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채호를 코페르니쿠스에 비유하는 것이 매우 적절하다고 믿는다. 코페르니쿠스가 남달랐던 것은 관점의 전환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이 관점의 전환 외에 다른 것들을 거의 알지 못했으며 그 나머지는 케플러와 갈릴레오와 뉴턴이 채워넣을 때까지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그럼에도 코페르니쿠스는 진정으로 위대했다. 왜냐하면 프톨레마이오스 이후 자그만치 1500년 동안 신의 법칙으로 통용되던 도그마를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신채호도 마찬가지다. 그는 최소한 중국 당나라 시대 이후 1000년 동안 동북아시아 주류 사학계 철칙으로 통용되던 사관을 한순간에 뒤집었다.(p107)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 中


  김상태의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은 고조선사(古朝鮮史)를 중심으로 강단사학, 진보사학, 재야사학계가 일본의 식민사관(植民史觀)과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을 벗어나지 못한 현실을 비판한 책이다. 글에 담긴 진보적인 저자의 입장과는 달리 고조선사에서는 진보사학자들 또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들 대신 저자는 신채호(申采浩, 1880 ~ 1936) - 윤내현(尹乃鉉, 1939 ~ )이 강조한 고조선론을 재조명한다. 코페르니쿠스 - 갈릴레오로 비유될 수 있는 이들 책에서는 강단 사학계의 '소(小)고조선론'과 재야사학계의 <환단고기 桓檀古記>로 대표되는 '대동이 大東夷'론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다. 저자는 대고조선론을 고대사의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렇다면, 소고조선론과 대동이론의 문제점과 위험성은 무엇일까.


 "서기전 3세기 전후 연나라 장군 진개의 침공 이후 고조선은 무조건 평양 지역에 있었다." "고조선은 서기전 108년 평양 지역에서 망했으며 그 자리에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특히 낙랑군은 서기 후 300년까지 남아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북부를 400년간 지배했다. 이것이야말로 주류 고대사학계와 그들의 소고조선론이 지키고자 하는 핵심중의 핵심이다.(p167)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 中


 소고선론을 요약하자면, '소고선론-평양중심설'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무엇일까. 저자는 일본의 식민사관을 비판없이 수용한 남한의 고대사 연구 행태를 비판하는데, 이는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는 식민사관의 타율성론을 학계가 스스로 입증한 꼴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병도의 '소고선론-평양중심설'은 해방 이후 40년이 넘도록 주류 고대사학계의 확고부동한 통설이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고조선 이론을 받아들인 이병도의 학설을 모시는 것 말고 남한 주류 고대사학계가 해방 이후 40년이 지난 1980년대 말까지 고조선 연구에 관련해서는 한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문헌 연구든 고고학 연구든 마찬가지다.(p181)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 中


다른 한편으로, 저자는 중국 역사속에  등장한 '동이'의 개념 사용에 유의할 것을 당부한다.  <환단고기>, <이하동서설> 등의 책은  '동이- 화하(華夏)'의 패권다툼관점에서 동북아시아 역사를 바라본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문제점은 무엇일까. 몽골족, 만주족, 일본 민족 등과 우리가 같은 민족이라는 내용까지 포함하는 이러한 주장은 오히려 우리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전락할 위험을 담고있다.


 동이족 東夷族은 중국 문헌에 여러 형태로 등장하기 때문에 신중하게 연구해야 할 대상이지만 다른 한편 무분별하게 남용되어 국수주의 환빠들의 개념으로 전락하기도 한다.'동이족 = 중국과 만주의 전대륙에서 활동했던 민족 = 우리 한민족'이란 등식 아래서 "중국 대륙도 본래는 동이족이 장악했던 대륙이자 사실상 우리 한민족의 땅"이라는 공식을 굳혀버린 것이다. 엄격한 역사적 논증 없이 남용된 이런 식의 판타지는 문제가 크다.(p241)... 이형구는 이 상 商(은 殷)나라가 동이족의 일파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동이족 또한 누가 뭐래도 현 중국 민족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이형구를 따르는 한 여기에도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혹시 상(은)나라와 같은 동이족이라는 우리 민족도 중국 민족의 일부가 되는 거 아닌가?(p243)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 中


