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라이는 학문 자체는 경멸하고 학문에 조예가 깊은 이를 책 냄새에 취한 자라 불렀다. 이들에게는 많은 특권이 주어졌다(p583)... 그들은 엄격하고 영예로운 규범인 "무사도(武士道)"에 순응했다. 그 핵심 이론은 미덕을 명확하게 한 것으로써 "도리에 따라 주저함 없이 행동을 결행하는 힘이며, 죽어야 할 때 싸워야 할 때 싸우는 것이다.(p584) <문명이야기 1-2 : 동양문명> 中
미국 역사학자 윌 듀런트(Will Durant, 1885 ~ 1981)는 <문명 이야기 The story of Civilization>을 통해 일본의 사무라이에 대해 위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일본 사무라이들은 센고쿠 시대(戰國時代, 15C 중반 ~ 16 C 후반)에 전성기를 맞이하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 ~ 1616) 의 에도 막부(江戶 幕府)가 열린 이후 몰락의 시기를 걷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이 유명한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 1584 ? ~ 1645)다. 생전 60여명의 무사들과 대결하면서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그는 생전 <오륜서 五輪書>를 남기게 된다. 유명한 이 무사를 소재로 한 소설과 만화가 있는데, <슬램덩크 Slam Dunk>의 저자 이노우에 다케히코(井上雄彦)가 그린 <배가본드 Vagabond>는 그러한 작품 중 하나다.
16세기 말부터 일본의 사무라이 계급의 몰락이 시작되었다면, 같은 시기 반대편 서양에서는 이미 기사(騎士)계급은 거의 사라지고,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 Age of Discovery, Age of Exploration)가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돈키호테 Don Quijote de La Mancha>는 이 새로운 시대를 살면서, 과거 기사 시대를 그리워한 낭만주의자인 어느 시골 귀족의 모험을 다룬 소설이다.
정말이지 그는 이제 분별력을 완전히 잃어버려, 세상 어느 미치광이도 하지 못했던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명예를 드높이고 아울러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일로, 편력 기사가 되어 무장한 채 말을 타고 모험을 찾아 온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읽은 편력 기사들이 행한 그 모든 것들을 스스로 실천해 보자는 것이었다.(p69) <돈키호테 1> 中
<돈키호테 1>, <돈키호테 2> 두 권의 책 속에서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흥미진진하지만 어이없는 모험을 이어나간다. 이러한 처참한 모험의 실패를 잘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가 유명한 풍차와의 싸움일 것이다. 영어 숙어 "to tilt at windmills" 가상의 적과 싸우다( to fight imaginary enemies)의 유래가 되기도 한 아래의 이야기는 험난한 모험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그림] Tilting at windmills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Tilting_at_windmills)
그는 둘시네아에게 이런 위기에 처한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온 마음을 다해 빌었다. 그는 장패로 몸을 가리고 옆구리에 창을 낀 채 전속력으로 로시난테를 몰아 맨 앞에 있는 풍차로 돌진하여 날개에 창을 꽂긴 했으나, 바람이 세차게 불어 날개가 돌아가자 그 창은 박살이 나고 사람과 말도 함께 딸려 가다가 들판으로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졌다. 산초 판사가 그를 구하려고 당나귀를 몰아 달려가 보니 주인은 꼼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였다.(p125) <돈키호테 1> 中
<돈키호테 1>과 <돈키호테 2> 모두 돈키호테와 산초의 어이없는 모험이야기로 가득하지만, 1권과 2권은 이들을 바라보는 주변 인물들의 시선은 차이가 있다. <돈키호테 1> 에서 기사 서품을 부탁받은 객줏집 주인에게 돈키호테는 쫓아내야할 미치광이에 불과했다.
객줏집 주인이 마부들을 향해, 이미 말했듯이 저자는 미치광이로 사람들을 모두 죽인다 하더라도 아무런 죄가 되지 않으니 그냥 내버려 두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객줏집 주인은 이 손님의 장난이 예사가 아니라는 생각에 다른 불행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어서 빨리 재수 없는 그놈의 기사 서품식을 치러 주어 일을 매듭지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p87) <돈키호테 1> 中
그렇지만, <돈키호테 2>에서는 돈키호테와 산초는 출판된 책의 주인공으로, 이미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마치 리얼버라이어티 쇼의 주인공과 같이 널리 알려진 그들은 더 이상 위험한 미치광이가 아니라 환영받는 연예인이었다.
