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이 내게는 마을 나머지 부분과는 전혀 다른 그 어떤 것으로 생각되었다. 성당은 말하자면 4차원 공간을 차지하는 건물로 4차원이란 바로 시간의 차원이다. 수세기에 걸쳐 이 기둥에서 저 기둥으로, 이 제단에서 저 제단으로, 단지 몇 미터의 거리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시대들을 통해 마침내 승리자가 된 내부를 펼쳐 보였다.

우리가 콩브레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오랜 산책이라도 나갈 때면 좁았던 길이 갑자기 광대한 평원으로 탁 트이면서 여기저기 쪼개진 숲으로 막힌 지평선이 보였는데, 그 위로 생틸래르 종탑의 뾰족한 끝이 홀로 삐죽 나와 있었다. 종탑 끝이 얼마나 가늘고 얼마나 선명한 분홍빛이었는지, 오직 자연으로 이루어진 이 풍경, 이 화폭에 누군가가 예술의 작은 흔적, 단 하나의 인간적인 표시를 남겨 놓으려고 손톱으로 하늘에 줄을 그어 놓은 것 같았다.

그 무렵, 나는 연극과 사랑에 빠져 있었다. 일종의 정신적인 사랑으로, 부모님은 그때까지 내가 극장에 가는 걸 허락해 주지 않으셨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곳에서 맛본다고 생각하는 즐거움을 아주 부정확하게 상상했는데, 관객들이 각각 보는 장면이 나머지 다른 관객들이 보는 많은 장면과 같은데도, 마치 저마다 입체경을 들여다보듯 자기만을 위한 무대를 바라본다고 믿었다.

상징화된 사상이란 표현될 수 없는 것이기에, 이 상징이 단순한 상징으로서가 아닌 실제로 느끼거나 물질적으로 다루어진 하나의 현실로서 표현되어, 이것이 이 작품의 의미에 보다 정확하고 충실한 그 어떤 것을 부여하며, 작품의 교육적인 면에도 구체적이고 강렬한 그 무엇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밖에서 한 물체를 보아도, 그 물체를 보고 있는 의식이 나와 그 물체 사이에 놓이거나 그 물체를 가느다란 정신적인 가두리로 둘러싸고 있어, 나는 결코 직접적으로 그 질료에 가닿을 수 없었다. 그 질료는 말하자면 내가 물체와 접촉하기도 전에 증발해 버렸다.

우리가 실제 인물의 기쁨이나 불운에 대해 느끼는 감정도 모두 이런 기쁨이나 이런 불운에 대한 이미지의 매개를 통해서만 생겨나는 것이다. 초기 소설가들의 독창성은, 우리의 감동을 자아내는 장치 중 이미지가 유일하게 본질적인 요소여서 단지 실제 인물을 제거하는 단순한 작업만으로도 결정적인 완성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는 데에 있다.

소설가의 독창적인 착상은 정신으로서는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부분을 같은 양의 비물질적인 부분으로, 다시 말하면 우리 정신이 동화할 수 있는 부분으로 바꾸어 놓을 생각을 했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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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라는 게 사람의 의식을 크게 지배하죠. 공간에 대한 느낌을 주고, 도시 공간을 점령하기도 하니까요. 시각적 이미지가 주는 효과는 대단한 것 같습니다.

한국사회의 상황이 다른 산업화된 국가들과 같으면서도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확연히 다른 점 하나는, 불안정할뿐더러 엄청나게 사람들의 혼을 빼는 노동환경이에요. 한국과 경제 수준이 비슷한 사회 가운데 그만큼 노동 착취가 고강도·장시간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찾기 힘듭니다. 게다가 전체 노동자의 절반가량이 비정규직이고, 정규직이라 하더라도 직장의 ‘갑질’에 노출되어 있어 혹사당하죠. 이런 상황이 피착취자를 굉장히 지치고 피곤하게 하며 불안·공포·만성피로·화병을 키웁니다. 그런데 다른 산업화된 국가와 달리 한국은 이 부분을 심리치료 같은 방식이 아니라 종교적 방식으로 대응하죠. 피곤한 노동자들이 교회나 사찰을 안식처로 삼아 잠깐이나마 현실을 도피하고 재충전하는 거예요.

굉장히 많은 집회에 참여하면서 ‘미팅’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미팅은 대개 끼리끼리 이루어져요. 특정 지역에 속한 사람들, 자산 상태도 양호하고 교육 수준과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은 사람들은 교회에서도 그들끼리 사적 모임을 만들죠. 문화도 비슷하고 교류할 때 비용 분담도 용이하고, 이질적인 사람 때문에 신경 쓸 일도 없고요. 이렇게 계층화 현상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공간이 교회가 되어버렸고, 이것이 한국 개신교의 중요한 특징인 듯합니다.

