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아리랑 1 (개정판) 아리랑 (개정판) 1
조정래 지음 / 해냄출판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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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에 수많은 농민들이 호남평야를 중심으로 해서 들고 일어났고, 공주까지 쳐올라간 농민군들이 신식무기를 가진 일본군과 싸우다가 밀리기 시작하면서 농민군들은 어쩔 수 없이 산으로 섬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과 관군은 먼저 산으로 들어간 농민군들부터 뒤쫒기 시작했다. 그때 그들의 길잡이 노릇을 해서 수없이 많은 눙민군들을 죽이게 한 것이 바로 보부상들이었다._조정래, <아리랑 1>, 11/192

조정래(趙廷來, 1943 ~ )의 <아리랑> 전편을 통해 개인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항일(抗日)투쟁의 계보다. 작품 전체를 통해 작가는 '동학농민운동 - 의병 - 독립군/의열단 - 조선의용군/광복군'으로 이어지는 무력 투쟁의 역사를 독자들에게 일깨우는데, 이 역사 속에서 구성원들은 꾸준히 바뀌었다는 사실도 함께 깨닫는다.

시간이 흘러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세대 교체가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쉽게 바뀌지 않는 상황에서 절망한 이들이 변절하고, 자신의 뜻을 굽히는 모습은 작품의 또다른 비극이기도 하다. <아리랑 1>에서는 기득권과 연계하여 동학농민군을 탄압한 보부상들이 황국협회(皇國協會)를 만들어 대한제국 내에서 기득권과 결탁했다면, 동학군을 이끌던 이들 중 일단은 독립협회(獨立協會)로, 다른 이들은 일진회(一進會)를 만들어 일본에 충성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완용은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려고 지방 근무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그는 철저한 친로파로 친일파들을 제거하고 일본을 궁지에 몰아대고 있던 판이라 일본사람들을 전주성 안으로 한 발짝도 들여놓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다시 중앙관직으로 옮겨가면서 정치상황이 달라져 러시아가 자꾸 일본에 밀리게 되었다. 그 상황을 따라 이완용도 친일파로 변해간 것을 시골에서 농사나 짓는 사람들이 알 까닭이 없었다._조정래, <아리랑 1>, 85/192

대표적인 친러파 이완용(李完用, 1858 ~ 1926)이 발빠르게 친일(親日)파로 변신하고, 동학군을 이끌던 이용구(李容九, 1868 ~ 1912)가 친일 어용 단체의 회장이 되었다는 사실은 당대를 살았던 이들에게는 나라를 잃은 것보다 더 진한 배신감을 안겨주지 않았을까. 이러한 배신감을 안고 의병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 싸움에 나선 이들의 아픔이 <아리랑 1>에서 상세하게 그려진다...

지난번 일진회 결성에 이용구가 앞으로 나섬으로써 동학은 완전히 반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한때 동학군 장수였던 이용구가 변절해 경의선 철도 공사에 북쪽 동학도들을 20만이 넘게 동원하면서부터 동학은 반 동강이 나기 시작했고, 민심을 잃게 되었다. 이제 이용구가 일진회의 거두가 되었으니 그 영향력 아래 있는 동학도들은 고스란히 일진회 회원이 될 수밖에 없었다._조정래, <아리랑 1>, 134/192

농민들의 호응을 얻는 데 두 가지 어려움이 있지 않은가 합니다. 하나는, 나라는 양반들이 망쳐먹고 싸움은 우리더러 나서라 하느냐 하는 배척감이지요. 그리고 다른 하나는, 봉기 때까지 비밀유지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점입니다._조정래, <아리랑 1>, 175/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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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두려워하는 바는, 물을 다스림에서 그 근원에서부터 하지 않으면 하류에서는 점점 넓이를 늘려가게 됩니다. 폐하께서는 인자하신 덕행으로 너그럽게 용서하시며, 차마 못하는 마음이 많으신 까닭에 내시들이 권력을 희롱하니 충신이 진출하지 못합니다.