"어젯밤에 바르톨로메 카라스코의 아들이 살라망카에서 공부해서 학사가 되어 돌아왔기에 제가 인사를 하러 갔었습니다요. 그런데 그 사람 말이 나리에 대한 이야기가 <기발한 이달고 돈키호테 데 라만차>라는 이름으로 이미 책이 되어 나돌고 있다는 겁니다요. 그리고 저에 관해서도 산초 판사라는 바로 제 본명으로 그 책에서 이야기 되고 있으며, 둘시네아 델 토보소 님에 대한 것이며 우리 둘만이 보냈던 다른 일들까지 몽땅 온다고했습니다요."(p82) <돈키호테 2> 中
"말해 줘요, 종자 양반, 당신의 주인이라는 분이 지금 <기발한 이달고 돈키호테 데 라만차>라는 이야기로 출판되어 나돌고 있는 주인공, 둘시네아 델 토보소라는 분을 자기 마음의 주인으로 두신 그분이 아닌가요?... 나는 그 이야기 전부를 아주 좋아해요. 판사 양반, 가서 주인께 말씀드려요. 내 영지에 잘 오셨고 정말 환영한다고 말이에요. 이보다 더 나를 즐겁게 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도 전해 주세요."(p380) <돈키호테 2> 中
이제는 가는 곳마다 자신을 알아보고 환영받는 존재가 되었지만, 돈키호테는 기사도(騎士道, chivalry)를 살릴 수 없었기에 끊임없이 방랑을 하다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돈키호테 1>, <돈키호테 2>는 돈키호테와 산초의 모험을 다룬 연작 소설이지만, 주인공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은 이와 같이 크게 다르다. 가는 곳마다 배척당해서 좌절했던 것이 1권의 돈키호테였다면, 주변으로부터 환영받는 존재가 2권의 돈키호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권의 돈키호테 역시 안쓰럽게 느껴지는 것은 그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그를 이해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광인을 제정신으로 돌리고자 모든 사람들에게 모욕을 가하다니 말이오. 돈키호테가 제정신으로 줄 수 있는 이득이 그가 미친 짓을 함으로써 주는 즐거움에 미칠 수 없다는 것을 당신을 모르시오?... 매정한 말 같지만, 난 돈키호테의 병이 절대로 고쳐지지 말았으면 하오. 그가 낫게 되면 그로 인한 재미를 잃을 뿐만 아니라 그의 종자 산초 판사의 재미까지 잃고 말 것이기 때문이오."(p807) <돈키호테 2> 中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과거의 로망을 꿈꾸는 어느 낭만주의자의 꿈이 현실의 높은 벽에 가로막혀 무너지는 것을 보면, <돈키호테>가 유쾌한 모험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마냥 웃을 수 만은 없는 것은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이라 여겨진다. 거의 같은 시기 동양의 무사도와 서양의 기사도의 몰락이라는 상황에서, <돈키호테> 속에서 낭만주의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돈키호테가 추구했던 꿈(기사도)를 마지막으로 길었던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페르시아와 시리아, 그리고 스페인 사라센인들의 영향을 받은 게르만식 군사 활동의 오랜 관습과, 헌신과 성례라는 그리스도교적 사상에서 비롯되어 불완전하지만 풍성한 기사도의 열매가 피어났다.(p1062)... 이론상 기사들은 영웅이자 신사이고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받았다. 야만적인 기질을 길들이기 위해 애쓰던 교회는 기사 제도를 종교적 형식과 서약으로 에워쌌다.(p1065)... 기사는 항상 진실을 말할 것과 교회를 방어할 것, 가난한 이들을 보호할 것, 자신의 지역을 평화로이 유지할 것, 그리고 이단들을 쫓을 것 등을 맹세했다. 모든 여자의 수호자가 되어 그녀들의 순결을 구해 주어야 했고, 모든 기사들의 형제가 되어 서로 돕고 예를 차려야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기사도 이론이었다.(p1066) <문명이야기 4-1 : 신앙의 시대>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