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공공의 참여를 제공하는 개인적인 고백의 형태이다. 신문은 사건을 이용해서, 또는 전혀 이용하지 않고도 사건들을 채색할 수 있다. 그러나 신문에 복잡한 <인간적 흥미 위주의 기사>적인 성격이 나타나는 것은 매일 다양한 기사들이 배열되어 대중 앞에 제공되기 때문이다.(p288) <미디어의 이해> 中


 마셜 맥루언(Marshall McLuhan, 1911 ~ 1980)은 <미디어의 이해 Understanding Media>를 통해서 신문(新問)이 공공의 참여를 제공하는 개인적 고백의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신문은 최근 경쟁 매체들의 등장과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해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밀려나고 있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움베트르 에코(Umberto Eco, 1932 ~ 2016)는 그의 저서 <신문이 살아남는 방법>을 통해 신문의 생존법을 제시한다.


 서구와 같은 문화 내에서는, 작용 면에서나 실제적인 면에서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는 주장이 종종 충격으로 여겨진다. (p35) <미디어의 이해> 中


 에코에 따르면 이미 1960년대부터 신문의 기능은 뉴스의 제공이 아니라, 다른 권력 기관과 결탁을 위한 메세지 제공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역할은 1990년대까지도 이어지지만, 이전과 차이가 있다면, 이제 주도권은 '텔레비전(television)'으로 넘어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있었던 신문의 기능과 성격에 관한 논쟁은 두 개의 테마를 둘러싸고 전개되었습니다. (1) 뉴스와 논평 사이의 차이, 그러니까 객관성에 대한 관심의 환기, 그리고 (2) 신문은 정당이나 경제적 집단들에 의해 운영되는 권력의 도구라는 것이었지요. 정당이나 경제적 집단들은 의도적으로 비밀스러운 언어를 사용하는데, 그들의 진짜 기능은 시민들에게 뉴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의 머리 위를 지나 다른 권력 집단에 암호화된 메세지를 보내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지요.(p15) <신문이 살아남는 방법> 中


 예전에는 신문들이 맨 처음 뉴스를 전했는데 나중에 다른 매체들이 개입하여 문제를 심화시켰다는 것, 신문은 <편지가 뒤따름>이라는 말로 끝나는 전보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1962년에는 이미 전송(電送) 뉴스가 저녁 8시에 텔레비전 신문에 의해 전달되고 있었습니다.(p21)...풍자, 격렬한 논쟁, 특종의 제작은 이제 텔레비전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p23) <신문이 살아남는 방법> 中


 그렇다면, 신문과 텔레비전은 미디어로서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를 잠시 살펴보자. 맥루언에 따르면 신문과 텔레비전 모두 '모자이크 적 형태'로 참여를 요청하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다만, 텔레비전이 보다 시각적인 정보를 제공하여 눈 앞의 현실에 집중하도록 만든다는 점이 두 매체의 차이가 된다. 최근 인터넷이 보다 보편화되어 실시간 동영상 서비스 (streaming service)와 시청자의 댓글 참여는 정보 제공과 참여의 주기를 더욱 짧게 만들고 있다.


 신문이란 애초부터 책의 형태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모자이크 적 형태, 즉 참여를 요하는 형태를 지향해 왔다는 사실을 다시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인쇄와 취재의 가속으로 인해 이러한 모자이크적 형태는 인간 공동 사회의 지배적 양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모자이크적 형태란 <분리된 견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의 참여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p297) <미디어의 이해> 中


 텔레비전 시대 10년을 경험한 젊은이들이 깊은 관여를 향한 충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보통의 문화가 지닌 먼 앞날의 시각화된 목표는 그 충동 때문에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자신들과는 관계 없는 것처럼, 더 나아가 무기력하고 활기 없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p464)... 텔레비전 어린이는 앞을 내다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참여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또 학습에서든 인생에서든 간에 단편적이고 단순히 시각화되어 있기만 한 목표나 운명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p465) <미디어의 이해> 中


  텔레비전은 보다 효과적으로 미디어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기에 신문은 텔레비전의 보조 수단으로 위치가 격하(格下)되었다. 그리고, 에코는 신문들이 보다 지역화(localization)하거나, 보다 객관화된 정보의 제공자로서 자리매김하는 것 이상의 두 가지 대안을 신문이 살아남는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신문은 이제는 이미 텔레비전의 시녀입니다. 소위 말하듯이 신문의 일정표를 확정하는 것은 바로 텔레비전입니다.(p31)... 신문이 텔레비전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하여 앞장서서 텔레비전을 특권적인 정치 공간으로 설정하였고, 자신의 자연스러운 경쟁자를 지나칠 정도로 선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문은 과도할 절도로 공연을 정치화하였습니다.(p35) <신문이 살아남는 방법> 中


 이러한 모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신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첫 번째 길은 <피지 Fiji 방식의 길>입니다. 지극히 초라한 신문들은 단지 통신사의 메시지들에 의존하면서도 그 전날의 가장 중요한 뉴스들을 단 몇 줄로 제공해 주었습니다. 피지 방식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물론 신문의 경우 판매 부수의 엄청난 격감을 암시합니다.(p50)... 또 다른 길은 제가 <확산된 관심>이라 정의한 길일 것입니다. 즉 일간 신문이 버라이어티 주간지가 되기를 거부하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뉴스들의 엄격하고도 신빙성 있는 원천이 되는 것이지요.(p51) <신문이 살아남는 방법> 中


  에코는 <신문이 살아남는 방법> 속에서 엄격하고 신빙성 있는 정보 제공자로서의 신문이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신문이 선택한 길을 이와는 달라 보인다. 


