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는 뭐가 되었든 청년 튜링이 정의한 네 가지 부품만으로 만든 것이다. 미리 정해진 부품들이다. 따라서 기계를 글로 표현할 때, 정해진 형식으로 제한된 단어만 사용해서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기계를 입력으로 받아서 그 기계가 하는 일을 고스란히 따라 하는 기계. 이런 특이한 기계를 그래서 청년 튜링은 ‘보편만능의 기계universal machine’라고 이름 붙인다. 임의의 기계를 입력으로 받아서 그 기계가 할 일을 그대로 해주는 기계기 때문이다.
바로 이 보편만능의 기계가 컴퓨터의 원천 설계도다. 기계(소프트웨어)를 글로 표현해서 넣어주면 그 기계가 하는 일을 따라 해 주는 기계(컴퓨터). 소프트웨어를 넣어주면 그 소프트웨어대로 일을 하는 도구. 바로 오늘날 우리가 컴퓨터라고 부르는 도구다.

따라서 비록 자유론적 자유의지(비물질적이고 의식을 갖춘 통제자에게 부여되는 자유의지론의 자유)는 없을지라도, 우리의 결정이 자연적이든 초자연적이든 외부의 힘에 의하여 통제되지 않고 정상적인 의사결정 능력(정신질환이나 뇌질환이 없는)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결정’이다.

사회가 형법 체계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는 ‘방식’에 대해서는 이와 같이 인간의 행동을 재조명하고 우리에게 자유론적 자유의지가 없음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밝힌 새로운 과학적 결론에 기초한 논의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주어진 상황에서 우리가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기초해 응분의 대가를 요구하는 응보주의 형벌의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반면에 사람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인센티브에 반응한다는 사실이 범죄 행동에 대한 기존 형벌을 유지하거나 심지어 강화하는 데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 이것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게임이론(사기꾼과 무임승차자의 처벌이 부정행위와 무임승차를 줄인다)적 분석에 의거한 결과다.

보어의 설명은 다소 철학적이다. 양자역학에서는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두 개의 배타적인 특성이 상보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자의 입자성과 파동성은 상보적이다. 전자는 입자이며 파동이다. 하지만 실험을 하면 이 둘 중에 하나의 성질만 확인할 수 있다.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 되는 실험은 절대 할 수 없다. 입자에 대한 실험을 하면 입자를 보게 되고, 파동에 대한 질문을 하면 파동을 보게 된다. 결국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질문이다. 무엇을 물어보느냐가 답을 결정한다는 거다.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측정은 그 과정 중에 필연적으로 대상을 교란한다. 측정을 통해 얻어낸 결과는 전자가 원래 가지고 있던 성질이 아니다. 그 결과는 측정 중 교란을 통해 얻은 불확실성을 반드시 포함한다. 전자가 원래 가진 성질을 절대 알 수 없다면 원래의 성질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는 걸까? 블랙홀 내부에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FSM: Flying Spaghetti Monster’i이 있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걸까? 누구도 블랙홀 안을 볼 수 없지 않은가? 결국 전자는 실재가 아닌 거다. 훗날 보어는 이런 말을 했다. "자연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알아내는 것은 물리학의 임무가 아니다. 물리학은 우리가 자연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

대부분의 사람은 로스웰 음모론의 진짜 핵심을 종종 잊어버리거나 간과한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어느 누구도 로스웰에서 일어난 사건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무도. 이 사건은 30년간 UFO 신봉자들의 연구 대상에 끼지도 못했고 SF 소설이나 타블로이드 신문 오락면의 소재로도 환영받지 못했다. UFO 관련 문헌의 각주에라도 소개되면 다행이었다. 교묘하게 은폐되어서가 아니라 형편없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로스웰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빈틈하게 조사됐으며, UFO 주장의 실체를 가장 철저히 밝힌 사건이다. UFO 연구자들이 그 사건의 허구성을 인정하려 해도 이미 때가 늦어버렸다. 외계 생명을 발견하고 싶은 사람은 외계인들이 어디 있는지부터 살펴야 한다. 외계인이 정말 어딘가에 있다면 지구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우주공간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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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NATO의 확대를 극력 반대한다. 자유주의와 친서방적 태도를 보이는 러시아 인사들도 NATO의 확대가 러시아 내의 민족주의 세력과 반서구 정치 세력의 입지를 크게 강화시킨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서구 그리스도교 세력권에 들어갔던 나라들로만 NATO의 확대 범위를 제한할 경우, 세르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몰도바, 벨라루스가, 또 분열되지 않을 경우 우크라이나도 NATO의 울타리 바깥에 남아 있으리라는 확신을 러시아도 가질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러시아는 자신의 주도 아래 정교의 심장부로서 하나의 블록을 형성하고, 상대적으로 약한 이슬람 국가들에 둘러싸인 완충 지대를 만들어 이슬람 국가들을 다양한 수준으로 지배하면서 다른 열강들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러시아는 또한 세계가 이러한 체제를 수용하고 승인하기를 바란다.