 이에 대해 윤내현은 민족의 정의를 혈연이 아닌 문화(文化)를 통해 내림으로써 이들의 주장에 선을 긋는다. 에르네스트 르낭 (Ernest Renan, 1823 ~ 1892)의 <민족이란 무엇인가? Qu'est-ce qu'une nation? >의 민족 정의와 통하는 바가 있는 윤내현의 개념 정의는 맹목적 민족주의로 흐를 수 있는 위험을 차단시킨다.


 윤내현은 종족이나 혈연적 동일성을 민족의 핵심요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민족이란 우연과 필연의 역사과정 속에서 언어, 문화, 경제 등의 종합이 긴 시간동안 누적되어 '형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윤내현은 아직 의미도 분명하지 않은 동이족 개념을 중시하지 않는다.(p242)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 中


  하나의 민족은 하나의 영혼이며 정신적인 원리입니다. 한쪽은 과거에 있는 것이며, 다른 한쪽은 현재에 있는 것입니다. 한쪽은 풍요로운 추억을 가진 유산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거싱며, 다른 한쪽은 현재의 묵시적인 동의, 함께 살려는 욕구, 각자가 받은 유산을 계속해서 발전시키고자 하는 의지입니다.(p80)...  인간은 인종의 노예도, 언어의 노예도, 종교의 노예도, 강물의 흐름의 노예도 산맥의 방향의 노예도 아닙니다. 인간들의 대결집, 건전한 정신과 뜨거운 심장이야말로 민족이라 부르는 도덕적 양심을 창출합니다.(p83)  <민족이란 무엇인가> 中


 이런 점에서 저자는 윤내현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다. 때마침, <고조선 연구(상)> <고조선 연구(하)>는 다 읽었고, 다른 2권의 책도 최근 갖추었으니 윤내현 교수의 3부작을 이제는 읽고 정리할 일이 남았다... 여기에 더해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1893 ~ 1950)의 <조선사연구>를 읽고,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조선상고문화사>를 올해안에 재독할 수 있을까... 


 윤내현은 대고조선의 필연성을 거대하고 완변한 한문체계로 완성했다. 불세출의 거인 신채호의 수원 水原으로부터 시작하여 폭포처럼 격렬한 리지린의 계곡을 지나 윤내현은 대고조선의 평온하고도 광할한 호수를 이루었다. 이것은 그의 대표 3부작 <한국고대사신론> <고조선 연구> <한국열국사연구>로 귀결된다.(p334)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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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시대의 논리 창비신서 4
리영희 지음 / 창비 / 199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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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전환의 시대는 언제일까. 저자는 전환의 시기를 1961 - 1966년으로 지정(p338)하는데, 이 시대는 유엔에서의 미국 지배력이 상실되고 다수의 중립국들이 힘을 얻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1970년대 초반 씌여진 이 책은 베트남 전쟁, 중공(현 중국)의 부상, 경제대국 일본의 정치대국 야심을 배경으로 하기에 여러 상황에서 현재의 정세와는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책 안에서 변함없는 논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언어 言語'다.


 '절대로 잘못 해석될 수 없으리라고 그들이 진지하게 믿었던 용어'로 분명히 씌어진 헌법조항을 견강부회하려는 세력에 의해서 국가의 비극이 초래된 사례들을 생각할 때 '용어 그대로 생각하자'는 헌법해석의 태도가 국가권력과 언론의 관계를 규정하는 유일한 척도이어야 하겠다.(p16) <전환시대의 논리> 中



 일그러진 언어로 전달되는 사상은 일그러진 사상을 그 커뮤니케이션의 상대에게 재구성하게 마련이다. 그것은 사각형을 보고 삼각형이라는 표면의 언어로 전달된 사상이 상대방에게 삼각형의 형상을 재구성케 하는 절차이다. 사각형을 놓고 삼각형의, 또는 원을 놓고 직선의 관념을 국민에게 재구성케 하려는 의도는 현대 국가사회에서는 주로 통치자들의 정치적 목적에 있다.(p206)  <전환시대의 논리> 中