참으로 장각이 효수되고 황건적이 옷의 색깔을 바꾸어 입었다하여도 신이 걱정하는 바는 바야흐로 더욱 깊어질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릇 사악한 사람과 정직한 사람은 나라를 함께 할 수 없으니, 역시 얼음과 석탄을 한 그릇에 넣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저들은 정직한 사람의 공적이 세상에 드러나면 위태롭고 망하는 징조가 나타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모두 교묘한 핑계와 꾸며낸 말을 하여 다 함께 거짓을 늘립니다. 무릇 효자라 할지라도 여러 차례 말이 전해지자 의심을 받게 되고,저자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하는 것도 세 사람이 말하면 성립되는 것이니 만약 진실과 거짓을 상세히 살피지 않으시면 충신이라도 장차 두우(杜郵)에서의 살육(殺戮)하는 것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20/59) - P20

"창천(蒼天)은 이미 죽고 황천(黃天)을 세워야 하니 갑자년에는 천하가 크게 길할 것이다."(15/59)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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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왕국 프로이센
크리스토퍼 클라크 지음, 박병화 옮김 / 마티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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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18세기 후반 프로이센에 집단적인 충성심이 확산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바닥에 형성된 침전물이 표면으로 가시화된 것이었다. 바닥층에 가라앉아 있던 것은 근대 초기의 종파 연대, 의무감과 동시에 평등주의적이고 경건주의적인 노동윤리, 전투와 침공의 충격에 대한 기억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프로이센의 열렬한 애국심이라는 말을 하기에는 좀 부족한 면이 있었다._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 p323


 프로이센에서는 국가가 구귀족의 자의적이고 개인화된 정권을 대신하여 점점 합리적인 질서를 전개하면서 융성하기 시작했다.(p819)... 국가라는 개념에 강력한 카리스마가 씌워진 것은, 국가의 삶과 국민의 삶을 통합한다든가 해방과 계몽, 시민권의 도구로서 국가가 발전한다는 말을 할 수 있게 된 슈타인-하르덴베르크 시대에 들어와서였다._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 p820


 크리스토퍼 클라크 (Christopher Clark)의 <강철왕국 프로이센 Iron Kingdom: The Rise and Downfall of Prussia 1600-1947>은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Furst von Bismarck-Schonhausen, 1815 ~ 1898)의 철혈정책으로 널리 알려진 브란데부르크-프로이센의 역사를 깊이 있게 서술한다. 그리고, 독자들은 저자의 서술 속에서 '거대한 병영(兵營) 국가'로 인식된 프로이센의 모습은 그들의 '자발적 선택'이 아닌 '강요된 현실'이었음을 알게 된다.


 베를린의 정책 결정권자들은 끊임없이 형세를 살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기 때문에 갈림길에서 갈피를 못 잡고 동요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어떤 선택을 내리더라도, 군주로서 망설였다는가 발뺌을 했다든가 결단을 못 내렸다는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의미에서 어떤 '지리적'인 결과라기보다 유럽의 권력 정치라는 상상의 지도에 그려진 브란데부르크의 입지에서 나온 결과였다. 우리가 17세기 초 유럽의 세력 판도에서 갈등 관계를 선으로 시각화해본다면 사실상 무방비 상태의 동서 속령을 거느린 브란데부르크가 이 선들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베를린에 들어서는 정부마다 동맹이냐 아니면 무장중립으로 독자적인 행동을 할 것이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_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 p65

[그림] Prussia territory(출처 : https://www.britannica.com/place/Prussia)


 서로는 프랑스, 북으로는 스웨덴, 동으로는 폴란드와 러시아, 남으로는 오스트리아로 둘러싸인 독일의 지정학적 위치는 평화 시에는 거대 제국들의 완충지역으로, 전쟁 시에는 전장(戰場)으로 활용되었다. 30년 전쟁(Thirty Years' War, 1618 ~ 1648)의 참상은 이러한 독일의 현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으로, 향후 '강한 국가'를 지향한 프로이센의 국정 방향을 결정지었다.


 작센의 법학자로서 홉스의 영향을 받은 사람 중에서 가장 뛰어난 독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자무엘 푸펜도르프는 마찬가지로 국가의 필요성에 대한 근거를 폭력과 무질서로 둘러싸인 암흑 세계에서 찾았다... 국가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서로에게 가할 수 있고 흔히 가하는 위해에 맞서 상호협동과 지원으로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썼다. 30년 전쟁의 트라우마는 이런 문장 속에서 메아리치고 있다._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 p77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1667년에 이렇게 썼다. "동맹은 분명히 좋지만 더 좋은 것은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자신의 힘이다. 통치자는 자신의 군대와 자원이 없을 때 존중받지 못한다. 다행히도 나는 이런 자원이 있어서 대우를 받았다." 선제후가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작성한 이 성찰의 기록에는 깊은 진실이 담겨 있다._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 p93

 

  저자는 '강력한 군사력'과 함께 프로이센의 또다른 무기로 '유연한 외교'를 들고 있다. 언뜻 상반되는 듯한 두 정책이 30년 전쟁의 트라우마를 안고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프로이센이 살아남는 비결이 되었다. 두 정책의 효과적인 사용을 통해 결과적으로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War of the Austrian Succession, 1740 ~ 1748)과 7년 전쟁(Seven Years' War, 1756 ~ 1763)을 통해 오스트리아를 물리치고 슐레지엔 지역을 차지하며, 18세기에 러시아,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 병합하고, 2차례에 걸친 슐레스비히 전쟁(Schleswig-Holsteinische Erhebung)으로 덴마크를 물리치고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공국의 지배권을 가져가며, 프로이센-프랑스전쟁(The Franco-Prussian War, 1870~ 1871) 전쟁으로 알사스-로렌 지방을 차지하면서 중부 유럽의 패권과 함께 독일 제2제국을 만들었다.


