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과학자들이 터무니없는 주장에 빠져드는지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서는 비판적 사고 능력이 교육 수준이나 전문성과 상관관계가 있다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인간의 본질이 이성적 사고에 있지 않으며, 사고의 많은 부분이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감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신경과학 연구를 통해 밝혀냈다.

우리의 핵심 의식core consciousness
e 중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기억이나 추론, 언어의 영향을 받지 않는 지금 이 순간의 자아에 대한 상대적으로 단순한 감각이다. 이는 진화론적으로 가장 오래된 의식으로, 우리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다른 영장류는 물론 과거 인류 조상도 지녔던 의식 수준이다. 다마지오가 지적했듯이, 의식의 이러한 측면은 우리가 감정emotion이라고 여기는 복잡한 화학반응과 신경반응에 의해 철저하게 통제된다.

본질주의는 사물이나 유기체의 명백하고 관찰 가능한 성질이 그 사물이나 유기체의 핵심, 즉 ‘본질’에 해당하는 불분명하고 관찰 불가능한 성질에 의해 결정된다고 추측하는 행위다.

진화를 오해하는 것과 진화의 기본적인 사실을 부정하는 것 사이에 연관성이 있을까? 답은 "그렇다."이다. ‘진화가 무엇인지’ 잘못 이해한 사람은 올바르게 이해한 사람보다 ‘진화가 실제로 발생한다.’라는 주장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낮다.

침팬지와 보노보의 차이를 늑대와 개의 차이와 비교해보면, 늑대와 개에서 나타나는 여러 차이가 침팬지와 보노보 사이에서도 발견됩니다. 침팬지가 유인원의 늑대라면 보노보는 형태학적 특성이나 행동적 특성 모두에서 유인원에서 개의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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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능으로 향하는 동역학(kinetics)과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구분되어야 할 질문은, 바로 초지능체가 하나만 존재할 것인지, 아니면 여러 개가 존재할 것인지 하는 질문이다.

제4장에서는 초지능의 개발을 선도하는 세력과 그것에 가장 근접한 경쟁자들 사이에 생길 수도 있는 간격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핵심적인 요인 한 가지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바로 인간 수준의 지능에서 강한 초지능으로 이행하는 속도이다.

선두주자와 후발주자 사이의 격차에 영향을 주는 한 요인은 선두주자가 가지고 있는 경쟁력(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의 확산 속도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질문은, 얼마나 많은 프로젝트들이 동시에 도약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도약을 이룬 여러 프로젝트 팀들 중에서 확실한 전략적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고 기술적으로 아주 비슷한 수준에 머무는 팀들이 얼마나 많은가이다.

초지능의 잠재적인 영향력을 생각할 때, 그것을 인간 기준에서 의인화하여 바라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 중심적인 기준은 씨앗 인공지능의 성장 궤도와 성숙한 초지능의 심리, 동기, 그리고 능력에 대해서 근거 없는 기대를 가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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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책에서 "초지능"은 다양하고 보편적인 인지 영역에서 현시대의 가장 뛰어난 인간보다 훨씬 더 우수한 지능체를 일컫는다. 이 정의는 여전히 꽤 모호하다. 단지 이 정의만을 따른다면 각기 다른 수행능력을 가진 여러 가지의 시스템들이 초지능으로 분류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속도적 초지능의 입장에서는 물질세계에서 시간 지연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속도적 초지능은 디지털 세계에서 작업을 수행하는 것을 더 선호하게 될 것이다. 가상현실에서 살면서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다룰 수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나노 수준 정도의 작은 단위의 인공 팔다리나 부속물이라면 인간의 팔다리 같은 거시적인 수준의 부속물보다 더 빠르게 작동할 것이기 때문에, 나노 크기의 물리적 조종장치(manipulator)를 가지고 실제 물리적 세계와도 상호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한 시스템의 특성 주파수는 그 길이 단위[length scale]에 반비례하는 경향이 있다5). 이처럼 빠른 지성체는 인간처럼 느려터진 존재들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속도의 지성체와 주로 상호작용을 할 것이다.

집단적 지능의 통합 정도를 서서히 높인다면, 종국에는 이것이 하나의 통합된 지능, 즉 느슨하게 서로 연결된 작은 인간 지성체의 단순한 조합이 아니라 하나의 단일한 거대 "지성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상 처음으로 인간의 뇌를 완벽하게 모방한 전뇌 에뮬레이션에 성공하는 것은, 이미 만들어진 에뮬레이션을 더 향상시키는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어렵다. 최초로 새로운 에뮬레이션을 만들기 위해서는, 스캔 기술이나 이미지 해석 능력에서 엄청난 수준의 기술적 도약이 필요하다. 또한 이 단계에는 수백 대의 대용량 스캐너를 사용하는 대규모 공장 단지 같은 상당한 정도의 물리적 자원이 필요할 것이다.