 저자는 <전환시대의 논리>를 통해 일그러진 언어로 표현된 비뚤어진 사상이 그릇된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사법부의 독립과 공정한 언론이 부족한 우리의 현실 속에서  시대의 표상(表象)은 분명히 변환되어 왔지만, 이 시대를 관통하는 '논리 論理'는 현재도 유효하다는 것을 <전환시대의 논리>는 잘 보여준다. 


 국가이익을 해치고 국가안보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미국정부가 공개하기를 반대한 그 비밀문서를 숙독해보면 그것이 공개됨으로써 타격을 입는 것은 국가나 국민이 아니라 집권자와 정책에 참여한 인물들의 위신과 체면뿐임을 알 수 있다.(p28)  <전환시대의 논리> 中


 사법부의 독립성을 믿을 수 없는 나라 같았으면 신문은 처음부터 그와같은 대담한 폭로기사를 보도할 생각도 못했을 것이고 법의 판단에 기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유언론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 같았으면 그와같은 행정권력의 페어플레이 정신과 사법부의 독립성도 존재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당연하다.(p15)  <전환시대의 논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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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0 08: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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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 하버마스 :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 지식인마을 32
하상복 지음 / 김영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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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리성과 일관성을 통해 사물의 내적 원리를 인식하는 능력인 이성(理性, logos)는 본래 개인의 정신적 자질이었다. 하지만 이성이 특정 역사적 시기에 지배적 정신의 위치에 오르면서 그것은 개인이 아닌 집단적 차원에서 작동하기 시작했다. 바로 서구의 근대라는 역사적 시간 속에서 이성은 지배적 집단 정신이 되어 정치/사회적으로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p29)... 계몽의 힘,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성의 힘은 단순히 자연과 사회에 대한 관조가 아니라 기존 질서에 대한 비판을 통해 새로운 질서의 형성을 이끈 실천력으로 이해해야 한다.(p76)


 <푸코 & 하버마스 :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의 주제는 이성(理性)이다. 그리고, 책에서는 이성의 역할을 둘러싼 푸코(Paul-Michel Foucault, 1926 ~ 1984)와 하버마스(Jurgen Habermas, 1929 ~ )의 차이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근대 이성의 어두운 측면을 바라본 푸코와 근대 이성의 밝은 면을 바라본 하버마스. 푸코가 중세의 신을 부정한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 1900)의 뒤를 이어 근대의 이성을 부정했다면, 하버마스는 공론장에서 이성을 통한 문제해결 능력을 강조한다. 


 푸코에게 서구의 근대 이성은 과학적 진리의 이름으로 비이성적인 것들을 배제하고 타자화하는 폭력이었다. 그 폭력은 물리력이 아니라 지식을 매개로 매우 정교하게 이루어졌다. 푸코는 서구 근대 사회가 정신병과 미친 사람을 다루는 방식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파헤쳤다. 지식의 정치적 힘은 '지식=진리'라는 등식에 기초한다. 푸코는 고고학적 방법을 통해 서구 근대의 지식이 진리와 얼머나 거리가 먼가를, 그리고 계보학적 방법을 통해 그 지식이 비이성적인 사람들을 얼마나 정교하게 통제하는가를 제시해주었다.(p208)


 하버마스는 서구 근대 이성이 본래 해방적 힘을 발휘해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18세기 서유럽 부르주아 공론장을 그에 대한 적절한 역사적 사례로 본다. 문제는 그 해방적 힘이 특정한 역사적 국면 속에서 가라앉아 있다는데 있다. 따라서 해방적 힘이 간직되어 있는 영역 속에서 이성의 잠재력을 현실화해야 한다.(p209)

 

  그렇다면, 이들의 다른 상황인식은 어디에서 출발하는 것일까? <푸코 & 하버마스>안 에서 우리는 언어에 대한 이들의 서로 다른 관점을 확인하게 된다. 통제 규칙의 전달자로서의 언어와 커뮤니케이션 도구로서의 언어. 언어에 대한 이들의 입장차이는 이성에 대한 이들의 차이로까지 이어진다.