  베를린의 세계관의 기조는 항상 취약성에 대한 민감함이었다는 것. 프로이센 외교정책의 특징이 되는 초조한 행동주의는 30년전쟁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이다... 프로이센이 취약하다는 의식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 그것이 브란데부르크-프로이센의 역사가 당면한 핵심 문제 중 하나였다._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 p116


 끊임없이 동맹 파트너를 바꾸는 전략에 관해서 선제후는 포메른의 칼뱅파 추밀원 고문인 파울 폰 푹스의 조언을 따랐는데, 내용인즉슨 변함없이 어느 한 파트너에게 확실한 약속을 하지 말고 항상 '일관성 없는 정책'을 취하라는 것이었다._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 p99


 이러한 투 트랙 대외정책과 함께 프로이센은 대내적으로 칼뱅파를 등용한 관료제의 확립과 소비세의 도입을 통해 지방 지주귀족(융커)과의 충돌을 최소화하면서도 개혁을 향한 재원을 마련하는 주도면밀함을 보였다. 국내 산업 육성과 군사, 외교를 통한 대외 팽창 정책으로 요약되는 프로이센의 역사 속에서 다른 국가들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국가 staat'에 대한 의식이었다. 이러한 의식은 특히, 프랑스 대혁명 이후 고취된 민족의식이 기폭제가 되었는데, '라인 동맹'을 통해 독일을 분열시키려던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1769 ~ 1821)이 의도치 않게 독일 통일에 기여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나폴레옹에게서 '시대 정신 Zeitgeist'을 발견한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의 인식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소비세 도입은 중요한 전술적 자산으로서 신분 사회 내의 서로 다른 기반을 적대적으로 분리시켰기 때문에 신분제의회는 중앙 권력에 비해 세력이 약화되었다. 소비세는 오로지 도시에만 적용되었기 때문에 시골 기업들에게는 도시의 경쟁사들에 대한 비교우의의 입지를 다지게 했다. 그 결과 선제후는 막강한 권세를 지닌 지방 귀족과 불화하지 않고도 각 지역의 상업적인 부를 빼낼 수 있었다... 또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행정부 요직에 칼뱅파를 임명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보강했다. 이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선호의 문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루터파 일색인 신분제의회의 요구에 맞서는 정책이었다._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 p110


  프리드리히 2세가 1752년의 정치적 유서에서 언급한 '프로이센의 힘'은 국내의 부가 아니라 독특한 '산업 문야의 근면(gewerblichen Fleiß)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대선제후의 집권 이후, 국내 산업 발전은 호엔촐레른 정부의 핵심 목표중 하나였다. 이후의 선제후와 국왕들은 토착 노동력을 확대하기 위해 이민을 받아들이고 토착 기업의 기초를 다지고 육성함으로써 이 목표를 달성하려고 했다._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 p249


  다른 왕조와는 달리 프로이센의 국가는 호엔촐레른 왕조와는 분리된 주체였다. 왕조와는 분리된 법(法)으로 구현된 국가는 병사들과 노동자들이 충성을 바쳐야 하는 대상이었고, 국가는 이들을 책임져야할 의무를 갖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비스마르크의 정책이 '국가사회주의' 성격을 갖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광장은 국가의 문화적 목표에 대한 고도의 의식적인 표현이기도 했다... 전체적인 건물의 배치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왕궁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왕 개인이 그렇듯이, 건축에서도 프로이센 국가의 표현은 프로이센 왕조의 표현과 분리되었다. 통치자가 끊임없이 독재적으로 간섭해야 하는 필요성으로부터 국가가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관된 법정 시스템을 재조직하고 당대의 대표적인 법률가들에게 프로이센 영토에 적용할 보편적인 법전을 구상하는 작업을 맡기면서 자신이 설파한 것을 실행에 옮겼다._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 p337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프로이센은 대국이었다. 1880년대부터 1931년까지 국가기관에 고용되어 근무하는 관리는 100만 명이 넘었다. 1913년에 발표된 평가 자료에 따르면, 프로이센 공공사업부는 '세계 최대의 고용주'였다. 프로이센 철도행정에서만 31만 명의 노동자를 고용했으며, 국영 광산 부문에 고용된 사람이 18만 명이었다. 실업보험과 상해보험, 의료보호 제도를 포함해 프로이센은 전 분야에서 최첨단 사회복지를 제공했다._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 p823