러시아를 제외하고 옛 소련 공화국들 중에서 가장 인구도 많고 비중이 큰 나라는 우크라이나다. 우크라이나는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누렸다. 그러나 근대로 접어들면서 모스크바가 통치하는 정치적 실체의 일부로 머물렀다. 그 결정적 전기가 되는 해는 1654년이었다. 당시 폴란드의 지배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카자크 지도자 보흐단 흐멜니츠키Bohdan Khmelnytsky는 폴란드와의 항쟁에서 러시아의 지원을 얻는 대가로 차르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했다. 그 이후 1991년까지, 1917년에서 1920년까지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정치적으로 모스크바의 지배를 내내 받았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2개의 상이한 문화를 가진 단절국이다. 서구 문명과 정교 문명의 단층선이 몇 세기째 우크라이나의 심장부를 가로지르고 있다.

그러나 그 선거는 러시아와 점점 가까워지는 우크라이나에서 서부 지역이 떨어져 나올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일부 러시아인은 오히려 그것을 환영할지 모른다. 한 러시아 장성은 "우크라이나, 아니 동부 우크라이나는 앞으로 5년이나 10년, 아니면 15년 안에 돌아올 것이다. 서부 우크라이나는 지옥에나 가라지!"라고 악담을 퍼부었다. 그러나 서구 지향의 우크라이나 연합동방가톨릭 세력은 강력한 의지와 서구의 효과적인 지원이 있어야만 독립 이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자신을 한반도, 베트남, 때로는 일본을 포함하는 ‘중화 지대’, 비중국계가 거주하지만 안보상의 이유로 중국이 지배하는 만주, 몽골, 위구르, 튀르크, 티베트로 이루어진 ‘아시아 내곽 지대’, 야만족이기는 하지만 중국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조공을 바칠 것으로 기대되었던 ‘외곽 지대’ 모두를 포함하는 세계로 이해했다.13 현재의 중화 문명 역시 비슷한 양식으로 구조화되고 있다.

새로운 중국의 역할이 점차 가시화되고 있다. 첫째, 그것은 중국이 국제 문제에서 자신의 역할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둘째, 해외 화교와 중국의 경제적 결속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셋째, 중국과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 중국적 색채가 강한 세 나라의 경제적, 정치적, 외교적 관계가 강화되고 있으며, 화교가 중요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동남아시아 각국이 중국에 점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대만 정부의 자기 이해는 전체 중국의 정부에서 중국 일부의 정부로, 다시 중국과는 전혀 관련성이 없는 정부로 단계적으로 발전해왔다. 독립을 사실상 공식화하는 마지막 견해는 중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중국 정부는 대만의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무력을 행사할 뜻이 있음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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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은 절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전통에 집착하는 것은 개인의 삶을 연장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있던 우리 자신보다 큰 존재의 일부가 되는 셈이니까. 그것은 영원한 삶과 같다. 그리고 옛날로 돌아가 전통을 되살리고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은 죽음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처럼 보일 수 있다.

힘든 시기에는 에덴동산 같은 낙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편안하고 안전했던 어머니의 자궁으로. 모든 것이 순수하고 단순했던 시절로. 어린 시절로. 그때는 지금보다 좋았으니까. 우리에게는 자취를 더듬어 모든 것이 엉망이 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가 분명히 존재한다. 한마디로 인간은 진심으로 ‘리셋 버튼’을 원한다.

마지막으로 다수의 종교가 자연적 재해를 종말의 전조로 해석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근, 지진, 병충해, 생물다양성의 상실, 폭염, 산사태, 산성비 같은 재해는 일부 종교에서는 종말의 조짐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전 세계에 재앙적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충분한 기후변화는 세계의 종말이 임박했다는 종말론적 신념을 강화시킬 수 있다.