대한민국에도 종교 간 갈등이 있기는 합니다. 속 깊이 들여다보면 불교와 개신교의 사이가 좋지 않은데, 다만 봉합은 되죠. 봉합되는 이유 중 하나는 국가입니다. 막강하고 전지전능한 국가를 불교든 개신교든 전폭적으로 수용하고 있죠. 또 불교든 개신교든 기업 모델을 취하고 있어서 서로 배웁니다. 예를 들어 봉은사에서 대형교회에 사절단을 보내 경영 모델을 시찰하기도 했어요. 큰 사찰이 큰 교회를 벤치마킹하기도 하고 교회도 사찰의 움직임을 눈여겨보죠. 경쟁을 하기는 하지만 본격적인 갈등이 없는 이유는 한마디로 사업 모델이 종교 간에 서로 그다지 다르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가 1901년에 쓴 글에 조선 대중은 서양처럼 경계가 명료한 종교에 배타적으로 귀속하는 것이 아니라 유교·불교·샤머니즘 등 여러 종교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점이 드러납니다.18 이후 많은 선교사들이 존스의 탁견에 공감했지요. 그리고 미국 북감리회에서 파송된 또다른 선교사인 헐버트(Homer B. Hulbert)는 조선인들의 심성에 종교성이 혼합되어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적·적대적 감정도 없다는 점을 지적했어요.

사실 근대 종교학적 해석은 종교개혁의 산물이에요. 종교개혁 직후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은 일종의 땅뺏기 싸움을 벌였어요. 어느 땅의 영주가 프로테스탄트든 가톨릭이든 하나를 선택하면 그 땅의 모든 사람은 영주의 선택에 귀속되어야 했죠. 이런 조치는 루터교와 가톨릭 간에 맺어진 아우크스부르크협약에 의해 이루어졌어요. 이후 여러 프로테스탄트 종파들이 각각 정치세력을 등에 업고 비슷한 협약을 맺었죠. 그 과정에서 서양근대의 ‘네이션스테이트’(nation state, 민족국가)가 형성되었지요. 즉 종교개혁 이후 종교들 간의 경계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국경이 형성되는 과정이 결합되면서 근대의 정치적·종교적 질서가 구축된 것입니다.

근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이분법적입니다. 현실은 악이고, 근본적 진리가 관철되었던 그 세계는 절대선이라는 거죠. 그런 점에서 근본주의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상상을 통해 현실을 견디게 하는 종교적 담론체계라고 할 수 있어요.

한국에 나타난 근본주의는 이와 조금 다릅니다. 한국은 세속적 성공을 향해 달리게 하는 신앙이 근본주의적 진리와 교묘하게 부합해요. 가령 ‘부자가 되고, 건강해지며, 영적으로 구원받는 것이 하나다’라고 하는 조용기의 3박자 구원론은 지극히 세속적이죠. 현실을 도피하게 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자기 식으로 재해석하고 그것이 근본 진리와 부합한다고 믿는 거예요. 변형된 근본주의라 할 수 있는데, 변형되었다는 것은 연속성과 차이가 함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한편으로 조용기주의는 번영신학과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번영신학은 성공한 미국 중상위층의 욕망을 신앙화한 데 반해, 조용기주의는 밑바닥 대중을 욕망하는 주체로 해석했어요. 다만 조용기는 교회를 개척한 서대문구(오늘날 은평구) 대조동 달동네에서 서대문로터리로, 그리고 여의도로 교회당을 옮겨갔고, 그 과정에서 점점 욕망의 주체가 계층적으로 상승해갔죠. 그런 점에서 조용기주의는 점점 번영신학과 비슷해지고요.

개신교는 남한사회의 국시(國是)에 가까운 도덕주의적 이념을 제시하여 강조하고, 반공투쟁 상황에서는 반공의 기치를 독촉할 수 있는 일종의 신흥 ‘근대판 성리학’이 잠시 되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민주화 이후에는 여러모로 바뀌었고요.

산업화시대의 한국 개신교는 반공적이고 맹신적인 친미주의를 드러냈습니다. ‘종미(從美)’라고 부르는 편이 어울릴 정도로요. 하지만 그때까지 개신교는 한국 시민사회에서 그다지 문제시되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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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4 2022-05-04 0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밤에, 어제 어느 유튜브에 현근택 변호사가 나왔는데, 제주 주민들은 지금도 교회(개신교)에 대해 배타적이라고 하더군요. 좀 아팠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5-04 06:06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개인적으로 4.3 당시 서북청년단이 영락교회 출신 중심이었다는 점과 함께 조금 더 올라간 시기를 다룬 <이재수의 난>을 보면서 천주교를 포함한 기독교에 대해 제주도민들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사고는 환각적 소원의 대체물에 불과하다. 꿈이 소원 성취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소원 이외에 우리의 정신 기관을 가동시킬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짧은 길을 퇴행하여 소원을 성취시키는 꿈은 부적절한 것으로 버림받은, 정신 기관의 〈제1차〉 작업 방식의 표본만을 보존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꿈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꿈이 무의식의 소원 성취를 표현한다는 사실뿐이다. 주도권을 쥐고 있는 전의식 조직은 소원 성취를 왜곡시킨 후 허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요점만 말하면, 우리는 그러한 사고 흐름을 〈전의식적〉 사고 흐름이라 부르고 완전히 합리적인 것으로 간주했으며, 그것은 단순히 등한시되거나 중단되어 억제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표상의 흐름을 어떤 방식으로 설명할 것인지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자. 우리는 목적 표상에 의해 선택된 연상의 경로를 따라서 〈리비도 집중 에너지〉라고 불리우는 일정한 크기의 흥분이 목적 표상에서 전위된다고 생각한다. 〈등한시된〉 사고 흐름은 이러한 리비도 집중을 받지 못하고, 〈억제〉되거나 〈배척〉된 사고 흐름은 에너지 집중이 철회되면서 자신의 흥분에 내맡겨진다. 목적을 부여받은 사고 흐름은 일정한 조건에서 의식의 주의를 끌 수 있으며, 그 결과 의식의 도움을 받아 〈리비도 과잉 집중
Uberbesetzung〉이 된다.