 다만, 이러한 프로이센의 이러한 이미지는 나치의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 1897 ~ 1945)에 의해 '독일 제3제국의 정신'으로 차용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로이센이 사라지게 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강철왕국 프로이센>은 이처럼 30년 전쟁의 트라우마를 가진 약소국 프로이센이 독일제국의 심장부가 되고 사라지기까지의 역사를 그려낸다. 그리고, 우리는 이 안에서 강력한 제국 '프로이센'이 아닌 대외적으로는 강대국의 위협과 대내적으로는 종교적, 신분적으로 분열된 문제로 신음하는 위기의 '프로이센'을 발견할 수 있다. 일찍이 마담 드 스탈(Madame de Stael, 1766 ~ 1817)이 <독일론 De l'Allemagne>에서 말했던 프로이센의 분열된 자아가 결국 몽유병이 되어 제1차 세계대전으로 흘러간 것은 아니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프로이센을 비롯한 일단의 몽유병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제1차 세계대전으로 꿈꾸며 나아갔는지는 저자의 다른 책 <몽유병자들 The Sleepwalkers: How Europe Went to War in 1914 >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마담 드 스탈은 프로이센의 특징이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한쪽은 군사적이고 다른 한쪽은 철학적인 이미지를 제공한다고 보았다... 마치 두 얼굴을 가진 신의 분리된 시선이 프로이센의 경험을 포착한 것과 같이, 전통과 혁신이라는 양 극단이야말로 호엔촐레른 국가의 역사적 궤적을 정의한다._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 p391


‘군국주의‘는 프로이센의 국민개병제나 군대 양성을 위한 기금 납부, 혹은 남부 국가에 대한 프로이센의 주도권 강화를 의미했다.(p800)... 사민주의 운동을 하는 마르크스주의 분석가들에게 군국주의는 자본주의 속에 잠재된 폭력과 억압의 표현이었다. 바로 그 개념이 여러 조합의 복합적인 선입견을 전달해주기 때문에, ‘군국주의‘는 근대 독일의 정치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론의 집결지‘ 중 하나가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든 이 말이 사용되면서 그것은 군대와 군대가 자리 잡은 광범위한 사회적, 정치적 시스템 사이의 구조적 관계를 주목하게 만들었다. - P801

복구기의 프로이센은 공통의 민족성을 묶이고 정의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민족(nation)‘은 아니었다. 프로이센 요리라는 것은 옛날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프로이센 특유의 민속이나 언어, 방언, 음악도 없었고 프로이센만의 고유한 의상 같은 것도 없었다. 프로이센은 공동의 역사를 공유하는 공동체라는 의미에서 민족이 아니었다. 더구나 ‘프로이센 정신‘은 독일 민족주의라는 강력한 경쟁 이데올로기가 한 번도 점유해보지 않았던 토대에서 스스로를 규정해야만 했다. 그 결과 추상적이면서 파편화된 기묘한 정체성의 감각이 생겼다. - P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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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이란 무엇인가」는 프로이센의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대왕 치세 하의 철학자들이 자신의 시대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계몽‘의 의미는 학자에 따라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일 수도, 현재의 상태를 극복하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는 조금씩 달라지지만, 적어도 이들의 논리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는 공통된 인식 위에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반면 ‘계몽‘은 이론적인 문제와 더 많이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계몽은 인간생활의 제반 문제에 대해 그것이 인간의 본분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성의 척도에 따라 이성적으로 인식하고 객관적 계몽) 숙달하는 것(주관적 계몽)과 관련되어 있다. 나는 언제나 인간의 본분이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노력의 척도이자 목표이며,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매지  않으려면 반드시 주시해야 할 목표지점이라 생각한다.-모제스 멘델스존 -
- P18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의 잘못으로 초래한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년 상태란 다른 사람이 이끌어주지 않으면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무능력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미성년 상태의 원인이 지성의 결핍 때문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지도를 받지 않고서 지성을 사용할 결단력과 용기의 결핍 때문이라면 미성년 상태는 스스로의 잘못으로 초래한 것이다. 과감히 알려고 하라! 자기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계몽의 슬로건이다. - 이마누엘 칸트 -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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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가 있으면 바로 처벌하면 사사롭게 아첨하는 바가 없으며, 법과 제도가 번잡하지 않아도 천하는 크게 잘 다스려집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근본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p13/78)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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