요점은 우리가 인류의 멸망 가능성이 점점 커질 것으로 예상되는 새로운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종교인과 종말론자들은 새로운 구원이 도래하길 기다릴 뿐 멸망의 가능성은 배제한다. 인류에게 멸망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GNR 기술을 특별히 우려스럽게 만드는 또 다른 특성은 이런 기술이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한다는 사실이다. GNR 기술들은 미래의 인간들로 하여금 점점 더 심원한 방법으로 물질계를 조작하고 바꿀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예컨대 합성생물학 분야에서는 병원성을 가질 수도 있는 전적으로 새로운 미생물의 설계가 가능해지고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종말론적 테러가 21세기 말까지 인류문명에 가장 심각한 위협 중의 하나가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강력한 역사적, 인구통계학적, 기술적 증거가 있음을 밝힐 것이다. 아래에서 살펴볼 이유들 때문에 이는 실제 현존하는 위협이 될 수 있으며, 인류의 멸망이나 미래 세대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믿음에 기반을 둔 종교적 사고방식의 위험성과 그것이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는다면 대재앙의 가능성은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수준까지 커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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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도주 - 벼랑 끝으로 내몰린 루이 16세 Liberte :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5
주명철 지음 / 여문책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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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년 6월 21일 밤 1시경 루이 16세는 가족과 함께 변장한 뒤 튈르리 궁을 몰래 빠져나가 뤽상부르(룰셈부르크)쪽 국경을 향해 달려갔다가, 결국 밤 11시에 국경 근처의 작은 마을 바렌에서 붙잡혔다 _ 주명철, <왕의 도주> , p10/380

주명철 교수의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제5권 <왕의 도주 - 벼랑 끝으로 내몰린 루이 16세 Liberte>는 불과 하루 남짓한 루이 16세의 도주 배경을 설명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절대군주에서 입법(入法)권을 국회에 넘겨주고 프랑스를 위해 절대군주에서 입헌군주로 내려오겠다고 선언했던 루이 16세. 그러나, 파리에서 몰래 빠져나가고 남겨놓은 <왕이 파리를 떠나면서 모든 프랑스인에게 보내는 성명서>는 그간 입헌군주로서 자신이 행한 행위가 강박에 의한 것으로 무효임을 선언하면서 사실상 정치적 유서가 되버렸다.

루이 16세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형편없게 되었는지 조목조목 설명했다. 그는 겉으로는 혁명에 동조했지만, 절대군주제의 추억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글로 남겼다. 2년 동안 자신이 받아들이고 승인했던 수많은 법을 한순간에 부정했다. 게다가 그는 국회가 전보다 더 신뢰를 잃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1791년의 현실을, 1,400년간 번영했던 군주제가 아니라 온갖 정치 클럽의 전제정 또는 무정부상태라고 진단했다. _ 주명철, <왕의 도주> , p305/380

그렇다면, 그는 어째서 입헌군주로서 자신을 부정하고 사실상 혁명을 부정했던 것이었을까. 혁명 이후 루이 16세의 몸은 튈트리(Tuileries)에 있었지만, 마음은 항상 베르사유(Versailles)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의 정신은 궁정사회의 질서에서 채 빠져나오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절대군주인 자신을 정점으로 형성된 커뮤니케이션의 장, 사교계에 익숙한 그에게 노르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 1897 ~ 1990)가 <궁정사회 Die ho"fische Gesellschaft>에서 강조했던 '결합태(Figuration)의 중심'에서 '국회의 배경'으로 전락한 상황은 마치 중세인들이 '지동설'을 받아들여야 했던 충격처럼 다가가지 않았을까. 루이 16세는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결국 도주라는 길을 택한다.

