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 니체 :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 지식인마을 37
김선희 지음 / 김영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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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펜하우어를 괴롭혔던 중심 물음은 삶의 고통, 즉 '삶은 왜 이다지도 고통스러운가?'였다. 그리고 이 물음에 천착한 끝에 그가 발견한 고통의 근원은 의지로 대변되는 의욕과 성욕이었다. 반면에 니체를 괴롭혔던 물음은 '우리 삶의 데카당스 decadence나 허무주의는 어디서 왔는가?'로 대변될 수 있는데, 이는 우리 존재와 고통의 발생에 대한 물음과 더불어 인류가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던 순간에 사용한 다양한 삶의 기예에 대한 물음이었다.(p17)


 <쇼펜하우어 & 니체 :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는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 ~ 1860)와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 1900) 입문서로서 '존재'와 '고통'에 초점을 맞추어 이들 사상의 차이점을 살펴본다. 


 쇼펜하우어에 있어서 직관적 표상은 세계의 근거나 고통의 근거에 대한 물음의 답을 표상에서 의지로 이행시키는 열쇠 개념이다. 쇼펜하우어가 표상의 근거를 직관에서 빼앗고 직관의 근거를 육체 Leibd에서 찾고, 육체를 의지와 불가분의 것으로 보는 까닭에 고통의 해석학의 중심축을 표상론에서 의지론으로 이행한다... 모든 표상은 의지의 객관화에 불과하기에 이 세상의 모든 현상들, 즉 표상들의 배후에는 바로 의지가 존재한다. 세계의 궁극적인 원인에 대한 충족 이유율의 탐구는 바로 의지에 대한 탐구로 집중된다.(p63)... 삶에 대한 의지의 긍정은 바로 성욕을 충족시키는 생식에 의하여 가장 잘 강화된다.(p68)


 쇼펜하우어에게 현상계와 본체계는 다른 세계가 아닌 다르게 경혐되는 같은 세계이며, '의지'와 '표상'이라는 두 측면을 갖춘 하나의 세계다. 표상은 외부에서 관찰되고, 의지는 내부에서 경험된다. 때문에 고통의 원인 역시 외부에서 내부로 이행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의지는 기본적인 욕구(성욕) 뒤에 숨어 있다.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욕구를 해소하려 하지만 탄타로스(Tantalos)의 형벌처럼 기아와 갈증을 해소할 수는 없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예술과 이념에 대한 인식이다.


[그림] 탄타로스의 형벌(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426434658452495973/)


 동물 세계의 의지는 인식적이다. 그러나 이때 인식은 의지에 의해서 지배되는 의지의 노예인 인식과 의지로부터 자유로운 인식으로 구분된다. 후자는 인간이 의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때, 즉 인과율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가능하다. 이를 위한 수단을 쇼펜하우어는 바로 예술 Kunst과 이념 idee에 대한 인식에서 찾는다.(p65)... 의지가 강할수록 노/병/사와 같은 실존의 결여적 속성은 더 강한 고통을 야기한다.(p83)... 예술과 이념에 대한 인식을 통한 치료적 해석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부각된다. 이 지점이 바로 표상과 의지의 노예인 인간이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는 곳이다.(p89) 


 의지와 인식의 접목 지점은 의지의 사실적 긍정에서 의지의 당위적 부정으로 이행하는 지점이다. 의지의 노예에 불과했던 오성이 인식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오성을 넘어서는 예술과 정관에 의한 이념의 인식이라는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이 차원에서 표상과 의지에 의한 염세주의적 해석이 예술과 이념에 대한 인식을 통한 낙관주의적 해석으로 바뀌는 것이다.(p79)


 쇼펜하우어의 예술과 이념에 대한 인식이 낙관적인 해석으로 이어진다는 그 지점에서 니체의 사상은 출발한다.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odie>에서 말한 디오니소스과 아폴론의 대립은 감성(感性)과 이성(理性)의 대립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아폴론적인 요소의 승리가 그리스 문화의 몰락을 가져왔다는 것을 초기 니체는 주장한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광기가 그리스 땅에 가져다준 풍요로움의 산물로 본다. 반면에 우리가 찬양해 마지않는 그리스의 심미적 명랑함이나 학문적 낙천주의를 그리스의 해체와 약화의 시기에 등장한 병적인 증후라고 여긴다.(p139)...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예술의 발전을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적인 결합 속에서 찾는다.(p140)... 예술의 세계와 가상의 세계를 지배하던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대립 대신에 디오니소스와 소크라테스의 대립이 새로이 등장하고 마침내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에 이르러서 소크라테스의 유령이 승리함으로써 그리스 비극의 디오니소스적 요소는 소멸된다. 이와 같은 역전은 바로 그리스인들의 삶의 몰락을 의미한다.(p152)