인간 전뇌 에뮬레이션이 가능해지면 저항성은 일단 감소했다가 시간이 지난 후에는 다시 증가할 것이다. 즉 그때에는 가장 눈에 띄게 비효율적으로 구현되던 것들이 효율성이 극대화되도록 고쳐지고, 가장 가능성이 큰 알고리즘상의 변화가 시험될 것이고, 조직적 혁신을 위한 가장 쉬운 방법들이 실행될 것이다.

요약해보면, 인간 수준의 소프트웨어가 개발되었을 때, 이런 프로그램들을 빠른 속도로 아주 많이 구동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하드웨어적 기반이 이미 존재할 가능성, 즉 하드웨어 공급 누적 상황을 생각해볼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소프트웨어 저항성은 정확하게 예측하기가 더 어렵지만, 어쩌면 하드웨어 저항성보다는 더 낮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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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아학파 반박-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지음, 성염 옮김 / 분도출판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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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위대함
아우구스티누스 지음, 성염 역주 / 분도출판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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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론
아우구스티누스 지음, 성염 옮김 / 분도출판사 / 2017년 7월
26,000원 → 23,400원(10%할인) / 마일리지 1,3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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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
아우구스티누스 지음, 성염 역주 / 분도출판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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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 성경의 지혜서 중 하나인 코헬렛서는 목적이 없어 방향 감각을 상실하거나 계속되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해결책을 제시한다. 우리는 코헬렛서를 통해 인생이 각자가 경험하는 작은 조각들로 이루어진 모자이크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삶의 순간들을 잃어버리기 전에 이해하고, 놓치기 전에 누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_ 조앤 치티스터,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p17/152 


 올해 첫영성체 교리를 듣고 있는 연의. 외워야 할 기도문도 많고, 성경 필사도 해야 하고, 평일미사도 가야하기에 예전보다 교리 이수 조건이 까다로워졌음을 실감하게 된다. 부모도 예외는 아니어서, 부모 교육도 별도로 진행되고 독후감도 제출해야하는 등 부모 역시 신경쓸 부분이 없지 않다. 그리고, 오늘 페이퍼는 제출할 과제 도서에 대한 내용이다.


 과제 도서인 조앤 치티스터 (Joan D. Chittister, 1936 ~ )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구약성경><코헬렛 Ecclesiastes>서의 내용을 현대인의 시각에서 재음미하는 영성서적이다. 태어날 때, 잃을 때, 사랑할 때, 웃을 때, 전쟁의 때 등등. 우리의 삶 전체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과 사건 안에서 저자는 그 의미를 발견하고 독자들과 나눈다. 저자가 발견하는 '때'의 의미는 또한 <코헬렛> 저자의 깨달음이기도 하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의 때가 있고 평화의 때가 있다. 그러니 일하는 사람에게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 _ <구약성경> <코헬렛> 3:1~9


 결국 지금 이 순간을 적극적으로 잡아야 한다. 우리가 존재하는 곳을 의식하고, 거기에 몰두하며, 기민하게 행동하는 것이 삶을 알차게 사는 비결이고 배워야 할 교훈이다. 우리 앞에 존재하는 지금 현재를 어떠한 요령 없이 보는 것이야말로 삶의 중요한 방식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게 된다. 이 문제는 인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끊임없이 말했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_ 조앤 치티스터,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p15/152 


 <코헬렛>의 저자로 알려진 솔로몬은 모든 것에 때가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여기에 바탕을 두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에서는 삶에서 현대인들의 삶의 방향성에 대해 나눔한다. 삶의 매 순간의 의미를 찾아가는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의 본문 내용은 하나의 지혜 문학으로서 우리에게 잠언(箴言)으로 다가온다. 잔잔하게 영혼을 적시는 책의 내용은 편안하게 다가오지만, 페이퍼에서는 경구보다 조금 다른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인용한 <코헬렛> 3장 9절의 내용을 다시 살펴보자.  