 신문이 <주간지화>되었습니다. 일간지는 점점 더 주간지와 비슷하게 되었고, 버라이어티, 풍습, 정치 생활과 관련된 소문들에 대한 논의, 공연 예술계에 대한 관심에 방대한 지면을 할애하였습니다.(p24)... 일간지들은 주간지화 하기 위해 페이지 수를 늘이고, 페이지 수를 늘리기 위해 광고를 확보하려고 싸우고, 더 많은 광고를 싣기 위해 페이지 수를 더욱 늘리고 부록들을 고안해 내고... 때로는 뉴스가 아닌 것을 뉴스로 만들기도 합니다.(p27) <신문이 살아남는 방법> 中


 생존을 위한 신문들의 노력은 광고주의 입맛에 맞는 기사의 생산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고, 이는 결국 언론이 대기업의 대변자 역할을 수행할 뿐이라는 일반의 인식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사진] 4대 재벌의 언론사 광고 지배력(출처 : JTBC)


 사회 내에서 자동화가 지배적일수록, <정보>가 중요한 상품이라는 점과 형태를 갖춘 상품은 정보 이동에 뒤따르는 것일 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광고주는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전에서 시간과 공간을 산다. 광고주들은 독자나 청취자나 시청자의 일부를 사는 것이다. 그들은 그 방법만 안다면 기꺼이 독자, 청취자, 시청자에게 시간과 주의를 기울여준 대가를 직접 지불할 것이다.(p292)... 광고란(그리고 주식 시세란)은 신문의 기초를 지탱하고 있다.(p293) <미디어의 이해> 中


  또한, 뉴스의 반복-확대 재생산의 고리 속에서 확인되지 않는 거짓 뉴스가 전염병처럼 번지는 현실 속에서 점점 신문의 신뢰성은 땅에 떨어지고 있는 것이 현재 신문으로 대표되는 언론이 처한 위기의 단면이다.


[사진] 세월호 오보 사례(출처 : MBC) 

 

 신문이 뉴스를 제공하는 방식에 대해 비평적으로 말하는 것과, 이미 공개된 뉴스를 마치 새로운 뉴스처럼 사용하는 것 사이의 이러한 차이는 이제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저널리즘의 질병처럼 보인다. 어느 권위있는 사람이 나에게 대답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문들이 더 잘 팔린다고(그리고 분명 비용은 더 적게 들 것이다.) (p58) <민주주의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해치는가?> 中


 20년 전 1월 14일의 신문이 가장 최근의 1월 14일 자 신문과 동일한 뉴스를 반복하고 있다면 그것은 신문사의 잘못일까? 분명히 아니다. 그들은 당시 일어난 것을 기록했으며, 동시에 현재 이탈리아에서 일어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다만 이 나라에서는 20년 전부터 많은 것이 바뀐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언제나 똑같은 시나리오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p70) <민주주의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해치는가?> 中


 에코가 20년 전에 지적한 이탈리아 신문과 언론의 문제점이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기에, 그가 말한 신문의 생존 방법이 더 깊이 와닿는다. 


 일단 법이 성문화되면 힘없는 자나 부자나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된다네. 그러면 부유한 시민이 나쁜 짓을 할 경우 힘없는 자가 비판을 할 수 있으며, 약자도 옳으면 강자를 이길 수 있다네. 자유란 이런 것일세. "누가 도시에 유익한 안건을 갖고 있어 공론(公論)에 부치기를 원하십니까?" 원하는 자는 이름을 날리고, 원치 않는 자는 침묵하면 된다네. 도시에 이보다 더 한 평등이 어디 있겠는가? (433 ~ 441)  <탄원하는 여인들 > 中


 에우리피데스(Euripides, BC 485 ~ BC 406)는 <탄원하는 여인들 Hekabe> 속에서 테세우스(Theseus)의 말을 빌려 민주정의 자유와 평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신문과 언론이 처음으로 돌아가, 뉴스들의 엄격하고도 신빙성있는 원천이 되어, 민주주의의 자유와 평등에 기여했을 때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며 페이퍼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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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9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19 15: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4-19 14: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문은 텔레비전의 시녀’라는 에코의 시각이 낡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TV와 언론은 SNS의 시동(侍童)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시녀’라는 표현도 마음에 안 듭니다. 일부 기자들은 SNS에 공유되는 게시물을 허락 없이 가져오고, SNS 게시물의 진위 여부를 살피지 않고 기사에 올립니다. 기자라는 명함이 부끄러울 정도로 유치한 아이들 수준으로 글을 쓰고 있는 거죠.

겨울호랑이 2018-04-19 15:11   좋아요 0 | URL
cyrus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동시에, 에코가 이 글을 쓴 시점이 아직 인터넷이 보편화되기 전인 1990년대 중반이라는 점을 감안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2018-04-19 15: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19 15: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4-20 1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문의 쇠퇴는 우리가 정보를 운용하는 방식의 변화와도 관계 있어요. 인터넷 등의 발달로 우리는 더 빠르고 더 많은 정보를 습득하는 방식을 알게 되었고, 지금처럼 신문이 광고주나 그들 사익 추구로 변질되면서 더 찬밥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죠. 정보의 질도 떨어지는데 경쟁력이 있을 수가 없죠^^;;

겨울호랑이 2018-04-20 11:44   좋아요 1 | URL
^^:) 그렇겠지요. 아마 정보 저장 매체로서 tape나 LP가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라 여겨집니다. 최근 LP가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다시 사랑받는 것처럼 신문만이 제공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줄 수 있어야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