 <담론의 질서>에서 인간의 언어 행위는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통제 규칙에 종속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지식의 고고학>에서 지식은 역사적 연속성 위에서가 아니라 역사적 단절과 불연속 위에서 성립한다고 강조했다. 한마디로 그는 인간의 주체성 subjectivity을 부정하는 구조주의적 사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푸코는 이러한 시각을 '고고학'으로 명명했다.(p98)


 하버마스에게 언어는 사물을 표상하는 도구가 아니라 열린 공간에서 타인과 관계 맺기 위한 커뮤니케이션의 매개물이었다.(p153)... 하버마스는 서구 근대 사회를 이끈 이성이 과연 부정적인 모습만을 지니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 사회를 관통하는 원리로서 이성의 폭력적, 지배적 속성을 폭로하는 반근대주의, 반이성주의 사상가들에 맞서 하버마스는 서구의 근대가 간직하고 있는 만주주의적 잠재력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p165)


 사실, 푸코와 하버마스 모두 일가를 이룬 철학자이기에 그 방대한 사상을 요약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이번 리뷰에서는 <푸코 & 하버마스>가 입문서라는 점을 감안하고, 또 이들 사상가의 차이에 한정해서 살펴보자. 푸코는 담론과 언표라는 두 개념을 언어 영역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며 사회적 공간에 위치시킨다. 푸코에게 문제는 이러한 언어가 자리한 공간이 우리에게 통제와 감시를 하는 판옵티콘(Panopticon)이라는 것에 있으며, 푸코에게 판옵티콘은 바로 이성으로 대표되는 근대라 할 수 있다. 


  푸코에게 근대는 진보의 증거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근대 서구인들이 얼마나 간교하고 모순적인 정치적 욕망의 덩어리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징표였다. 근대는 정신병을 제조해내고, 사체를 난도질하고, 성적 욕망의 도덕적 표준을 정립하고, 육체의 감시 장치를 발명해냈다.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찬미해 마지않던 근대는 통제와 억압과 폭력 위에 설립된 건축물이라는 것이 푸코의 생각이었다.(p90)


 <지식의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개념은 지식을 구체적인 계기들인 담론 談論 dscours과 언표 言表 enonce다. 언어학적 차원에서 언표는 말이나 글로 표현된 진술을 의미하고, 담론은 그러한 언표들의 집합이다. 그러나 푸코는 담론과 언표를 언어학적 영역 바깥으로 끌어내서 사회적 공간 속에 위치시키고자 한다.(p134)


 여기에 덧붙이자면, 언표가 언어 바깥에서 이해할 때만 제대로 규명될 수 있다는 푸코의 말은 괴델(Kurt Godel, 1906 ~ 1978)의 불완전성 정리로 뒷받침될 수 있을 것다. 근대를 부정하는 푸코의 이론을 근대의 산물인 수학이 뒷받침하는 것이 다소 아이러니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괴델의 두 번째 불완전성 정리는 "이론은 자신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모순인 공리계 T가 존재한다고 하자. 이것이 무모순임을 증명할 수 있을까? 괴델은 T가 무모순이면, "T가 무모순이다"라는 문장은 (수론의 문장으로 부호화했을 때) T로부터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보였다. 따라서 "T가 무모순이다"라는 문장은 참이면서도 증명불가능한 문장이다.(p259) <Mathematics 2> 中


 반면,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서 언어의 기능을 한정시켜 놓는다면, 언어는 사회구조의 강압수단이 아닌 수평 관계를 다지는 역할을 수행한다. 하버마스는 근대 부르주아(bourgeois) 계급 형성과정에서 일어난 정치혁명의 과정에서 일어난 한 단면에 주목한다. 개인들의 친목모임에서 공론의 장으로, 예술에서 정치의 장으로 확장되는 역사 속의 공론장 모습을 통해 다른 의미의 미메시스가 발견된다.


