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이라는 게 사람의 의식을 크게 지배하죠. 공간에 대한 느낌을 주고, 도시 공간을 점령하기도 하니까요. 시각적 이미지가 주는 효과는 대단한 것 같습니다.

한국사회의 상황이 다른 산업화된 국가들과 같으면서도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확연히 다른 점 하나는, 불안정할뿐더러 엄청나게 사람들의 혼을 빼는 노동환경이에요. 한국과 경제 수준이 비슷한 사회 가운데 그만큼 노동 착취가 고강도·장시간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찾기 힘듭니다. 게다가 전체 노동자의 절반가량이 비정규직이고, 정규직이라 하더라도 직장의 ‘갑질’에 노출되어 있어 혹사당하죠. 이런 상황이 피착취자를 굉장히 지치고 피곤하게 하며 불안·공포·만성피로·화병을 키웁니다. 그런데 다른 산업화된 국가와 달리 한국은 이 부분을 심리치료 같은 방식이 아니라 종교적 방식으로 대응하죠. 피곤한 노동자들이 교회나 사찰을 안식처로 삼아 잠깐이나마 현실을 도피하고 재충전하는 거예요.

굉장히 많은 집회에 참여하면서 ‘미팅’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미팅은 대개 끼리끼리 이루어져요. 특정 지역에 속한 사람들, 자산 상태도 양호하고 교육 수준과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은 사람들은 교회에서도 그들끼리 사적 모임을 만들죠. 문화도 비슷하고 교류할 때 비용 분담도 용이하고, 이질적인 사람 때문에 신경 쓸 일도 없고요. 이렇게 계층화 현상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공간이 교회가 되어버렸고, 이것이 한국 개신교의 중요한 특징인 듯합니다.

대한민국에도 종교 간 갈등이 있기는 합니다. 속 깊이 들여다보면 불교와 개신교의 사이가 좋지 않은데, 다만 봉합은 되죠. 봉합되는 이유 중 하나는 국가입니다. 막강하고 전지전능한 국가를 불교든 개신교든 전폭적으로 수용하고 있죠. 또 불교든 개신교든 기업 모델을 취하고 있어서 서로 배웁니다. 예를 들어 봉은사에서 대형교회에 사절단을 보내 경영 모델을 시찰하기도 했어요. 큰 사찰이 큰 교회를 벤치마킹하기도 하고 교회도 사찰의 움직임을 눈여겨보죠. 경쟁을 하기는 하지만 본격적인 갈등이 없는 이유는 한마디로 사업 모델이 종교 간에 서로 그다지 다르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가 1901년에 쓴 글에 조선 대중은 서양처럼 경계가 명료한 종교에 배타적으로 귀속하는 것이 아니라 유교·불교·샤머니즘 등 여러 종교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점이 드러납니다.18 이후 많은 선교사들이 존스의 탁견에 공감했지요. 그리고 미국 북감리회에서 파송된 또다른 선교사인 헐버트(Homer B. Hulbert)는 조선인들의 심성에 종교성이 혼합되어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적·적대적 감정도 없다는 점을 지적했어요.

사실 근대 종교학적 해석은 종교개혁의 산물이에요. 종교개혁 직후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은 일종의 땅뺏기 싸움을 벌였어요. 어느 땅의 영주가 프로테스탄트든 가톨릭이든 하나를 선택하면 그 땅의 모든 사람은 영주의 선택에 귀속되어야 했죠. 이런 조치는 루터교와 가톨릭 간에 맺어진 아우크스부르크협약에 의해 이루어졌어요. 이후 여러 프로테스탄트 종파들이 각각 정치세력을 등에 업고 비슷한 협약을 맺었죠. 그 과정에서 서양근대의 ‘네이션스테이트’(nation state, 민족국가)가 형성되었지요. 즉 종교개혁 이후 종교들 간의 경계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국경이 형성되는 과정이 결합되면서 근대의 정치적·종교적 질서가 구축된 것입니다.

근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이분법적입니다. 현실은 악이고, 근본적 진리가 관철되었던 그 세계는 절대선이라는 거죠. 그런 점에서 근본주의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상상을 통해 현실을 견디게 하는 종교적 담론체계라고 할 수 있어요.

한국에 나타난 근본주의는 이와 조금 다릅니다. 한국은 세속적 성공을 향해 달리게 하는 신앙이 근본주의적 진리와 교묘하게 부합해요. 가령 ‘부자가 되고, 건강해지며, 영적으로 구원받는 것이 하나다’라고 하는 조용기의 3박자 구원론은 지극히 세속적이죠. 현실을 도피하게 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자기 식으로 재해석하고 그것이 근본 진리와 부합한다고 믿는 거예요. 변형된 근본주의라 할 수 있는데, 변형되었다는 것은 연속성과 차이가 함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한편으로 조용기주의는 번영신학과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번영신학은 성공한 미국 중상위층의 욕망을 신앙화한 데 반해, 조용기주의는 밑바닥 대중을 욕망하는 주체로 해석했어요. 다만 조용기는 교회를 개척한 서대문구(오늘날 은평구) 대조동 달동네에서 서대문로터리로, 그리고 여의도로 교회당을 옮겨갔고, 그 과정에서 점점 욕망의 주체가 계층적으로 상승해갔죠. 그런 점에서 조용기주의는 점점 번영신학과 비슷해지고요.

개신교는 남한사회의 국시(國是)에 가까운 도덕주의적 이념을 제시하여 강조하고, 반공투쟁 상황에서는 반공의 기치를 독촉할 수 있는 일종의 신흥 ‘근대판 성리학’이 잠시 되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민주화 이후에는 여러모로 바뀌었고요.

산업화시대의 한국 개신교는 반공적이고 맹신적인 친미주의를 드러냈습니다. ‘종미(從美)’라고 부르는 편이 어울릴 정도로요. 하지만 그때까지 개신교는 한국 시민사회에서 그다지 문제시되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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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4 2022-05-04 0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밤에, 어제 어느 유튜브에 현근택 변호사가 나왔는데, 제주 주민들은 지금도 교회(개신교)에 대해 배타적이라고 하더군요. 좀 아팠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5-04 06:06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개인적으로 4.3 당시 서북청년단이 영락교회 출신 중심이었다는 점과 함께 조금 더 올라간 시기를 다룬 <이재수의 난>을 보면서 천주교를 포함한 기독교에 대해 제주도민들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