 '그러니 일하는 사람에게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


 이 한 문장으로 <코헬렛>의 '때'에 대한 코헬렛의 이야기는 반전으로 다가온다. '지혜의 왕'이라 불리던 솔로몬은 모든 것에 대한 때를 말한다. 현명한 그는 때의 의미를 깨닫고 그에 따라 적절하게 처신했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부와 영광을 부렸던 그가 말하는 '허무'의 의미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보람의 의미를 묻는 그의 물음과 이로부터 느껴지는 허무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코헬렛> 1장의 첫 구절로 이끈다. 때에 맞춰 인간으로서 최선의 삶을 살았건만, 그로부터 남겨진 것이 허무라면, 솔로몬의 마지막 깨달음은 절대적인 시간에 대한 인간의 무기력과 상대적으로 유한한 인간의 시간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까.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임금인 코헬렛의 말이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태양은 뜨고 지지만 떠올랐던 그 곳으로 서둘러 간다. _ <구약성경> <코헬렛> 1:1~5


 이와 관련하여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 CE 354 ~ 430)는 <참된 종교 De Vera Religione>에서 <코헬렛>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신의 섭리에 의해 주재되는 세상 속에서 인간은 상대적으로 유한하고 한계가 많지만, '헛됨'을 벗어날 수 있다면 유한함에서 벗어나 절대성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교부의 해설 속에서 신의 절대성과 인간의 유한성으로 인한 허무를 극복할 하나의 방편을 발견하게 된다. 초월(超越. transcendence).


죄와 그 벌에서 유래하는, 영혼의 이 도착倒錯으로 말미암아, 육체를 지닌 모든 사물이, 솔로몬의 말대로, 헛된 인간들의 헛됨이여. 세상 만사 헛되다. 사람이 하늘 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으랴? 여기서 '헛된 인간들'이라는 말이 괜히 덧붙여진 것이 아니다. 헛되게 만드는 인간들이 제거된다면, 즉 맨 마지막 것들을 맨 처음 것처럼 추구하는 인간들이 없다면, 육체를 지닌 사물이 곧 헛됨 그 자체가 되지는 않으며, 비록 미약하더라도 아무런 결함이 없는 자기 나름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것이다. _ 아우구스티누스, <참된 종교> 21.41


 사람에게 위험한 바로 그 섬광들을 경험한 다윗은 자신의 모든 희망을 하느님의 이름에 두는 이가 행복하다고 옳게 말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헛된 것과 어리석은 것들에 관심을 두지 않고 항상 그리스도를 향해 노력하며 늘 자신의 내적 눈으로 그리스도를 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라는 코헬렛의 말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허무입니다. 따라서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초월하십시오. 먼저 여기에서 달아나지 않으면, 지금도 존재하고 늘 존재하는 것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암브로시우스, <세상도피> 1,4) _ <교부들의 성경주해 9 - 잠언, 코헬렛, 아가>, p295 


 이러한 연결점은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의 본문에서도 찾을 수 있다. 매 순간에 머물면서 우리는 새로워지고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저자의 말은, 지혜의 왕이었던 솔로몬도 피해가지 못했던 허무함에 빠지지 않을 좋은 조언이 된다. <대학 大學>의 '苟日新(구일신) 日日新(일일신) 又日新(우일신)'과도 통하는 본문의 내용 속에서 인간의 한계성을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지만, 절대성에 수렴해가는 삶의 자세에 대해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시간은 모든 것이 즉시 일어나는 것을 막는 자연의 방법이다." 이 말은 영혼을 잠시 진정시키고 잠깐 멈추게 하는, 영적 성숙의 시간적 단계가 있음을 가르쳐 준다. 시간은 차례차례 인생의 어느 순간에서 순간으로 우리를 인도하며 우리가 그 시간 안에서 모든 상황을 겪게 한다. 그러나 인생한 할당된 일수를 채웠는지가 아니라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았는지로 평가된다. 이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_ 조앤 치티스터,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p148/152 


 <코헬렛>과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에서는 흐르는 시간 안에서 인간의 유한성이 드러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현재로서 절대적인 시간의 미분(微分)이라면, 과거-현재-미래의 절대적인 시간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적분(積分)이라 할 수 있겠다. 미분의 차원(次元)과 적분의 차원이 서로 다른 곳에 존재하는 것처럼, 절대적인 시간은 다른 차원의 문제로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현재'로 존재하는 '때'에만 관여할 수 있다. 여기에 절대적인 가치를 담으려 노력하는 자세에 대해 옛 지혜문헌들과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접점을 갖는다.  


 차라리 시간은 셋인데 과거에 대한 현재, 현재에 대한 현재, 미래에 대한 현재라고 하는 편이 적절하다. 이 셋은 영혼 속에 존재하는 무엇이고 다른 곳에서는 이것들이 안 보이며, 과거에 대한 현재는 기억(記憶)이고 현재에 대한 현재는 주시(注視)이며, 미래에 대한 현재는 기대(期待)다.(11권 20,26)...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기대에 해당하는 영역은 짦아지고 기억에 해당하는 영역은 길게 연장된다. _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11권 28.38, p456