 하버마스는 아도르노가 제시한 '미메시스 mimesis'라는 개념에 주목한다. 아도르노의 미메시스는 개념적 사유에 대비되는 일종의 충동적 체험을 뜻하는데 그것은 자신을 주변 세계 속으로 몰입시켜 자신과 주변의 경계와 구분이 해체되는 상태, 즉 물아일체 物我一體를 만들어내는 힘이다. 아도르노는 미메시스적 행위들을 통해 서구 근대 사회에서 초래된 주체와 객체 사이에 가로놓인 거대한 갈등적 심연을 해소하기를 소망했다. 하버마스는 주체/객체 관계를 '주체/주체' 관계로 전환시키기보다는 그 둘의 관계를 원초적으로 해체하는 힘이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위한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p182) 


 부르주아 공론장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국가적 사안들을 논의하는 부르주아 사회의 토론 공간을 뜻한다. 애초에 문학과 예술을 논하는 공간으로 시작된 부르주아 공론장은 점차 국가적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여론이 조성되는 정치적 공간으로 진화해나갔다.(p186)... 부르주아 공론장은 공권력 영역이 아니라 사적 영역에 속한다. 그것은 곧 부르주아 공론장이 사적인 삶이라는 이해관계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공론장은 사적 영역 내의 경계가 보여주고 있듯이 단순히 가족적 삶과 경제적 삶으로 매몰되지 않는다. 부르주아 사회의 사적 개인들은 공론장을 통해 공권력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여론을 주조해내는 '공중'으로 전환된다. 이렇게 부르주아는 사적 개인임과 동시에 공중으로 등장한다. 이렇듯 매우 독특한 정치적 위상을 지닌 부르주아 공론장에는 사실상 근대 민주주의의 원리가 내재되어 있다.(p196)


 영화 <스타워즈 Starwars>에서 포스의 어두운 면(Darkside of the Force)과 밝은 면(Lightside of the Force)이 나온다. 다스 베이더(Darth Vader)와 아나킨 스카이워커(Anakin Skywalker)로 표현되는 포스의 양면에서 우리는 어느 쪽을 진정한 포스의 본질(本質)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성의 어두운 면을 바라본 푸코와 밝은 면을 바라본 하버마스 중 누구의 시각이 옳은 것일까. 


[그림] Darth Vader/Anakin Skywalker(출처 : https://www.planetminecraft.com/skin/darth-vader-anakin-skywalker-4358471/)


 섣부르게 답을 하기전, 우리가 근대와 이성을 바로 보는 것은 이들 양면을 종합해서 이해했을 때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종합해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다 깊이 있는 공부가 필요할 것이다. 다음을 위해 이정도로 틀만 잡아놓고 입문서는 이만 덮도록 하자...


PS.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의 다른 예. 오늘 아침 주차장에 있는 자동차 시동을 걸고 나서 실을 짐이 있어 차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오른쪽 라이트가 꺼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 자동차 안 운전석에 있을 때는 자동차에 있는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자동차 밖에 있어서는 문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론(자동차)은 자신의 무모순성(라이트가 꺼졌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 불완전성 정리를 대강 이렇게 받아들이면 무리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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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 니체 :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 지식인마을 37
김선희 지음 / 김영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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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펜하우어를 괴롭혔던 중심 물음은 삶의 고통, 즉 '삶은 왜 이다지도 고통스러운가?'였다. 그리고 이 물음에 천착한 끝에 그가 발견한 고통의 근원은 의지로 대변되는 의욕과 성욕이었다. 반면에 니체를 괴롭혔던 물음은 '우리 삶의 데카당스 decadence나 허무주의는 어디서 왔는가?'로 대변될 수 있는데, 이는 우리 존재와 고통의 발생에 대한 물음과 더불어 인류가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던 순간에 사용한 다양한 삶의 기예에 대한 물음이었다.(p17)


 <쇼펜하우어 & 니체 :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는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 ~ 1860)와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 1900) 입문서로서 '존재'와 '고통'에 초점을 맞추어 이들 사상의 차이점을 살펴본다. 