국회는 세습적 군주제와 대의정부를 합친 형태의 헌법을 채택했고, 입법부는 상설기구이고 종교인, 행정관, 판사들을 인민이 선출하는 체제를 만들면서 입법권을 구고히가 가지며, 법의 승인권을 왕이 가지도록 했다. 국내외의 공권력도 똑같은 원리 위에 조직했고 삼권분립을 바탕으로 구성한 것이 새 헌법이라고 하면서, 왕은 이 헌법을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사실을 각국 대사가 외교활동에서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혁명이란 수세기 동안 쌓인 수많은 폐단을 척결하는 일이며, 그 같은 폐단은 인민의 잘못이나 대신들의 권한남용 때문에 쌓인 것이지 왕들의 권한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p243)... 무모랭이 대변했듯이, 왕이 생각하는 프랑스 혁명은 혁명세력이 생각하는 것과 원칙적으로 같았다. 그러나 과연 왕은 진심으로 그 사실을 인정했던 것일까? _ 주명철, <왕의 도주> , p244/380

그렇지만, 혁명에 대해 위선적이었던 것은 루이 16세에 한정된 것만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혁명에 대한 (좌파)의원들의 태도다. 이들은 국왕을 이용해 왕당파를 무마하고, 적대적이었던 외국(특히 오스트리아 제국)과 국내의 반혁명의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낮추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는 점에서 위선적이었다. 그들이 외치는 '국왕 만세'는 외국의 침략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는 인질을 안도하게 하려는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면에서 본다면, 루이 16세 도주사건 직전까지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은 '궁정사회의 무도장'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서로 자신의 진의를 가면으로 애써 감추고, 설사 알더라도 미소로 적당히 무마하며 넘어가는 사교장과 흘러나오는 음악처럼, 그들의 정치적 기만속에서 여러 법률들이 제정되어 나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면에서 본다면, 루이 16세 뿐 아니라 프랑스 혁명 자체가 '궁정예법'의 패러다임에서 움직이는 앙시앵 레짐의 유산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앙시앙 레짐의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않은 이들이 말하는 개혁은 한계가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결국 혁명의 완성은 과거에 대한 완전한 기억의 소멸로 끝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루이 16세의 도주 사건 후 분명해진 것은 가면 속에 진의를 숨겼던 왕이 본모습을 드러내면서, 국회 역시 더 이상 가면을 쓸 필요는 없어졌다는 점이다. 혁명의 파도는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이처럼 4월 하순에 왕이 진심을 드러내기보다는 혁명에 동조하는 듯한 말로 쓴 편지는 좌파 의원들의 환영을 받았다. 좌파 의원들은 그것이 왕의 진심인 줄 알았을까? 비록 진심이 아닌 줄 알았더라도, 그들은 왕이 혁명에 동조한다는 편지를 전국에 알려 왕의 행동을 더욱 제약하고, 왕당파에게도 훌륭한 교훈을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속내가 다르더라도 마지못해 맹세하는 행위는 장래의 행동을 규제하기 마련이다. _ 주명철, <왕의 도주> , p247/380

.그 뒤(루이16세의 도주사건과 귀환) 여론은 왕을 폐위하라고 난리였다. 그러나 국회는 여론을 외면했다. 정치가들은 왕이 순진하게 꾐에 빠져 납치당했다고 하면서 도주의 혐의를 벗겨주었다. 대중은 청원서를 제출하면서 압박했고, 파리 시장은 계엄령을 내려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총격을 가해 여남은 명이나 학살했다.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이나 옛 프랑스의 왕을 모두 피해자로 둔갑시키려는 세력이 있고, 대중은 거기에 속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치권력을 쥔 사람들은 대중의 의견을 존중하고 타협하는 척하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정국을 이끌려고 노력한다. _ 주명철, <왕의 도주> , p10/380

루이 16세가 감행한 30시간의 모험은 완전히 실패했다. 루이 16세가 다스리던 왕국은 이제 온전히 그의 것이 아니었음을 오지 마을인 바렌이 증명했다. 그것은 프랑스 왕국이 이제 국민국가로 거듭 태어났음을 보여주었다. 이 사건을 통해서 1790년 7월 14일의 전국연맹제가 상징적으로 보여준 연대감을 읽을 수 있다. 신분사회의 모습을 반영하는 왕의 군대가 새로운 모습을 갖추고 연맹의 정신을 구현하는 국민방위군 앞에서 맥을 못 추는 현실에서 이 사건이 갖는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이 사건이 끝난 뒤에도 왕이 자리를 유지하긴 해도, 그에 대한 여론이 급격히 나빠지고, 수동시민들의 정치무대에 뛰어드는 일이 잦아지면서 혁명이 급진화하게 된다. _ 주명철, <왕의 도주> , p337/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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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정책 1- 교육칙어와 조선교육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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