꿈은 소원을 성취된 것으로 보여 주면서 우리를 미래로 인도한다. 그러나 꿈을 꾸는 사람이 현재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미래는 소멸될 수 없는 소원에 의해 과거와 닮은 모습으로 형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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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게, 나의 소중한 벗이여. 도대체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자네도 보다시피 수많은 훌륭한 기사들이 땅에 쓰러져 있네! 그리운 프랑스, 그 아름다운 나라를 위해 슬퍼할 일일세.
이제 프랑스가 저런 기사들을 잃었으니 말일세!
아! 친애하는 폐하시여, 왜 여기 계시지 않는단 말입니까!
올리비에, 형제여,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나?
어떻게 하면 폐하께 소식을 전할 수 있겠나?"

올리비에가 말한다.
"그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일세.
그리고 자네 가문 전체를 욕보이는 걸세.
그 수치는 그분들이 살아 계신 내내 계속될 걸세!
내가 상아 나팔을 불라고 했을 때, 자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네.
이제는 상아 나팔을 불겠다고 해도 내가 동의할 수 없네.
지금 상아 나팔을 부는 것은 용기 있는 자가 할 짓이 아니네.
자네의 두 팔은 이미 피로 물들었네!"

도망치려 하지만 헛된 일이다.
롤랑 경이 워낙 힘차게 그를 내려쳐 코를 보호하는 부분까지 그의 투구를 쪼개고,
코와 입과 앞니까지 베더니 알제산 갑옷과 함께 몸통을 반으로 가른 다음,
은으로 된 안장 머리 사이로 금칠한 안장은 물론말의 등뼈까지 깊숙이 베어버린다.
사람과 말 모두 살아날 길 없이 죽는다.
그러자 에스파냐인들 모두가 고통의 비명을 지른다.
프랑스인들은 말한다. "우리 수호자의 공격은 훌륭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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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우리 삶이란 것이, 동일한 시대의 초상화들이 걸린 모습이 마치 가족처럼 보이는, 같은 색조를 띠는 미술관과 흡사하다고나 할까. ? 한가로움이 넘쳐흘렀고, 언제나 커다란 마로니에와 산딸기 바구니, 그리고 쑥의 새싹 향기가 풍겨 나왔다.

이 두 분은 고상한 것을 동경했기 때문에, 비록 역사적으로 흥미로운 일이라 할지라도 소위 잡담이라고 불리거나, 보다 일반적으로는 미적이나 도덕적인 대상에 직접 연결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사교 생활에 직간접으로 연결된 듯이 보이는 것 일체에 대한 그들의 초연한 사고는, 식사 때 대화가 두 분 노처녀께서 좋아하는 화제로 가지 못하고 경박한 어조나 단지 세속적인 어조를 띠기만 해도, 그들의 청각이 일시적으로 불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 청각 기관을 쉬게 함으로써, 진정한 기능 수축의 시작을 감내하게 할 정도였다

사진사가 제아무리 예술품이나 자연의 재현에서 제외되고 위대한 화가로 대체된다고 해도, 그 화가의 해석을 재생할 때는 마음대로 찍을 권리를 가지는 법이다. 이런 통속성의 도래에 직면한 할머니는 그걸 피해 보려고 애쓰셨다

이 콩브레의 거리들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일부 남아 있기는 하지만 너무나 깊숙한 곳에,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세계와는 너무도 다른 빛깔로 채색되어 있어 광장에서 그 거리들을 내려다보던 성당처럼, 내게는 사실 마술 환등기에 비친 모습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벽난로 불은 밀가루 반죽을 구울 때처럼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를 풍겼으며, 이 냄새 탓에 방 안 공기는 완전히 엉겨 있었다. 그리하여 그 냄새는 아침의 화창하고도 습기 찬 신선함이 이미 반죽하고 ‘발효해 놓은’ 냄새들을 여러 겹으로 포개 놓고 노랗게 구워 주름지게 하고 부풀어 오르게 하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손에는 만져지는 시골 과자인 거대한 ‘쇼송’
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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