 쇼펜하우어에 있어서 직관적 표상은 세계의 근거나 고통의 근거에 대한 물음의 답을 표상에서 의지로 이행시키는 열쇠 개념이다. 쇼펜하우어가 표상의 근거를 직관에서 빼앗고 직관의 근거를 육체 Leibd에서 찾고, 육체를 의지와 불가분의 것으로 보는 까닭에 고통의 해석학의 중심축을 표상론에서 의지론으로 이행한다... 모든 표상은 의지의 객관화에 불과하기에 이 세상의 모든 현상들, 즉 표상들의 배후에는 바로 의지가 존재한다. 세계의 궁극적인 원인에 대한 충족 이유율의 탐구는 바로 의지에 대한 탐구로 집중된다.(p63)... 삶에 대한 의지의 긍정은 바로 성욕을 충족시키는 생식에 의하여 가장 잘 강화된다.(p68)


 쇼펜하우어에게 현상계와 본체계는 다른 세계가 아닌 다르게 경혐되는 같은 세계이며, '의지'와 '표상'이라는 두 측면을 갖춘 하나의 세계다. 표상은 외부에서 관찰되고, 의지는 내부에서 경험된다. 때문에 고통의 원인 역시 외부에서 내부로 이행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의지는 기본적인 욕구(성욕) 뒤에 숨어 있다.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욕구를 해소하려 하지만 탄타로스(Tantalos)의 형벌처럼 기아와 갈증을 해소할 수는 없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예술과 이념에 대한 인식이다.


[그림] 탄타로스의 형벌(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426434658452495973/)


 동물 세계의 의지는 인식적이다. 그러나 이때 인식은 의지에 의해서 지배되는 의지의 노예인 인식과 의지로부터 자유로운 인식으로 구분된다. 후자는 인간이 의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때, 즉 인과율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가능하다. 이를 위한 수단을 쇼펜하우어는 바로 예술 Kunst과 이념 idee에 대한 인식에서 찾는다.(p65)... 의지가 강할수록 노/병/사와 같은 실존의 결여적 속성은 더 강한 고통을 야기한다.(p83)... 예술과 이념에 대한 인식을 통한 치료적 해석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부각된다. 이 지점이 바로 표상과 의지의 노예인 인간이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는 곳이다.(p89) 


 의지와 인식의 접목 지점은 의지의 사실적 긍정에서 의지의 당위적 부정으로 이행하는 지점이다. 의지의 노예에 불과했던 오성이 인식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오성을 넘어서는 예술과 정관에 의한 이념의 인식이라는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이 차원에서 표상과 의지에 의한 염세주의적 해석이 예술과 이념에 대한 인식을 통한 낙관주의적 해석으로 바뀌는 것이다.(p79)


 쇼펜하우어의 예술과 이념에 대한 인식이 낙관적인 해석으로 이어진다는 그 지점에서 니체의 사상은 출발한다.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odie>에서 말한 디오니소스과 아폴론의 대립은 감성(感性)과 이성(理性)의 대립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아폴론적인 요소의 승리가 그리스 문화의 몰락을 가져왔다는 것을 초기 니체는 주장한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광기가 그리스 땅에 가져다준 풍요로움의 산물로 본다. 반면에 우리가 찬양해 마지않는 그리스의 심미적 명랑함이나 학문적 낙천주의를 그리스의 해체와 약화의 시기에 등장한 병적인 증후라고 여긴다.(p139)...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예술의 발전을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적인 결합 속에서 찾는다.(p140)... 예술의 세계와 가상의 세계를 지배하던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대립 대신에 디오니소스와 소크라테스의 대립이 새로이 등장하고 마침내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에 이르러서 소크라테스의 유령이 승리함으로써 그리스 비극의 디오니소스적 요소는 소멸된다. 이와 같은 역전은 바로 그리스인들의 삶의 몰락을 의미한다.(p152)


 이러한 문화 예술적인 측면에 니체는 '계보학 系譜學'의 측면이 더해지면서, 문화/예술의 가치전환을 확장시켜 나간다. <도덕의 계보학 Zur Genealogie der Moral: Eine Streitschrift>으로 대표되는 니체 사상은 이제 플라톤/소크라테스 비판에서 기독교 비판으로 방향을 전환된다. 