 이러한 문화 예술적인 측면에 니체는 '계보학 系譜學'의 측면이 더해지면서, 문화/예술의 가치전환을 확장시켜 나간다. <도덕의 계보학 Zur Genealogie der Moral: Eine Streitschrift>으로 대표되는 니체 사상은 이제 플라톤/소크라테스 비판에서 기독교 비판으로 방향을 전환된다. 


 니체는 학문 그리고 예술과 관련하여 그것이 예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을 중심으로 하는 윤리적 문제 설정임을 명시한다... 따라서 비판의 대상도 더 이상 소크라테스적 주지주의의 인식론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기독교의 도덕으로 이행한다.(p178)...  니체의 가치 전환은 계보학적 수단을 통하여 순간적인 가능성에 한정되어 있는 음악이나 직관과 같은 비역사적인 수단을 통한 가치 전환에 비하여, 지속적인 가치 전환의 길을 제시한다. 즉 계보학적 성찰은 시간적/공간적으로 각인된 물질화된 과거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p181)

 그리고, 니체는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유령과 기독교의 도덕을 넘어선 초인(超人)을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에서 말한다. 강인한 낙타에서 자유로운 사자로, 다시 창의적인 어린이가 되면서 제약을 넘어선 인간은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의 모습을 가진다. 


 디오니소스적 예술가라는 개념은 니체의 예술론의 새로운 면모를 드러내는 중요한 개념이다. 이 개념을 통하여 니체는 더 이상 망각을 재촉하는 도취나 꿈 그리고 기존의 도덕에 반기만을 드는 파괴적인 사자를 내세우는 대신에 새로운 삶의 형식을 창조하려는 자가 지녀야 할 기본적인 기예를 제시한다.(p160)... 정신은 사자의 단계에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사자는 단지 자유를 쟁취하는 자이다. 자유는 단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다. 이 준비 작업이 끝날 때 정신은 사자에서 어린아이로 변화한다.(p235)

 요약하면,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자신의 시야를 한계로 세계를 인식하며, 표상과 의지를 통해 이를 경험한다. 또한 인간의 의지는 본성 뒤에 숨어 있으나, 이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기에 의지를 벗어날 필요가 있고, 예술과 이념에 대한 인식이 고통을 벗어나는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반면, 니체는 인간은 디오니소스적 요소의 상실을 통해 고대에는 소크라테스 유령이, 중세에는 기독교의 도덕으로 대표되는 이성이 승리해왔으나, 인간이 이러한 제약으로부터 극복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 감성과 현재의 회복일 강조했다는 것으로 거칠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깊이 있는 정리가 필요한 것은 물론이겠지만, 입문서로서는 이정도로 일단 넘기자. 


 <쇼펜하우어 & 니체 :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는 입문서적인 지식인 마을 시리즈  중에서도 꽤 읽기 어려운 책이다. 이는 쇼펜하우어와 니체외에도 하버마스(Jurgen Habermas, 1929 ~ )와 푸코(Paul-Michel Foucault, 1926 ~ 1984), 빅터 프랭클(Viktor Emil Frankl, 1905 ~ 1997)의 사상까지 다루기 때문이다. 하나라도 알려주고 싶은 저자의 배려 깊음은 입문자들에게는 못내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과감하게 하버마스와 푸코의 이야기는 같은 지식인 마을의 <푸코 & 하버마스 :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 쪽으로 돌리도록 하자. 엄밀하게 말해서, 두 책의 주제는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짐은 되도록 가볍게 갈 필요가 있다 생각된다. 큰 사상가의 사상을 대강 정리한 이번 리뷰를 서둘러 마무리 하자...


PS. 그래도, 하버마스와 푸코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이들은 <쇼펜하우어 & 니체>에서 언급한 하버마스의 비판은 '신은 죽었다'를 통해 기존 질서를 부정하지만, 이에 대해 윤리적 대안을 니체가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이에 대한 푸코의 반박은 '파르헤지아' 문제 설정에서 발생하는 변형이 상이한 진리 놀이의 형태를 가져온다는 정도로 대강 정리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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