다는 호랑이님의 주장에는 동의합니다. 전 개인적으론 이 책 1권의 제목부터 좀 맘에 안들었습니다. ㅎㅎ 많은 사람들에게 읽더라도 좀 비판적으로 읽으라고 권해주고 싶은 책이에요.ㅎ

겨울호랑이 2018-08-11 20:11   좋아요 1 | URL
인민 3부작의 전체 구성이 저자의 역사 해석과 이를 뒷받침하는 예시로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보다 실감나게 읽히긴 합니다만, 극단적인 사례를 제한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부분 또한 확인하게 됩니다.^^:)

징가 2018-08-27 1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는 역사가의 세계관을 반영할수밖에 없다는 E.H.Carr 의 견해를 전제로 읽는다면 별 문제없다고 봅니다 다만 에드가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 같은 책도 같이 읽어본다면 중국의 근현대사를 보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볼수 있지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겨울호랑이 2018-08-27 12:04   좋아요 0 | URL
네 민정식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사람마다 자신만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고, 모든 일에는 빛과 어둠의 양 측면이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절대적인 ‘역사적 의미‘란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과제겠지요. 민정식님께서 추천해 주신 <중국의 붉은 별>은 제목만 들어봤고,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네요. 다만, 에드가 스노가 <아리랑>의 저자 님 웨일스의 남편이라는 사실은 겨우 알고 있었습니다. 마오쩌둥을 가까이서 지켜본 이의 관점은 또 다르겠지요. 말씀을 들은 김에 챙겨놓아야겠습니다. 민정식님 좋은 책 추천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