 니체는 학문 그리고 예술과 관련하여 그것이 예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을 중심으로 하는 윤리적 문제 설정임을 명시한다... 따라서 비판의 대상도 더 이상 소크라테스적 주지주의의 인식론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기독교의 도덕으로 이행한다.(p178)...  니체의 가치 전환은 계보학적 수단을 통하여 순간적인 가능성에 한정되어 있는 음악이나 직관과 같은 비역사적인 수단을 통한 가치 전환에 비하여, 지속적인 가치 전환의 길을 제시한다. 즉 계보학적 성찰은 시간적/공간적으로 각인된 물질화된 과거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p181)

 그리고, 니체는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유령과 기독교의 도덕을 넘어선 초인(超人)을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에서 말한다. 강인한 낙타에서 자유로운 사자로, 다시 창의적인 어린이가 되면서 제약을 넘어선 인간은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의 모습을 가진다. 


 디오니소스적 예술가라는 개념은 니체의 예술론의 새로운 면모를 드러내는 중요한 개념이다. 이 개념을 통하여 니체는 더 이상 망각을 재촉하는 도취나 꿈 그리고 기존의 도덕에 반기만을 드는 파괴적인 사자를 내세우는 대신에 새로운 삶의 형식을 창조하려는 자가 지녀야 할 기본적인 기예를 제시한다.(p160)... 정신은 사자의 단계에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사자는 단지 자유를 쟁취하는 자이다. 자유는 단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다. 이 준비 작업이 끝날 때 정신은 사자에서 어린아이로 변화한다.(p235)

 요약하면,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자신의 시야를 한계로 세계를 인식하며, 표상과 의지를 통해 이를 경험한다. 또한 인간의 의지는 본성 뒤에 숨어 있으나, 이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기에 의지를 벗어날 필요가 있고, 예술과 이념에 대한 인식이 고통을 벗어나는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반면, 니체는 인간은 디오니소스적 요소의 상실을 통해 고대에는 소크라테스 유령이, 중세에는 기독교의 도덕으로 대표되는 이성이 승리해왔으나, 인간이 이러한 제약으로부터 극복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 감성과 현재의 회복일 강조했다는 것으로 거칠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깊이 있는 정리가 필요한 것은 물론이겠지만, 입문서로서는 이정도로 일단 넘기자. 


 <쇼펜하우어 & 니체 :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는 입문서적인 지식인 마을 시리즈  중에서도 꽤 읽기 어려운 책이다. 이는 쇼펜하우어와 니체외에도 하버마스(Jurgen Habermas, 1929 ~ )와 푸코(Paul-Michel Foucault, 1926 ~ 1984), 빅터 프랭클(Viktor Emil Frankl, 1905 ~ 1997)의 사상까지 다루기 때문이다. 하나라도 알려주고 싶은 저자의 배려 깊음은 입문자들에게는 못내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과감하게 하버마스와 푸코의 이야기는 같은 지식인 마을의 <푸코 & 하버마스 :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 쪽으로 돌리도록 하자. 엄밀하게 말해서, 두 책의 주제는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짐은 되도록 가볍게 갈 필요가 있다 생각된다. 큰 사상가의 사상을 대강 정리한 이번 리뷰를 서둘러 마무리 하자...


PS. 그래도, 하버마스와 푸코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이들은 <쇼펜하우어 & 니체>에서 언급한 하버마스의 비판은 '신은 죽었다'를 통해 기존 질서를 부정하지만, 이에 대해 윤리적 대안을 니체가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이에 대한 푸코의 반박은 '파르헤지아' 문제 설정에서 발생하는 변형이 상이한 진리 놀이의 형태를 가져온다는 정도로 대강 정리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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