 기나긴 시간이란 동시에 펼쳐질 수 없는 수많은 순간瞬間들에 의해서가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무슨 수로 알아듣게 하겠습니까? 영원에서는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고 전체全體로서 현전現前합니다. 어느 시간도 전체로서 현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과거는 미래에 의해서 밀려나고 모든 미래는 과거에 의해서 뒤쫓기며, 모든 과거와 미래는 항상 현재하는 것에 의해서 조성되고 전개된다는 사실을 누가 알아보게 하겠습니까? 누가 인간의 마음을 붙들어 세워 멈춰 서서 바라보게 만들고, 영원이 어떻게 정지한 채로 미래 시간과 과거 시간을 결정하는지, 그러면서도 영원 자체는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님을 바라보게 만들겠습니까? _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11권 11.13, p431


 제자가 스승인 랍비에게 물었다. "저처럼 미천한 사람이 어떻게 하면 모세처럼 살 수 있습니까?" 스승은 제자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자네가 죽을 때, '너는 왜 모세처럼 살지 못했나?'라는 질문을 받지 않는다네. '너는 왜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했나?'라는 질문을 받을 걸세." 그렇다. 우리가 누구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때가 있기에 할 수 있는 것이다. 때가 왔다. 지금이 바로 우리의 때다. _ 조앤 치티스터,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p152/152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가 유한한 시간에서 담아야 할 절대적 가치를 말한다면, 시간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도 존재한다. 이번에는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에서 출발해보자. 객관성과 주관성, 영원과 찰나의 대조로 상징되는 이 둘 중에서 어느 쪽에 무게 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우주(宇宙)에 대한 해석방향이 달라지고, 다른 결론에 이르게 됨을 보여준다는 내용은 리 스몰린(Lee Smolin, 1955 ~ )의 <리 스몰린의 시간의 물리학>에 담겨있다.


 '흐로노스 chronos"는 우리가 잘 아는 베테랑 할아버지, 시간의 아버지 Father Time, 즉 누구나 인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반면, "카이로스 Kairos"는 완전히 반대의 예측 불가능한 주관적인 시간이다. 객관적인 시간이라는 것은 바로 아이작 뉴턴이 얘기하는 시간의 특징 aquabiliter fluit - 즉, 강의 물이 항상 일정하게 흐르듯 영원히 고정된 시간이 바로 흐로노스이다.(p35)... 그에 반해서 주관적인 시간 "카이로스"는 흔히 "기회 opportunity"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이는 일정하게 아주 "적절한 때 right timing"을 의미한다. 흐로노스가 신적인 우주의 영원한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인간세상의 찰나, 즉 짤막한 현재의 시간이다. _ 김승중, <한국인이 캐낸 그리스 문명>, p37 


 절대적인 시간의 세계가 수리(數理)적 질서로 마치 정밀한 시계와 같은 구조로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면,  리 스몰린은 흐르는 물과 같은 시간에 대해 말한다. 이는 시간 안에서 시간을 바라보는 관계주의적 관점과 시간 밖에서 시간을 관조(觀照)하는 절대주의적 관점은 시간을 하나의 변수(變數)로 보는가, 주어진 조건으로 보는가의 차이이기도 하다. 시간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이야기의 방향은 다르지만, 책의 내용  중 수학을 통해 시간(時間)을 또 다른 공간(空間)으로 이해하는 뉴턴적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 안에서 우리는 <고백록>, <코헬렛>의 흔적들을 발견하게 된다...


 아이 첫 영세 교리 과제로 주어진 도서에 대한 내용이 어느새 산으로 와버렸지만, 되돌리기엔 이미 너무 많이 쓴 듯하다. 이 페이퍼 중 아우구스티누스 선에서 적당히 재편집을 해서 제출해야겠다...


 시간 안에서 생각하는 것과 시간 밖에서 생각하는 것의 차이는 인간 사고와 행위의 여러 측면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 우리가 기술적이거나 사회적인 문제에 직면했을 때, 이 문제를 해결할 접근법이 절대적이고 이미 존재하는 범주들의 집합으로서 결정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는 시간 밖에서 생각하는 것이다(p12)... 시간 안에서 생각하는 것은 상대주의가 아니라 일종의 관계주의 relationship다. 관계주의는 어떤 것에 대한 가장 참된 기술은 그것이 속한 계의 다른 부분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구체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철학이다. _ 리 스몰린, <리 스몰린의 시간의 물리학> , p13/302


 세계를 동역학적 부분과 배경(동역학적 부분을 둘러싸고 있고 우리가 이것을 기술하는 용어들을 정의하는)으로 나누는 것은 분명 뉴턴적 패러다임의 천재적인 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이 패러다임을 전체 우주에 적용하는 것을 적절하지 않게 만든다. 과학을 우주 전체의 이론으로 확장할 때 우리가 마주치는 도전은 정적인 부분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변화하며, 우주 밖에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_ 리 스몰린, <리 스몰린의 시간의 물리학> , p116/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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